이제는 용서해보기로 했다. 어떤 실패의 결정적 순간을
맞는 말이 더 아프다.
말은 근거와 정당성이 뒷받침될 때 그것을 방패 삼아 더욱 단단하고 날카로워진다. 말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쓰이기도 하지만 타인을 공격하는 좋은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듣는 사람의 감정 상태에 따라 '입바른 소리'로 들리기도 하는 '맞는 말'들은, 감정의 파도에 어이없이 휩쓸리는 실수를 반복하고 사는 인간의 불완전한 면을 아프게 후벼 판다. 그래서 합당하고 올바른 말일수록 더욱 듣기 싫고, 이미 벌어진 후에 '거봐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지?'하고 따져 묻는 식의 말은 묵혀두었던 화를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동굴 깊숙한 곳에서 또다시 우물을 파게 만들기도 한다. 분노는 단층 깊은 곳에 화석처럼 굳어져있던 케케묵은 사건에 대한 기억마저 파헤치도록 만들고, 그중 쓸만한 무기를 꺼내 들어 반격에 나서도록 부추긴다. 향후의 흐름과 대처에 따라 꽤나 더럽고 치사한 말들이 오갈 수밖에 없는 작고 사소하면서도 치명적인 '말들의 전쟁'이 발발하고 만다.
만약 상대방에게 그 선택이 불러올 미래의 불행을 충분히, 그리고 간곡히 설득하고 설명했다고 하더라도, 일이 틀어진 이후 자신의 조언이 얼마나 '맞는 말'이었는지 증명되었다는 식의 어떠한 말도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것은 상대방의 실수에 대한 조롱이며, 자신이 예측한 미래의 정확성을 자랑하고자 하는 '자존심'의 발로에 지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이런 말들은 조언으로서 아무런 기능도 수행하지 못하며, 가까운 사람마저 자신의 아픔을 고소해한다는 인식을 줄 뿐이다. 상대방이 입은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자 하는 의도가 아니라면 가급적 입이 간질거려도 굳게 다무는 것을 적극 추천한다.
누군가의 실수를 바로잡고 싶거나 편향된 사고방식과 고정관념 등을 개선해주고 싶다면 상대방이 처한 상황과 말을 전달하는 방식을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실수로 틀어져버린 결과를 교정하고 성찰하기 위한 시간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상대방이 그것을 침범할 권리를 나에게 양도하거나 부탁한 적이 없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한 무자비한 비판과 비난을 쏟아붓는 방식은 결코 좋지 않다. 그보다는 그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훨씬 더 그를 위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젠장,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냐고!'
그런 공격에서조차 적절히 받아칠 말이 없을 때, 상대방에게 "꺼져!"라고 소리치면서도 한편으로는 그의 말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을 때 감정의 골을 따라 흘러내리는 눈물은 바닷물이 코로 들어갔을 때보다 쓰고도 고통스럽다. '젠장, 누가 그걸 몰라서 이러냐고!'
생각할수록 얼굴이 화끈해지고 입술을 잘근잘근 씹게 되는 어떤 실패의 결정적인 순간들은, 평소에 코웃음 치며 무시하던 신의 존재와 타임머신의 실존을 간절히 바라게 하고, 이미 수천번 곱씹으며 허벅지를 바늘로 콕콕 쑤셨던 자책의 시간에도 불구하고 아쉬움과 후회, 자괴감이 뒤엉킨 복잡한 마음은 쉽게 가라앉지 않는다. 갈 곳을 잃은 분노가 이미 넝마가 된 내면의 텃밭을 엉망으로 휘저어놓는 날이면, 서산 너머로 말없이 스러져가는 붉은 저녁노을에 심할 정도로 감정이입이 된다.
'나 이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나는 '왜' 사는 걸까?' 어깨를 짓누르는 고독이 살이 아릴 정도로 차갑고 시린 겨울날의 새벽바람처럼 어깨와 목을 잔뜩 수축시키는 느낌과 함께,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는 동안에도 느껴지는 근원적 외로움의 출처가 명확해지는 느낌마저 든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피어나는 복잡한 심상들이 골을 흔들어 머릿속은 창백해지고, 아득한 현기증마저 인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하게 되는 일이 있다.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하게 되는 일이 있다. 합리와 이성이 경종을 울리는 것을 알면서도 해석할 수 없는 이유들에 의해 등 떠밀리듯 하고야 마는 일들이 있다. 표면적으로는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이 만든 결과이지만, 사실은 수면 아래를 떠도는 복잡한 조류에 휩쓸려 '나도 나를 어찌할 수 없었던' 순간들이 존재한다. 헤아릴 수 없는 불꽃놀이 인파에 떠밀려, 들어가지 않아야 했을 지하철역 입구로 들어가고 마는 것처럼, 분명 스스로의 걸음이었으나 '자의'는 배제되고 말았던 억지스러운 선택의 순간들도 있다. 그런 순간들은 결과가 비록 후회로 점철되었다 하더라도, 당시에는 그 지점을 통과하지 않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던, 사소하지만 중요했던 인생의 한 지점이었는지도 모른다.
몸과 마음이 의지를 정면으로 거부할 때가 있다. 보고 싶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던 시간들을 돌아보면 그랬다. 내가 정말 그를 보고 싶은 걸까? 스스로조차도 '보고 싶다'는 마음의 진위여부가 의심될 때가 있었다. 한 번 찾아가 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에이, 이제 와서 뭘" 하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 이면에는 망설임과 아쉬움이 존재했던 때가 있었다. 한 번은 직접 눈으로 확인해야 할 것 같은 당위와 그를 만난 이후에 대한 두려움, 상반되는 두 가지 감정 중 어느 쪽이 진짜 내 마음인지 스스로도 판단할 수 없었고, 선택을 내리지 못하는 순간들 속에 시간은 흘러갔고, 사람도, 상황도 변해갔다.
가까운 이의 죽음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누군가에게 남은 시간이 생각보다 짧을 수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다. '이성'과 '합리'는 다른 두 사람에게 맡겨진 실타래 사이에 아무런 연결고리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지만, 인간은 때때로 한 사람의 실타래 끝이 다른 사람의 운명을 끌어당긴다고 믿게 될 때가 있다. 가까운 이의 상실로 주인을 잃어버린 마음의 공터는 급격한 정서적 허기를 유발하고, 그동안 쉽사리 발걸음을 떼지 못했던 어떤 한 사람과의 만남을 강하게 원하는 보상심리로 이어졌을지도 모른다.
그 감정들은 덧없는 미련 따위로 치부하기 어려울 정도로 묵직하게 명치를 압박해오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목구멍 깊숙한 곳에 무시하기 어려운 굵은 가시가 걸려있을 때와 유사했고, 종일 긴장상태였던 탓에 아침에 먹은 삶은 고구마 두 알이 식도를 꽉 막고 있는 느낌 같기도 했다. 화재가 난 건물 속 엘리베이터에서 호흡은 점점 힘들어지는데 바닥부터 차오르는 연기를 바라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고, 허우적거리며 물가로 빠져나가려 안간힘을 쓰는데 다리에 쥐가 나서 굳어가는 것 같기도 했다.
생전에 도리를 다하지 못했다는 뒤늦은 후회가 더 늦기 전에 미뤄왔던 만남을 실행해야만 하겠다는 조급함으로 이어졌고, 원래는 누군가를 향했을 그리움이 방향을 틀어 엉뚱한 곳을 향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느끼는 답답함을 해소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할 것 같은 불안이, 어쩌면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수 있다는 다른 불안을 자극했고, 뒤늦게라도 미뤄왔던 그 일을 반드시 지금, 꼭 해야 할 것만 같은 강박과 같은 생각에 사로잡혔다. 이런 때에 타인의 충고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이유는 모든 감각과 생각이 하나의 지점에 강력하게 묶여버린 탓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수십 년의 세월을 넘어 그를 만났다. 너무도 오랜 시간이 흘러버린 탓에 희미하게나마 기억에 남아있었던, 어쩌면 내 마음대로 만들어낸 상상 속에나 존재하는 잔상과도 같은, 그런 모습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왠지 나는 그 사람이 그와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눈빛과 숨소리, 손짓과 발짓 하나하나가 내가 아는 그임을 온몸으로 증명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잠시의 만남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내 그 만남을 후회했다. 목에 걸린 가시는 더욱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버렸고,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과 압박은 더욱 무거워졌다. 형언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부담감은 다시는 그를 찾지 못하도록 발을 꽁꽁 묶어버렸다.
이제는, 어떤 실패의 결정적 순간을 용서해보려 한다.
희미한 불안은 끊임없이 나에게 '경고'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 만남의 이후를 과연 기약할 수 있을까? 그를 만나는 것이 우리에게 좋은 사건으로 남을까? 예견된 후회는 이미 나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많은 '징후'들이 나의 선택을 제지하려 애썼는지도 모른다. 서랍 깊숙한 곳에 처박혀 있던 케케묵은 사진을 굳이 꺼내볼 이유는 진작부터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도 한 번쯤은 나를 만나고 싶어 했을 거야, 어떤 인연은 단순히 오래 떨어져 있었다는 이유로 그냥 사라지지 않는 법이야.' 그저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질문도 없이 누군가의 생각을 정해버리는 자기 합리화의 과정을 통해, 자력에 이끌리듯 그 사람을 향하던 발걸음은 결코 멈출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 번 얼굴을 비추고 다시 찾지 않는 것이 그에게 얼마나 잔혹한 사건으로 평생에 멍울이 될지 익히 알고 있던 누군가가 절절한 외침으로 나를 막아섰다고 하더라도.
그를 만나기로 마음먹었던 것은 결국 나의 숨통을 틔우기 위해서라고 생각해보기로 했다. 셔츠 끝단까지 채워두었던 단추를 하나 풀어주기 위해서였을 거라고. 어떤 사건들은 그렇게 후회할 것을 알면서도 반드시 실행하고야 마는 일들이 있다. 지금 하지 않더라도 언젠가 반드시 한 번은 하게 될 것만 같은 그런 일들. 만약 시간을 되돌려 다시 그 실패의 결정적 순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거라는 자신은 없다. 그런 연유로 이제는 나를 용서해보려 한다. 오랜 시간의 터널을 지나 아픈 상처를 후벼 파고야 말았던 '어떤 실패의 결정적 순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