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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종말

정인이의 죽음이 가슴 아픈 이유

by 작가 전우형

정인이의 죽음이 도무지 '남일'같지 않은 것은 우리 모두에게 어린 시절이 존재했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자식이었고, 일정 비율로 누군가의 부모가 된다. 아이는 본능적으로 부모를 찾고, 부모는 아이에게 자신이 얼마나 필요한 존재인지 안다.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능력조차 갖추지 못한 채로 태어난 아이는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과 보살핌 없이는 몸도 마음도 건강하기 어렵다.


부모가 강인해질 수밖에 없는 것은 이제는 자신의 삶이 온전히 자신만의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혼자만이 존재했던 좁은 인생길 위에는 이제 자식들이 함께 서 있고, 그들은 그 좁은 땅덩어리를 떠나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아이들의 절박함을 부모는 함께 느낀다. 그들의 절박함을 나누어 가지려 하고, 가능하면 아이들이 평온 속에 자라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 그런 부모의 사랑 아래서 아이들은 절박함 대신 따뜻함을 느끼고, 세상을 살아갈만한 것으로 인식하게 된다.


부모에게 모든 것을 의존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어린아이들에게 있어 부모의 존재는 유사 신의 영역에 가깝다. 아이들 역시 그런 과거는 인정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에게 의존해야만 하는 것은 상당히 괴롭고, 수치스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사춘기에 접어든 아이들은 흔히 이렇게 말한다. "내가 알아서 할게, 나 좀 내버려 둬" '내버려짐'이 두려웠던 시절을 넘어, 더 이상 부모에게 의존하지 않아도 되는 독립적인 존재임을 인정받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런 독립에 대한 갈급한 마음조차도 어린 시절 부모와 건강한 의존관계가 형성되었을 때 가능해진다. 독립조차도 사랑의 산물인 탓이다.




정인이는 얼마나 끔찍했을까? 학대받는 아이들의 심정은 한없는 '절망'에 가까울 것이다. 도망치면 굶어 죽고, 도망치지 않으면 맞아 죽는다. 극도의 공포 앞에 사람은 'Fight or Flight' 중 어떤 것도 선택하지 못한다고 한다. 도망칠 능력조차 없는 아이는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절망과 공포 속에 저항의지마저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울어도 소용없다는 것을 알게 된 아이는 우는 법조차 잃어버린다. 새의 울음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적막 속에 얼어붙은 공간. 사람의 온기가 사라진 암흑 속에서 인간은 춥고, 외롭고, 고통스럽고... 두렵다.


공감능력을 잃어버린 부모는 그래서 끔찍하다. 그들이 부모든, 양부모든 간에 어린아이를 학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미 그들은 소시오패스나 다름없다. 입양한 아이라고 해서 학대할 수 있는 부모는 자신이 직접 나은 아이도 얼마든지 학대할 수 있다. 누군가를 무자비하게 학대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사람이 느낄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감각을 완전히 차단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고 장면이나 누군가가 다치는 장면, 혹은 폭행 장면을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주춤하게 되거나, 어깨가 움츠러들며 속눈썹에 가느다란 경련이 일어나게 된다. 그런 장면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사람은 없다. 하물며 그 대상이 자신의 아이이고, 자신이 그러한 상황을 만든 장본인이었음에도 아이가 놀다 넘어졌다며 태연히 병원에 데려갈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인간'일까? 작년 한 때 언론에 알려져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던, 선배를 집에 가두어둔 채 몇 달 동안 잔혹한 고문을 일삼은 한 대학 커플의 이야기와 정인 양을 학대해 죽음으로 몰고 간 양부모의 사건은, 본질적인 측면에서 전혀 차이가 없다. 그런데 '무혐의 처분'이라니, 분노의 단계를 넘어서 화조차 나지 않는다.




공감능력은 상대와 자신을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을 때 가장 낮아진다. 상대방의 상황과 내 상황이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느끼면, 때때로 인간은 고통받거나 죽어가는 사람을 보고도 남의 일로 여기거나 그저 '안됐네' 한마디로 자신의 감정을 정리해버리기도 한다. 자신에게 상대방을 걱정할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 공감능력은 역시 낮아진다. 내가 너무 힘들면 상대방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강한 적대감에 휩싸일 때 공감능력은 일시적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분노와 공격성이 모든 감정을 덮어버리는 탓이다. 부모가 아직 한없이 어린아이를 자신과 완전히 분리시킬 수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경우일까?


그 어떠한 사정도 학대의 이유는 될 수 없다. 아이들을 보호해야 하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생존능력이 전무하기 때문이 아니다. 인간에 대한 최소한의 연민조차 과거의 유물이 되어가는 상황이 초래할 인간 공동체의 위기 때문도 아니다. 다만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런 일들을 벌어졌을 때 마음속 깊이 느껴지는 상실감과 근원적 공포에 대하여. 아이에게만 부모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발달된 사회와 공고해진 인프라 덕분에 혼자서도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진다고 하더라도, '인간'이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느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랑을 잃어버려서는 안 된다. 학대는 '사랑의 종말'에서 비롯되는 것이기에. 정인이의 안타까운 죽음에 애도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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