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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존

의존할수록 잃어버린다.

by 작가 전우형

환경에 순응할 것인가, 환경을 변화시킬 것인가. 우리는 언제나 선택의 기로에 선다. 주도권을 잃고 싶지 않다면 환경을 변화시키는 쪽을 선택해야 할 것이다. 진화에는 시간이 걸리고, 다양성과 불확실성의 혼돈 속에 누군가는 도태당하기 마련이다. 그 누군가에 '내'가 포함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로또에 당첨되기보다 어려운 진화의 주사위를 던지며 내가 선택되는 행운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방식보다는 추운 겨울을 이겨내기 위한 따뜻한 집과 두터운 옷을 만들어내는 것이 조금 더 빠르고 안전한 방법이었을지 모른다.


인간은 자신에게 적합하도록 환경을 변화시키는 방식으로 적응하고 살아남아 왔다. 나약한 인간이 위협받지 않고 살아갈 수 있는 안전하고 독립된 세상을 조금씩 '만들어' 온 것이다. 문명과 집단지성의 발달은 인간이 환경마저 지배할 수 있을 것 '같은' 힘을 주었고, 발전된 과학기술 덕분에 한겨울에도 따뜻하고 밝은 집안에서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노력의 결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혼란을 겪으면서도 최소한의 생존권을 비롯한 삶의 기본 틀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완벽하다 자부하는 온갖 시스템들로 도배된 온실 속 세상은 참으로 미묘한 연계와 아슬아슬한 균형 위에 서 있다. 퍼즐 조각을 쌓아 올린 금자탑은 몇 개의 조각이 유실되는 것만으로도 무너져 내리곤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오만에 빠진 채 소박했던 과거의 자화상을 완전히 망각해버린 모습과 대면하게 된다.




어느 순간부턴가 너무 많은 것들을 나 이외의 것들에 의존하게 되었다. 의존이 일상화된 탓에 그 수단들이 마치 나의 일부로 자리 잡은 느낌마저 든다.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나는 노트북에 의존하고 있다. 전원이 차단되면 자체 배터리로 2시간여를 쓸 수 있는 한정된 수단이고, 인터넷과 와이파이 신호도 모두 끊긴다. 인터넷 하나만 차단되어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검색이나 유튜브 콘텐츠도 활용할 수 없게 된다. 당연하게도 브런치 채널에도 접속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동안 써온 글이지만 작성자인 나조차도 글을 직접 확인할 수 없게 될 수 있다. 전원이나 인터넷이 차단되는 사소한 문제 하나만으로도 말이다.


예전처럼 글을 쓸 수 있는 수단이 펜과 종이뿐이었다면, 그간 작성해온 글들이 폐지더미 형태라도 방 한구석에 존재라도 하겠지만, 브런치라는 가상의 공간에 익숙해져 버린 지금은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이 한여름밤의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작성하고 저장하고 관리하고 공유하기 편해진 만큼 사라지기도 쉬워진 것이다. 과학기술의 이면에 존재하는 어두운 그림자들이다.


사용하지 않는 기능은 퇴화된다. 자동차가 일상화된 후 걸어 다닐 일이 줄어들었다. '자동차'라는 수단을 이용해 두 다리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었던 먼 곳까지 힘들이지 않고 갈 수 있게 되었지만 그 반작용으로 가까운 거리조차 자신의 걸음으로 가는 법을 잃어버렸다. 인간이 직접 해 왔던 많은 힘든 일들을 수많은 형태의 기계가 대신해줄 수 있게 되었고, 사람의 힘으로 불가능했던 대규모 건축도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힘을 쓸 필요성이 줄어들면서 팔다리는 가늘어지고 쌀 한 가마니도 짊어질 수 없을 만큼 평균 근력은 약해졌다.


인간의 모든 기능은, 그것이 신체능력이든 아니면 정신적 역량이든 간에, 생존에 필수적일 때 가까스로 유지되고 진화된다. 내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할 수 있는 새로운 수단을 갖게 되었을 때 그와 관련된 능력은 꾸준히, 조금씩 도태되며 그 능력을 활용하는 전체적인 개체수는 줄어들기 마련이다. 인간의 능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 영역은 점차 확장되고 있고, 그 결과 인간의 고유한 능력들은 다른 무언가로 대체될 위기에 처했다. 우리가 그것들을 '사용'하는 것을 넘어, 그것들에게 우리가 가진 무언가를 '훼손'당할 위기에 놓인 것을 진지하게 고민해볼 시점이 되었다. 스스로 달릴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사람에게 자동차가 사라져 버렸을 때 과연 혼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상의 영역에서 정전이 되었을 경우 흔히 불이 꺼진 캄캄한 상태만을 생각한다. 하지만 정전이 되면 그 흔한 수도꼭지조차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다. 당연하다고 여겨왔던 거의 모든 기능들이 셧다운 된다. 어느 것 하나 전기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곳이 없다.

이전에 바다 한가운데서 발전기 고장으로 배가 정전상태에 놓인 적이 있었다. 한겨울 바다 위에서 몇 시간만 정전 상태로 방치되면 철판 투성이를 이어 붙인 선내는 이내 얼음장처럼 차가워진다. 전도성이 강한 철판들이 겨울의 속성을 고스란히 흡수해 뼛속까지 시린 냉기를 바닥부터 차근차근 쌓아 올리는 탓이다.


전열기조차 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면 핫팩이나 양초같이 평소에는 별 볼 일 없던 것들이 소중해진다. 뜨끈한 히터의 온기 속에 러닝셔츠 한 장만을 걸치고 이불을 걷어차던 사람도, 한겨울의 추위를 간접체험이라도 하게 되면, 옷이란 옷은 모두 다 껴입고 담요로 온몸을 꽁꽁 두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게 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기 때문이다.


단순히 상상하는 것보다 겨울 추위는 훨씬 더 무섭다. '추위'라는 단어로 쉽사리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온몸에 지독한 통증을 유발할 뿐 아니라, 적절한 보온대책 없이 추위에 한 시간 정도만 노출되면, 이러다가는 곧 얼어 죽겠다는 실질적인 위기의식이 느껴지게 된다. 넓은 바다를 자기 안마당처럼 누비던 배도 전기의 힘이 사라지면 일순간 무용지물이 되기 마련이고, 그 안에서 안락함을 누리던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북풍한설이 몰아치는 설원 한가운데 홀로 서있는 꼴이 되는 것이다. 바람 앞의 등불처럼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던 상태가 어쩌면 원래 인간이 누리던 지위였을지 모른다.




마치 '등가교환'의 법칙처럼, 무언가에 의존할수록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온실에 자신을 가둬둘수록 찬바람을 버틸 힘은 사라지고, 호의적이지 않은 환경에 적응할 힘은 상실된다. 사실 이런 식의 논의는 아무런 의미도 없을지도 모른다. 인간에게 환경을 지배하고 변화시킬 힘이 있고, 그 시스템을 유지할 역량이 있다면 그깟 시련을 이겨내는 힘 따위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것이 아닐까? 시련 자체를 마주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모든 위험상황을 자신의 통제하에 둔다면, 겪지 않아도 될 시련 따위 무시해버려도 괜찮은 것 아닐까? 하지만 가장 큰 위험은 어느덧 인간의 삶을 도배하고 있는 안락한 시스템들에 갇힌 채, 한정된 하늘만을 바라보게 된 인간의 '오만'에서 비롯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실제로는 수많은 우연과 행운과 제비뽑기의 도움을 받아 가까스로 만들어진 세상을 마치, 인간이 자신의 능력만으로 바꿔온 것처럼 착각한 탓이다. 그렇게 인간은 '오만'에 취해버렸고, 그 결과 '감사'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감사'는 지금 옆에 존재하는 것이 결코 당연하지 않았던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하는데서 시작된다.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평범한 일상을 지탱하는 어떤 사소한 것 하나도 과거에는 당연하지 않았다. 과거에 붙들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해서도 안되지만, 과거와 비교해 현재가 얼마나 괜찮고 만족할만한 것인지 스스로 성찰해볼 필요는 있다. 단순히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는 것을 넘어, 인간이 원래 얼마나 약한 존재였는지 설명해주는 역사의 기록들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재평가해볼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은 너무나 나약한 존재였다. 속된 말로 맨몸으로 야생에 던져졌을 때 우리가 원숭이 한 마리라도 잡을 수 있었던가?


연이어 치솟는 서울의 부동산 가격이나 신규 코로나 확진자 숫자보다 더욱 위험한 것은 인간의 욕심과 오만이다. 이미 누리고 있는 것에 대한 감사함이 무뎌지는 것이 현재를 지옥으로 만든다. 이미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여전히 갖지 못한 것에 집착하는 욕심이 타인에 대한 공격성에 날을 세우고, 세상을 회색빛으로 덧칠해버린다. 이미 가진 것에 제대로 된 가치를 부여하지 못하는 한, '만족'은 결코 찾아오지 않는다. 코로나로 엄중한 와중에도 최소한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는 현재의 소중함을 조금 가치 있는 것으로 여겨야 한다. 당연함의 보루가 무너지는 것은 순식간이다. 나약했던 과거의 자화상을 기억하고, 당연해 보이는 일상이 결코 당연하지 않은 틀 위에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는다면 적어도 모두가 힘든 시기에 감시의 눈을 피해 파티를 벌이는 일 따위는 사라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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