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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 것인지

북극발 한파를 해치며 출근하던 내게 비추어진 따스한 빛무리

by 작가 전우형

뜨는 해와 지는 해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심상은 모두가 다를 것이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 일출을 바라보며 떠올랐던 생각은 '태양도 춥겠다'는 것이었다. 꽁꽁 얼어버린 자동차 내부가 너무 추워서 들었던 생각일지도 모른다. 히터는 좀처럼 자아정체성을 찾지 못했고, 11년 차에 접어든 2010년식 포르테에는 스티어링 휠 열선기능 같은 것도 없었다. 곳곳이 살얼음판인 겨울의 도로는 험난한 인생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짓궂은 빙판길 위에서 차량들은 하나같이 거북이가 되길 선택했고, 그 바람에 나는 평소라면 신호 한 번에 지나쳤을 구간에서 벌써 세 번째로 멈춰 서고 있었다.


시간을 갉아먹는 눈이 3개 달린 빨간 신호 벌레를 노려보고 있을 때, 그 뒤로 '짠' 하고 해님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눈부심에 투덜거리며 가림판을 내렸겠지만, 오늘은 약간의 따스함도 너무나 소중했기에 눈부심 따위는 우주 저편으로 밀어버릴 수 있었다. 그렇게 잠시 개구리의 겨울잠도 깨울 수 있을 가뭄의 단비 같은 아침햇살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사이 신호는 어느덧 초록색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러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렇게 추운데, 태양은 얼마나 추울까?' 하지만 잠시 후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태양이 춥다니. 참 정신 나간 생각 아닌가?




2021년 1월 8일 평택시 기온.jpg

이번 추위는 '북극발 한파'라고 한다. 그래서 요 며칠 사이 북극이 부쩍 가까워진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분명 지구온난화로 인해 평균기온이 상승해서 북극의 빙하가 녹아내린다고 했는데, 어째 어제 내린 함박눈은 하나도 녹지 않고 고스란히 쌓여 있는 모습이 우습게 여겨진다. 북극이 얼음이 녹아내렸을 정도로 따뜻해졌다고 해도, 우리 삶을 얼어붙게 하기에 충분한가 보다. 북극에서 온 바람은 마치 지붕 끝에 맺힌 고드름처럼 날카롭고 아프다. 바람에 닿은 살갗이 아프다 못해 화끈거릴 정도다. 새삼 느껴지는 자연의 위대함에 전율을 느낀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는데, 눈 앞에는 담배연기처럼 하얀 입김이 폴폴 피어나고 있다.


마음이란 것이 참 간사해서, 여름에는 더워서 힘들고, 겨울이 되면 추워 죽겠다고 한다. 봄이면 날씨가 변덕스럽고 안개가 끼는 날이 많아 싫고, 가을이면 단풍구경 가는 사람들 때문에 길이 막혀서 짜증이 난다. 남 욕할 것도 없이 내가 딱 그런 류의 사람이었다. 세상의 싫은 구석들만 열심히, 최선을 다해 찾아내며 실증과 짜증을 더했던, 지난날의 삶이 그러했다.


극적일 것 까진 없지만 삶의 변화라는 것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할 때 즈음, 나는 '일상에 감사하는 법'을 배웠다. 이럴 땐 이래서 짜증 나고, 저럴 땐 저래서 짜증을 내던 내가, 사소한 일 하나를 소중하게 여기게 된 데는 글쓰기의 힘이 컸다. 글쓰기를 시작할 때 가장 먼저 돌아보게 되는 것이 자신과 삶과 과거의 추억들이다. 글쓰기는 실타래를 잡아당기는 것과 같아서, 계속해서 새로운 기억과 생각들이 굴비 엮듯 줄줄 딸려 나온다. 일상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충분히 감사할만하다는 사실을 불현듯 깨닫게 된 것도 글쓰기로부터 배운 교훈이었다.


계절의 변화가 조금 더 다채롭게 느껴질 때 즈음, 나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이전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봄은 따뜻해서 좋았고, 여름은 더워서 좋았고, 가을은 시원해서 좋았고, 겨울은 추워서 좋았다. 비가 오는 날은 비가 와서 좋았고, 날씨가 맑은 날은 맑아서 좋았다. 손님이 많은 날은 많아서 좋았고, 없는 날은 없어서 좋았다. 이런 나의 마음 상태를 두고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라면, 어느 정도는 비정상에 가까울 수도 있을 것이다.


오랜 방황이 내게 알려준 것이 있었다. 좋음과 싫음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는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의 관점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런 깨달음을 인생에서 심각한 위기에 처하기 전에 알았다면 과거의 고통스러운 시기를 비껴갈 수도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삶의 바닥까지 내려가보지 못했다면 과연 평범한 일상이 얼마나 감사하고 아름다운 것인지 알 수 있었을까? 그것은 누구도 모를 일이다. 신이 부여한 운명적 시련일거라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여전히 나는 알 수 없고, 아마도 그런 심오한 주제에 대해서는 답을 내리기를 포기해버렸는지도 모른다. 일종의 주제 파악이랄까.




한 때 하루 24시간, 1년 365일을 빡빡하게 짜인 일정과 이중 삼중으로 세워진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 속에 살던 시절이 있었다. 도출한 결과물을 그럴듯하게 포장하느라 온 심력을 쏟아부었던 날들도 있었다. 그 길을 벗어나면 안 되는 줄 알았고, 나름대로의 성공에 대한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속 빈 강정이 자만에 빠졌던 탓일까? 제대로 넘어지고 나서 세상을 보니 인간이 세운 계획이나 규칙 같은 것들이 반쪽짜리로 느껴졌다. 인간이 자연과 지구를 지배하고 다른 생명체를 아우를 수 있는 만물의 영장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고 해도, 작은 전염병 하나로도 휘청거리는 것 또한 인간의 본모습이 아닐까? 모든 것이 나의 능력으로, 내가 계획한 대로 이루어져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면 일상으로부터 새로운 감사를 찾을 수 있다.


오늘 아침 출근길에서, 뜨는 해를 바라보며 나는 추운 겨울을 느꼈다. 누군가는 아침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며 새로운 하루에 대한 희망을 느끼기도 할 것이며, 또 다른 누군가는 밝아오는 여명을 보며 지긋지긋한 하루가 다시 찾아왔음에 절망에 빠지기도 할 것이다. 희망은 희망대로, 절망은 절망대로 나름의 이유가 있다. 지나고 보니 이랬더라는 식의 결과론으로 치부된다 해도 어쩔 수 없다. 인생은 살아보기 전에는 예측할 수 없는, 삶의 마지막 순간에 가서야 알 수 있는 최종적인 결과물일 테니까.


그렇게 나름의 결론을 내려보기로 했다. 먼 미래를 바라보거나 계획하는 것을 내려놓고, 그저 매일 아침 감사하는 마음으로 서두르지 않고 내게 주어진 시간 동안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오늘의 노력이 앞으로의 나에게 어떤 필연적인 결과로 다가올 것이라는 판단은 내려놓는 것이 편하다. 그것은 나의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나고 보니' 그때 했던 일들이 이렇게 이어졌구나, 라는 식으로 지나간 일들을 복습해보는 것이면 충분하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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