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서적 공백을 채워준 눈꽃의 속삭임
사소한 눈발들이 무리를 이루며 구름 같은 하얀 흩날림을 연주한다. 대각선으로 흘러내리는 눈의 구슬들은, 시선을 한 점에 고정하면 희미한 선이 되어 시야를 비켜가지만, 시선을 조금 멀리해서 전체를 바라보면 오히려 하나하나의 모습이 선명하게 눈에 들어온다. 바람을 따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악보의 음계를 흉내 내어보지만 결국 '쿵'하고 묵직한 저음을 치며 얼굴을 바닥에 처박아버린다. 아직은 보도블록의 색을 진하게 만들 뿐이지만 이대로 힘을 조금 더 낸다면 자신의 색깔로 세상을 덮어버릴 수 있지 않을까?
관자놀이를 관통할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머리를 좌우로 흔들어대는 통에 한동안 의식이 혼미한 오후였다. 끝이 뭉툭해진 낡고 녹슨 십자드라이버를 오른쪽 관자놀이에 대고 시계방향으로 돌리며 후벼 파는 것처럼, 머리가 부서지기 직전의 묵직하고 아득한 통증들로 인해 일시적인 사고의 마비가 찾아왔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창밖으로 떨어져 내리는 눈발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잠깐이지만 낙하하는 눈꽃의 궤적을 쫓으며 두통에 집중되어 있던 감각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릴 수 있었다.
나는 두통을 잊으려 도로변으로 나갔다. 차갑고 시린 눈바람이 두통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이마와 뒤통수를 한바탕 훑고 지나갔다. 시원하고 개운한 느낌에 눈이 크게 떠지고 딱딱하게 굳어있던 전신의 근육에 통증인지 희열인지 모를 전류가 흘렀다. 청량감을 느끼며 아직은 선선하게 느껴지는 겨울의 대기를 최대한 많이 흡입해보았다. 더 이상 채울 수 없을 때까지 마신 후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답답함이 한층 가시는 느낌과 함께 오장육부가 송두리째 교체되는 듯한 청량감과 해방감으로 잠시 온몸이 부르르 떨렸다.
눈 소식을 미리 전해 들었는지, 준비성 가득한 사람들은 이미 챙겨 나온 우산을 펼쳐 들고 있었다. 우산을 잡은 손은 불그스름하고 창백하고 거칠어졌지만, 덕분에 머리와 어깨에 눈이 쌓이는 것을 막을 수 있어 그런지 그들의 표정은 한결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은 우산 대신 후드를 뒤집어썼다. 테두리에 털이 달린 모자, 후드 티에 달린 빨간색 모자, 두터운 패딩에서 이어진 얼굴 일부를 제외한 머리의 대부분을 덮을 수 있는 모자, 노란색 후드에 파란색 패딩 후드를 이중으로 덮어쓴 아이까지 각양각색의 머리통들이 동동 떠다닌다. 가뜩이나 눈과 이마를 제외한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스크 덕분에, 모자와 우산은 보이되 사람들의 얼굴은 사라져 버렸다.
사람들의 뒤통수를 쳐다보는 사이 어느새 잠깐 흩날리던 눈발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는 눈이 오는 장면을 직접 보지 않았으면 비가 왔는지, 눈이 왔는지 모를, 까맣고 칙칙하게 젖어든 아스팔트 도로만 남아있을 뿐이었다. 하늘은 여전히 우중충해서 언제 다시 무언가를 흩뿌릴지 알 수 없는 상태였다. 잠깐 사이에 머리 위에서 분무기를 뿌려대는 듯한, 눈보다는 비에 조금 더 가까워진, 실이 조각조각 끊어진 형상의 입자들만 사위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눈에 보이든, 보이지 않든 간에 차갑고 때로는 시원한 무언가가 나를 적셔주는 느낌이 고마울 뿐이었다. 아득할 정도로 집중을 풀어헤쳐버렸던, 마치 두개골 위를 무쇠 형틀로 덮어둔 것 같았던 지독한 두통이 희미해진 탓에 다시금 생각이란 것을 할 수 있게 되어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