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찰이 필요한 이유

by 작가 전우형

'통찰'이라는 단어에는 껍데기의 안쪽(in)에 존재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눈(sight)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통찰에는 '새로운 시각'이 강조된다. 새로운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볼 때 마음의 변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심리 치료에서 환자가 이전에는 인식하지 못했던 자신의 심적 상태를 알게 되는 일'이라는 정의에서 통찰은 '자기도 몰랐던 자기의 상태'를 알게 되는 극적 변화를 가리키며 이것은 달리 '병식'이라고 불리기도 한다.


우리는 스스로에 대해 잘 모른다. 눈으로 볼 수 있는 영역은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완벽히 살피는 것은 불가능하며 이것은 생각과 마음의 시야도 마찬가지다. 마음의 시야에는 무의식이라는 맹점이 존재한다. 무의식(Unconsciousness)은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임에도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다. 정신분석학의 대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강조했다.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을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프로이트는 "꿈은 무의식으로 이끄는 왕도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꿈의 역할을 강조했다. 하지만 꿈은 스스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가장 쉬운 방법은 '습관'을 살펴보는 것이다. 습관 자체가 무의식의 영역에 가장 맞닿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상황, 자극, 문제에 직면했을 때 습관적으로 하는 행동이나 말, 나도 모르게 빠져드는 생각, 느끼는 감정 등을 살펴보면 자신의 무의식에 대한 많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 역시 평소의 일상 속에서는 수행이 어렵다.


누구나 '마음의 거울'이 있다. 마음의 거울을 바라보며 조금 전에 벌어진 사건, 지난 하루동안 내가 했던 행동, 상처, 갈등을 되돌아보는 것이다. 가끔은 지나온 긴 시간과 자신의 인생을 다른 눈으로 주욱 살펴보는 것이다. 이같은 행위를 '성찰'이라고 부른다. 성찰은 차분히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습관과 같은 자신의 무의식적인 반응을 제3자의 시각에서 살펴볼 때 통찰의 능력을 선물해준다.




전문가가 인정받는 사회에서는 남들이 보유하지 못한 ‘특별함’을 '먼저' 갖춘 사람이 성공신화의 주를 이룬다. 특허도 연구도, 사업 아이템도 남보다 먼저 등록해야 '지적재산권'과 같은 권리를 획득한다. 이런 상황에서 통찰이든 성찰이든 간에 주류문화에 적응해가는 데 있어 ‘필수’라기보다는 ‘선택’ 혹은 '낭비'로 여겨진다. 용어는 특별해 보이지만 그것이 당장 내게 필요한 것을 가져다줄 것 같은 느낌도 들지 않는다.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는 '일기 쓰기'나 '하루 10분 자기반성하기'와 같은 재미없는 숙제 같은 것으로 치부하기 딱이다.


통찰에 필요한 생각의 유형은 일반적인 '학습'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르다. '왜?'라는 질문을 계속 던지며 나름의 이유를 찾기 위해 다양한 영역을 탐색해나가야 하는데 그러한 비판적 사고와 탐색적 활동에 소모할 에너지도, 시간도 부족하다. 이미 있는 그대로 집어넣어야 할 분량만 해도 살인적이다. 심지어 그 내용들은 '평가'도 받아야 한다. 이런 환경에 놓인 현대인들에게 '가치를 따져보고, 이유를 생각해보고, 무엇이 더 훌륭한 것인지 생각해보라'는 인문학의 메시지는 '잔소리' 혹은 '한가로운 소리'로 들리지 않을 이유가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성찰적 사고를 통해 통찰에 이르러야 한다면 그 이유는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통각 상실증(무통증)'이라는 것이 있다. '통증 자극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상태. 해로운 자극에 대해 반응하지 못하기 때문에 위험한 상황을 제대로 피하지 못하고 심각한 신체 손상을 입을 수 있다.'라고 네이버 지식백과를 찾아보면 나온다. 피부가 찢어져 피가 흐르는데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가는데 자신의 위험을 인지하지 못하는 상태, 매일같이 택배 상자가 쌓여가는데 아무런 문제를 느끼지 못하는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는 위험하고 또 위험하다.


'통찰'은 일종의 깊은 '자각'이다. 특히 자신의 문제에 있어선 더욱 그렇다. 그런데 이것이 현실적인 문제와 결부되면 무게감이 달라진다. 당장은 그런 자각이 의미 없는 것처럼 여겨지는 이유다. 예를 들어 '특별히 죄짓지 않고, 주어진 시스템을 활용해서, 돈 벌고 자기 인생 열심히 살아가면 아무 문제없는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 있다. '설사 내가 아랫사람을 다그치는 데 있어 무리한 점이 있었더라도, 혹은 그가 내 말에 상처를 받았다고 해도 결과만 좋으면 된 거 아냐? 오히려 내가 제대로 푸시하지 못해서 일을 그르쳤으면 책임은 누가 지냐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자신의 문제를 넘어 사회의 문제로 넘어가면 상황이 조금 달라진다. 사회에도 일종의 '무의식'이 존재한다. 사회가 '당연하다'라고 여기는 것. 으레 그렇게 하는 것. 이와 같은 것을 '문화', '규범', '트렌드', '경향'과 같은 말로 바꾸어 부른다. 한국사회의 무의식 중 하나는 '경쟁'이다. 경쟁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쟁에 참여할 기회가 공평한지, 혹은 경쟁과 선발의 과정이 공정한지에 대해서는 따져 묻지만 우리가 어째서 경쟁해야만 하는지에 대한 의문은 갖지 않는다. 혹은 가지더라도 사회적 스피커를 타고 확대되지 못한 채 묻혀버리고 만다.


경쟁에서 이긴 사람은 당연하게도 승자가 된다.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은 기회가 공평했고 과정이 공정했다는 전제하에 아무런 변론도 할 수 없게 된다. 설사 변론을 펼친다 해도 싸늘한 냉소만이 돌아온다. "네가 노력을 안 했으니까 그렇게 된 거 아냐? 피해의식 덩어리 같으니라고. 노력도 안 하고 얻어먹을 궁리만 하는 배짱이 같은 족속들!" 이런 말들이 사회에 만연한 지 오래다. 경쟁의 결과는 차별을 당연한 것으로 만들 뿐 아니라 경쟁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 '무능'이라는 주홍글씨를 씌운다.


우리가 '경쟁해야 한다'는 사회문화적 규범에 의문을 갖지 않는 것, 혹은 그런 외침이 사회적으로 파급력을 갖지 못하는 상황이 바로 현대사회의 '병식 없음'을 나타낸다. 사회의 문제는 한두 사람의 관심으로는 공론화의 장으로 나오지 못한다. 보다 많은 사람이 그것에 문제의식을 가질 때 사회의 문제는 비로소 다루어지기 시작한다. 하지만 생존경쟁이 너무 치열한 탓에 타인과 사회가 자신에게 어떤 의미인지, 혹은 생각하더라도 행동으로 옮길 겨를이 없다. 각자도생 하기에도 숨이 찬다. 개인주의를 '이기주의'라 착각한 사람들은 타인을 돈으로 보고 이용하고 착취하기 바쁘다. 함께 살아야 할 이웃이자 구성원이 증오의 대상을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되고 있다. 경쟁문화가 이처럼 우리 사회에 크고 작은 생채기를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에 대해 전력으로, 진정으로 심각하게 꾸짖지 못한다. 가끔 문제의식이 생기려 하다가도 조금 더 급하고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다른 현실적 문제에 눈을 돌려버리고 마는 것이 현실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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