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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아이디어

by 작가 전우형

달달거리는 소리만큼이나 선풍기 바람은 뜨거웠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무더운 느낌이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하면 예년의 여름에 비해 극단적으로 변했다. 더운 날은 숨이 막힐 정도로 덥고, 비가 내리는 날은 열대성 기후에 속하는 지역에서나 나타날법한 스콜이 몰아쳤다. 간혹 내리는 소낙비는 대기의 습도를 한껏 높여주었고, 그 후 내리쬐는 태양빛은 온몸에 맺힌 방울방울이 일정 수준의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나의 몸에서 빠져나온 땀방울인지, 아니면 대기를 떠돌던 수증기의 소산인지 구분하기 어렵게 했다.


24절기 중 낮이 가장 길다는 '하지'는 이미 오래전에 지났건만, 낮의 길이와 더위의 수준이 반드시 비례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자정을 넘긴 시각임에도 실내온도는 34 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이쯤 되면 조금은 식었겠지 하고 생각했던 나의 추측을 비웃듯. 내가 잠드는 법을 잃어버린 것만큼이나 허름하디 허름한 이 카페는 냉각하는 법을 잃어버린 듯했다. 가스가 없어 선풍기 바람만도 못한 미풍이 흘러나오는 에어컨을 켠다. 실내온도는 특별히 변한 것이 없지만 왠지 조금은 시원해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것도 플라세보의 일종일까.


뜨거운 공기와 답답함은 어느 정도 일맥상통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일단 조금 화가 난다. 이곳이 더워서인지, 아니면 도통 진행되지 않는 무언가에 대한 답답함 때문인지 구분이 어렵지만 나는 분명 지금 화가 치밀어 오른다. 그 약간의 화가 안 그래도 밀집한 이곳의 온기를 더욱 고무시키는 느낌이다. 괜스레 노트를 펼치고 글씨를 휘갈겨본다. 가끔은 글씨체가 당시의 마음을 대변할 때가 있다. 역시나, 글씨가 엉망이고 삐뚤삐뚤하다.


나에게 가장 1차원적인 세상은 바로 '나'다. 하지만 태어나면서 가장 먼저 본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부모님이었다. 나는 부모님을 보며 그게 '나'인 줄 알았다. 조금의 시간이 흐르며 눈앞에 보이는 이 두 사람이 나와 다르다는 것을 조금씩 느끼게 된다. 미세한 분화가 이루어지며 나 자신에 대한 분석을 시작한다. 나는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미약한 존재임을 직시함과 동시에 살 길을 찾는다. 그 '살 길'이란 바로 부모를 이용하는 것이다. 아이로서의 나는 그렇게 부모에게 의지해, 부모가 내 뜻대로, 나의 욕구와 욕망을 채워줄 비책을 마련하고 연습하고 실행하고 때로는 단념하며 가까스로 살아남는다.


세상은 '나, 타인, 관계, 사회'로 구성된다. 소우주에서 나 혼자 살고 있다면 세상은 어쩌면 지극히 단순할 것이다. 그것은 나와 세상과의 싸움, 그리고 세상에 대한 나의 적응. 이렇게 두 갈래로 구분된다. 하지만 나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부모와의 '관계'를 맺는다. 실상 나를 나아 준 부모가 없다면 나도 존재할 수 없다. 그러니 관계와 나, 그리고 타인은 떼어내려야 떼어낼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다. 아이로서의 내가 세상을 넓혀가는 과정은 나의 관점에서 타인, 또는 제삼자의 관점으로 옮겨가는 과정을 통해 이루어진다. 나의 눈만을 통해 세상을 인식하는 한 세상은 나의 눈에 비친 지평선까지로 한정될 수밖에 없다. 마치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라 믿었던 과거의 사람들처럼.


그들에게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 단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는 작은 행성에 불과하다는 아이디어는 진정 받아들이기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그들이 상상할 수 있는 범위가 자신의 시야에 한정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상상 또한 그 사람이 세상의 전부라 인식하는 범위 내에서만 이루어진다. 다른 사람의 입장으로 생각과 판단의 중심을 이전시킬 수 있는 능력은 그래서 중요하다.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나의 '주관적' 세상을 넓히기 위한 가장 첫 번째 관문이다. 예를 들어 상대방의 눈초리가 의심 가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나의 관점에서 그것은 불쾌하고 기분 나쁜 일이다. 하지만 상대방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 가지 새로운 상황이 펼쳐진다. 우선 상대방은 나에 대한 나쁜 소문이나 루머를 들었을 수 있다. 혹은 가까운 사람에게 받은 상처로 인해 타인에 대한 불신이 팽배해 있을 수 있다. 이 외에도 나는 미처 몰랐지만 상대방에게 어떤 잘못이나 결례를 저질렀을 수 있다. 나열하자면 수많은 경우의 수가 나올 것이다. 이처럼 잠시 스쳐 지나가는 타인과의 피상적 관계에서도 입장을 바꿔보면 세상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고 분석할 수 있는 범위, 고려할만한 가능성의 수준이 달라진다.


나와 타인의 상호작용이 '관계'라면 수많은 관계가 모인 것이 사회, 국가, 궁극적으로는 세상이 된다. 많은 이의 입장과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키기에 어떤 보편적 질서가 중요해지고 현대에서는 그것이 '법'이라는 형태로 많은 부분 형상화되었다. 법에는 강제력이 뒤따르고, 그 강제력은 법의 실효성을 뒷받침한다. '나'는 분명 인간으로서 '자유'를 누릴 권리를 갖고 태어났지만 그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범위에는 제약이 존재한다.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가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불완전하고 이기적이고 감정적인 존재이며 절제와 인내의 수준 또한 개인차가 존재한다. 실상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는 범위란 것에 대한 생각도 다르며, 첨예한 이익다툼과 대립은 도덕적 혹은 철학적 외침을 공허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때마다 짐승들처럼 물고 뜯는 싸움을 할 수 없기에 그 싸움을 조금은 고상한 방식으로, 법을 통해 해결하도록 여러 가지 장치들이 만들어져 왔다. 물론, 재판장에서의 싸움이 짐승의 싸움보다 인간적이고 고상하다는 걸 증명하기 어려운 순간도 있지만.


주관적 세상을 본다는 말은 개인이 가진 창을 통해 세상의 문제를 바라본다는 말로도 설명된다. 같은 상황을 경험하면서도 느끼는 바가 서로 다르며, 인간은 자신이 인식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일들 중에 특별히 관심이 가는 무언가에 집중하고, 그 외의 것은 배경으로 인식한다. 예컨대 인산인해를 이룬 시내 한복판의 횡단보도에서도 연인의 모습을 본 내게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때 나의 관심대상은 딱 두 가지다. 반대편에서 나를 바라보는 연인의 초롱초롱한 눈동자와, 연인에게로 다가가기 위한 마지막 장애물인 적색과 녹색의 눈을 가진 철제 괴물. 이 날 같은 횡단보도를 건너던 수백 명의 사람들에게는 같은 수의 사건이 일어났겠지만 그건 나의 '주관적' 세상에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일들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좁은 나의 세상을 넓히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랑을 하는 것이다. 사랑은 우리에게 타인의 관점을 연습하게 해 준다. 사랑에 빠졌을 때만큼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관심사에 대해 고민하고 애태울 계기는 없다. 사랑은 나를 벗어나 상대방의 시선에서 세상을 볼 수 있게 해 준다. 결국 이것은 나의 세상과 상대방의 세상이 통합되는 것을 의미한다. 서로의 세상을 함께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 상대방의 행복과 불행, 기쁨과 슬픔, 어려움과 환희의 순간을 함께하는 것. 사랑의 깊이가 깊어질수록 통합의 범위도 넓어진다. 특히 나와 완전히 다른 사람과의 사랑은 경험의 폭을 더욱 넓혀준다. 행복한 사랑만이 의미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과정에서 경험하는 이별의 슬픔, 그리움과 기다림, 인내와 상처는 그동안 나 혼자서는, 혹은 피상적인 관계에서는 경험하기 힘들었던 세상을 새로운 면모를 알려준다. 세상에 대한 또 다른 이해가 나의 주관적 세상을 한층 더 넓히고, 타인의 아픔을 보듬어줄 우산이 되기도 한다.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아이디어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의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며, 내가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해 경험하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순간은 대부분 '나의' 일이다. 하지만 내가 세상을 어떤 식으로 인식하든 간에 '객관적 진리'로 불릴만한 세상의 진짜 모습은 따로 있다. 어쩌면 짧은 인간의 삶으로는 세상의 진짜 모습을 따라잡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주관적 세상을 기반으로 살아가면서도 조금씩이나마 진짜 세상의 모습을 경험하고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만 한다. 균형 잡힌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나의 주관적 세상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시작된다. 타인의 세상이 어떤지 알지 못하더라도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받아들일 마음의 여지가 남아있다면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다가가는 것은 지금보다는 쉬울 것이다. 타인을 이해하고 그들의 세상을 나의 주관적 세상에 통합시키는 일은 세상을 이해하는 것의 첫걸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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