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덕로와 광덕계양로가 만나는 교차로에는 신호등이 하나 있다. 좀처럼 자동차가 지나지 않는 곳에서 가만히 서서 신호를 기다리다 보면 그냥 지나칠까 하는 생각과 그래도 신호는 지켜야지 하는 생각이 서로 교차하며 마음이 답답해진다. 아직 형상화되지 않은 그 감정은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한심하게 바라보며 보란 듯이 지나치는 덤프트럭을 볼 때 더욱 확실해진다. 나는 인간의 자정능력과 자율에 기반한 노력의 가치를 믿는 편이지만 그 모습을 볼 때면 왠지 감시카메라를 더 많이 설치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의 마음을 이해할 것 같다. 역시 인간은 타율과 제도적 장치의 도움 없이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걸까?
녹색신호와 적색신호, 좌회전 신호와 보행자 신호. 한 사이클이 완료될 때까지 한 대의 차량도 지나가지 않는 한적한 도로. 마냥 기다리기에는 지나치게 긴 신호 간격. 준법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당연히 지켜야 할 교통신호지만 이 짧고도 긴 순간을 기다리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괜스레 화가 치민다. 특히 한 번의 머뭇거림도 없이 교차로를 지나치는 트럭이나 화물차를 볼 때면 더욱 그렇다. 이 분노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인간의 방어기제 중 '투사'라는 것이 있다. 말 그대로 자신의 감정(혹은 '폭탄')을 상대방에게 던지는('투사'하는) 행위를 뜻한다. 위에 언급한 그 교차로에서 나는 왜 신호를 무시하는 차량들에게 화가 치밀었을까? 단순한 정의감을 발로일까? 나도 그들처럼 신호를 무시한 채 교차로를 지나쳤다면 그때도 화가 났을까? 분노 대신 어떤 안도감 같은 것을 느끼진 않았을까? 숙제를 잊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는데 왠지 나와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친구를 발견했을 때의 느낌과 같지 않을까? 하지만 나는 그들을 보며 분노를 느꼈다. 그 분노는 단지 그들의 범법행위를 목격한 데서 출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분노는 그들로 인한 것이었다기보다는 나의 상태로부터 출발한 것이었다. 나는 너무나 한적한 교차로에서 우두커니 신호를 기다리는 상황에서 짜증이 치솟았고 그 감정은 어딘가로 출구를 찾고 있었다. 때마침 적절한 대상이 나타났을 때, 그리고 그를 분노와 비판의 대상으로 삼는 것에 거리낌이 없을 만큼 충분한 당위를 확보했을 때 나는 망설이지 않고 꾹 눌러두었던 감정을 쏘아 보냈던 것이다.
흔히 우리는 감정, 특히 부정적 감정의 원인을 타인으로부터 찾곤 한다. 하지만 감정의 주체는 엄연히 자기 자신이다. 이 같은 되뇜은 부정적인 감정을 다스리기 위한 마음의 주문과도 같다. 치솟는 분노나 증오, 혹은 공포, 시기심 따위의 원인을 오롯이 상대방에게 두는 것은 우리에게 그만큼 사용할 패가 줄어드는 것과 같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또한 오랜 시간과 노력이 요구된다. 상대를 변화시켜야 감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상대방과 나 사이의 권력관계에 따라 폭력과 강제성을 높이는 원인이 된다. 화나게 하는 상대에게 취할 수 있는 가장 간단하고도 쉬운 방법은 더 이상 상대방이 나를 화나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말장난 같은 생각은 관계 속에서 수시로 일어난다. 특히 상대가 나보다 약한 존재라면 그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진다.
감정의 원인이 상대방에게 있을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또 다른 방법은 그 감정을 억누르고 참는 것이다. 이 같은 대응은 상대방에 비해 약자의 입장에 있거나 자기 통제력이 강할 때 일어난다. '그래, 내가 참자. 참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이러한 방식은 당장의 갈등을 미룰 수 있을 뿐 마음속으로는 상대방을 원망하거나 못내 비판하고 무시하기 때문에 마음속에 화약고가 생긴다. 결국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면 참아왔던 응어리까지 한꺼번에 쏟아져 나오면서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 쉽다. 조용하던 사람이 갑자기 활화산처럼 감정을 드러낼 때 당하는 사람 역시 예상치 못했기에 대응도 어렵다. 잔잔한 파도는 타고 넘을 수 있지만 너울에는 배가 뒤집어지기 마련이다.
감정의 원인을 자신에게서 찾는 방법은 우선적으로 자신에 대한 분석을 요구한다. 내면에 존재하는 스위치를 찾아내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누군가의 시선이 부담스럽게 느껴진다면 스스로 자신의 어떤 부분을 자신 없어하는지 차분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모두에게는 각자의 콤플렉스가 있고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면이 존재한다. 타인이 나의 부족한 점을 눈여겨본다고 느껴진다면 그 느낌의 근원은 자신에게 있을 수 있다. 콤플렉스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는 것이 도움이 된다. 완벽한 가면 아래 숨으려 할수록 콤플렉스는 더더욱 드러낼 수 없는 수치스러운 것으로 자리 잡는다.
타인이 어렵게 느껴지는 것 역시 상대방이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사람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내가 누군가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면 그 마음은 여러 가지 형태의 비언어적 신호를 통해 상대방에게 전달된다. 고슴도치의 딜레마처럼 실은 상대방이 내게 다가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상대방을 다가오지 못하게 가시를 바싹 세우고 있을 수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보지 못해서 내가 가시를 세운 것은 모른 채 뒷걸음질 치는 상대방을 탓하기 쉽다. 다가서기 위해선 날카로운 마음의 가시부터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수치심은 스스로 자신의 수치스러운 면을 인지하지 못했을 때는 느낄 수 없는 감정이다. 예컨대 바지의 지퍼가 내려간 것을 모르는 사람은 대로 한가운데를 주저하지 않고 거닐 수 있다. 사람들이 때때로 나를 쳐다보며 수군거리는 것 같아도 기분은 나쁠지언정 수치심을 느끼지는 않는다. 하지만 뒤늦게 바지 지퍼가 내려가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면 잠시 동안 지나쳐왔던 모든 사람들의 눈빛이 한 장면 한 장면 기억을 스치며 얼굴이 홍시처럼 붉어진다. 상황은 변한 것이 없지만 감정은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감정은 모든 인간관계에 함께한다. 기계를 상대하지 않는 한 우리는 모든 관계의 문제에 있어서 감정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모든 감정의 책임이 나에게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가 진심으로 적대감 어린 마음으로 나의 약점을 파 해치고 있을 수도 있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방이 나의 마음 따윈 신경도 쓰지 않을 수도 있다. 무작정 참을 수도 없고, 또 그토록 참아서도 안된다. 인내심은 체력과 같아서 계속해서 쓰다 보면 반드시 바닥을 드러낸다. 상대에 대한 인내와 나에 대한 인내가 균형을 이루려면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가 필수적이다.
어떤 감정의 발현에 대해 타인을 탓하기 전에 적어도 한 번쯤은 스스로에 대해 진지하게 돌아볼 수 있다면 불요불급한 감정싸움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다. 더불어 나에 대한 정보가 나에게 충분하다면 정말 건드려서는 안 될 몇 가지 스위치를 상대방에게 미리 알리고 양해를 구할 수도 있다. 만약 그렇게까지 노력했는데 상대방이 악의적으로, 또는 의도적으로 나의 약점을 건드리거나 화를 부추긴다면 그런 사람은 가까이해서도 안되고 가까운 곳에 두어서도 안된다.
예컨대 한적한 도로에서도 신호를 꿋꿋이 지키는 사람과 아무렇지 않게 그 신호를 무시하는 사람처럼, 좋은 관계를 위해 최선을 다해 예의를 지키는 사람과 그런 노력을 비웃는 사람처럼, 서로에게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이 존재한다. 맞는 사람 하고만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맞지 않은 것에도 정도가 있다. 인간관계의 퍼즐을 맞추는 일은 서로에게 맞는 사람을 찾는 것과 같다. 자신의 퍼즐이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있을 때 자신과 진정으로 맞는 사람도 찾을 수 있다.
※ 오늘의 마무리는 따뜻한 라떼와 함께.
오늘따라 따. 라 한 잔이 당기는군. 라떼의 생명은 진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적당한 우유 거품. 그 부드러움이 하루의 피로를 녹여주는 느낌이 일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