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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와 사랑 이야기

by 작가 전우형

태풍은 지나갔지만 장마는 여전하다. 여름의 시작을 알리는 장마와 무더위의 끝을 알리는 장마. 이번 장마는 가을의 전령이다. 이별에 익숙해지는 것은 부모의 몫이다. 빗방울은 구름에게서 독립한 걸까, 가출한 걸까. 잠깐의 외출이라고 보는 게 맞겠지.


충분히 가벼운 것은 중력을 거스를 수 있다. 그래서 비는 내려야만 한다. 비는 한동안 머무르며 땅의 구석구석을 매만진다. 가진 것을 모두 나누어준 비를 태양의 온기가 하늘로 불러들인다. 비는 구름이 되어 자유롭게 여행한다.


사람이 가벼워지는 방법은 비와 다르지 않다. 가진 것을 나누는 것이다. 인간이 마지막으로 줄 수 있는 것은 미약한 육신과 생명이다. 모든 것을 주고 나면 최종적으로 영혼이 남는다. 영혼은 충분히 가벼워서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래서 죽은 뒤엔 하늘나라로 가는 것일지도.


중력은 속박이며 안정이다. 중력은 머물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무언가에 구속당하는 느낌은 은근한 안정감을 준다. 자유는 두렵다. 특히 완전한 자유는 더욱 그렇다.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것은 무엇으로부터도 보호받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인간은 어딘가에 속하길 원한다. 고독은 외로움이며 두려움이다. 인간에게는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 힘은 인간의 고독에서 기인한다. 사랑받으려 애쓰는 것은 고독을 피하기 위함이다. 인간은 결핍을 안고 태어난다. 빈 공간을 채우는 것은 최초의 타인인 부모다. 자신이 보잘것없고 무력한 존재라는 걸 깨닫는 과정에서 인간은 성장한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법을 터득한다. 사랑은 서로의 필요를 채워줄 사람을 만나는 것이다.


'주는 사랑'에 대한 관념이 있다. 사랑은 착취가 아니라 상대를 채워주는 것이라는 정의. 주는 사랑 역시 자신의 결핍을 채우는 방법이다. 인간은 인정 욕구에 시달린다. 그리고 자신의 존재가 의미 있길 바란다. '주는 사랑'이 자신에게 제공하는 것은 내가 무언가를 베풀 수 있는 존재라는 이미지다. 늘 받기만 하던 약한 존재에서 누군가를 채울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느낌은 스스로에게 충만감을 준다.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은 존재라는 느낌은 인간을 절망에 빠트린다. 그것은 철저한 무시다. 존재의 이유를 찾는 것은 희망의 필수요소다. 삶을 지속할 이유는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과정을 통해 발견된다. 쓸모없는 인간으로 대접받는 건 너무나 슬픈 일이다. 각자의 쓸모가 존재하리라 믿지만 자신의 쓸모가 적절한 쓰임새를 찾는 것은 어렵다. 증명에 대한 강박이 인간으로 하여금 가면을 쓰게 만든다.


증명은 두 가지를 통해 이루어진다. 참고 견디는 것과 약점을 드러내는 것. 약점을 드러내는 것은 두려운 일이다. 약점을 들키면 무능한 인간으로 낙인찍힐까 두렵다. 더 이상 완벽을 연기하는 것이 어렵다. 완벽한 화장도 가까이서 보면 드러난다. 화장한 부분과 화장하지 않은 부분의 차이가 드러나지 않을 거리. 완벽을 훼손하지 않고 버틸 수 있는 시간. 서로의 거리는 두려움에 비례하고 그 두려움이 고독에서 벗어날 수 없게 만든다.


사랑받고 싶은 마음과 상처 받고 싶지 않은 마음. 다가서는 것도 뒷걸음질 치는 것도 애매한 마음. 적절한 거리를 찾기 위해 우리의 마음은 늘 부산스럽다. 그래서 인간관계는 늘 평행선을 그린다. 한 걸음 다가서면 한 걸음 물러나고, 놀라 뒷걸음질 치면 뒤늦게 손을 뻗는다. 결국 사랑이다. 관계의 숨통을 틔우는 건 사랑. 그 사랑이 사람을 가볍게 한다. 사랑은 마음 편히 다가서는 것이다. 어디로든 갈 수 있는 것이며 영혼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가면은 무겁다. 재고 따지는 마음도 무겁다. 사랑은 그 모든 내가 가진 것들을 무장해제시킨다.


사랑은 비처럼 온다. 그리고 사랑은 비처럼 내린다. 사랑은 비가 대지를 적시듯 구석구석 나를 어루만지고 영혼처럼 가볍게 한다. 구속된 마음의 질량을 가볍게 하고 구름처럼 하늘을 거닐 수 있게 한다. 사랑은 우리에게 다른 관계를 제시한다. 사랑은 관계를 가볍게 하고 어디로든 향할 수 있게 한다. 자유로우면서도 위태롭지 않고 안정감 속에서 정체되지 않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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