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의 깊이에 대하여

by 작가 전우형

흔히 모르기 때문에 궁금해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아는 것을 더 궁금해한다. 앎에는 단계가 있어서 전혀 알지 못하는 것은 두텁고 무거워서 들어볼 생각조차 할 수 없지만 어느 정도 아는 것은 충분히 들춰볼 수 있을 것 같고 무엇이 나타나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런 약간의 자신감과 용기가 호기심으로 이어진다.


'앎'은 중요하다. 알면 알수록 궁금한 것이 많아지고 조심하고 멀리해야 할 것에 대한 감각도 만들어진다. 앎은 분명 일정 수준의 경험을 통해 보다 값진 것으로 탈바꿈하지만, 삶의 시간이 누적된다고 해서 저절로 쌓이는 것은 아니다. 번뜩이는 아이디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생각하고 창조하고 발전시킨 모든 것은 허무로부터 갑자기 솟아나지 않았다. 어느 순간 나도 모르게 튀어나온 무언가는 사실 오래전부터 내 안에 이미 존재하는 것들이었다. 다만 언제 그것이 내 안으로 들어왔는지 기억할 수 없을 뿐이다. 내 안의 보물이 튀어나올 때 '번뜩이는' 느낌과 함께 카타르시스가 느껴진다. 그런 쾌감은 지금껏 쌓아온 '앎'으로부터 파생되는 즐거운 일들 중 하나다.


가장 쉽고도 간편한 앎의 방법은 '독서'다. 독서는 어떤 한 사람이 수개월에서 수년간 수집하고 공부하고 생각해서 엮은 보물 같은 이야기를 몇 시간에서 며칠이라는 짧은 시간에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이다. 독서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는가는 읽는 방법과 깊이에 달려 있다. 책을 쓴 것은 저자이지만 책을 읽는 것은 독자다. 독자의 시선에서 저자의 시선을 오가는 독서방법은 책에서 더 많은 것을 얻을 수 있게 돕는다. 김영하 소설가는 "책은 내 곁을 떠나는 순간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이 된다."라고 했다. 책을 집어 든 순간 그 책은 독자에게 하나의 세상이 된다. 그 세상을 탐험하며 무엇을 찾아낼 것인가의 문제는 고스란히 독자에게 달린 것이다. 물론 각각의 책에는 저자의 집필과 기획의도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런 밑그림이 책을 대면한 독자가 얻을 수 있는 전부를 규정하는 것은 아니다.


앎을 위한 두 번째 방법은 '글쓰기'다. 글을 쓴다는 건 단지 연필, 펜, 키보드 등을 매개로 글자 형태로 이루어진 문장을 만들어내는 과정과는 다르다. 먼 길을 떠나기 전에 자동차에 기름을 채우는 것처럼, 글을 쓰려면 우선 자신을 채워야 한다. 채우는 과정이 독서라면 비우는 과정이 글쓰기다. 글쓰기는 세상에 대한 새로운 감각과 관심을 촉진시킨다. 쓰기 위해선 글감을 수집해야 하는데 글감을 찾는 과정은 내면 탐색에 도움을 준다. 우리의 눈은 외부를 향해 있고 그래서인지 오히려 자신에 대해 가장 모르는 경우도 있다. 내 안에 이미 존재하던 것들에서 글감을 찾고 그것을 차분히 글로 옮기다 보면 그동안 이해할 수 없었던 자신을 이해하고 나를 온전히 수용하는데 도움이 된다.


'나'라는 테두리 외부에 존재하는 글감들 역시 다채롭고 흥미롭기는 마찬가지다. 빛은 여러 가지 형태로 반사되는데 입사각이나 반사체의 성질에 따라 그것을 관통하기도 굴절되기도 한다. 글쓰기는 외부에 존재하는 무언가를 내면화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우리는 같은 모습의 객관적인 세상 속에 살면서도 그 속에서 자신만의 세상을 만들어간다. 글쓰기는 나만의 빛을 만들어내는 과정이다. '세상'이라는 빛이 '나'라는 존재를 통과하면서 어떤 빛을 내는가의 문제는 전적으로 내게 달린 것이다. 그리하여 글쓰기의 과정은 나를 경계로 한 내면의 세상과 외면의 세상을 통합하는 과정이며, 우리는 외면의 아름다움을 보는 동시에 내면의 두려움을 파고들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시각은 단순히 글쓰기에 국한되지 않는다. 깊은 시선으로 세상을 관조하면 이전에는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같은 세상 속에서도 다른 것을 본다. 작은 차이가 '앎의 수준'을 한 단계 높여준다. 쓰고 읽는 과정, 자신이 쓴 것을 자신이 읽는 과정은 자신을 객관화하고 타인의 시선에서 자신을 살펴볼 수 있도록 도우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생각이 파생되는 것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앎의 또 다른 방법은 '여행'이다. 최초의 우리는 끊임없이 어딘가를 향했지만 삶이 정착된 후에는 같은 공간을 맴돌며 살아가게 되었다. 정해진 일을 하고 한정된 사람과 만나며 몇 종류 안 되는 음식을 먹고 늘 보던 풍경을 본다. 여행은 가벼운 일탈이고 일탈은 생각의 환기를 불러일으킨다. 고여있던 내 안의 공기가 새로운 느낌으로 가득 차는 것이다. 그 신선함이 우리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를 선물해준다. 공간은 생각과 감정에 영향을 미치고 우리의 기억이 위치정보와 함께 저장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같은 곳을 맴도는 한 같은 기억을 늘 떠올리며 예전에 했던 생각과 감정을 도돌이표처럼 느낄 수밖에 없다. 새로운 곳에 가면 늘 보던 논과 밭도, 늘 보던 바다도, 혹은 늘 보던 빌딩 숲도 모든 것이 다르게 보인다.


가급적이면 빡빡한 일정의 여행은 추천하지 않는다. 한국인에게 민감한 요소가 가성비와 효율이고, 그런 여행은 가성비와 효율을 충족하지만 여행에서 만난 소중하고 특별한 순간을 음미하고 충분히 만끽할 여유를 빼앗는다. 여행을 통해 얼마나 많은 곳을 가보았는지 타인에게 자랑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면 가급적 한 곳에서, 천천히, 속도를 늦추고 걷고 생각할 수 있는 여행을 추천한다. 여행에 소요될 경비나 시간이 부담스럽다면 멀리 떠나지 않아도 된다. 매일 가던 길과 다른 루트를 통하는 것만으로도 생각의 환기는 일어난다. 마음에 드는 장면이라면 사진을 찍어보면 좋다. 기억은 휘발성이 강하지만 사진은 기억의 영속성을 조금 늘려준다. 잊힌 기억도 사진을 보면 다시 그날로 돌아간 것처럼 생생하게 떠오른다. 그날의 하늘, 그날의 바다, 그날의 분위기, 그날의 감정 그 모든 것이 사진 한 장에 고스란히 담긴다.


앎을 위해 우리가 늘 하고 있는 방법은 '공부'일 것이다. 공부는 평생 해야 한다. 한국사회에서 흔히 인식하는 '공부'는 '학습'과 여러모로 닮아있다. '학습'이란 단어에는 학교에서 같은 교실에 모여 한 사람의 가르침을 받는 모습이 짙게 그려져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런 식의 학습을 좋은 '앎'의 방식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매 순간 시험을 보고 평가를 받는 공부라면 더더욱 그렇다. 효율적인 인재양성이라는 측면에서 학교 공부는 매우 훌륭하고 효과적인 방법이다. 사회가 필요로 하는 영역에 경쟁력을 갖추고 잘 단련된 인재를 투입하려면 필요한 영역을 확실히 공부시키는 것이 필요하고, 가장 좋은 방법은 서로를 상대 경쟁시키는 일이다. 한 사람의 개인을 국가를 원활히 작동하기 위한 부품으로 취급하는 사고방식이지만, 국가와 국민이 공동운명체라고 한다면 무작정 비판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이런 방식의 가장 큰 문제는 지치기 쉽고 '공부'라는 행위 자체에 대한 좋은 기억을 쌓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남이 시키는 공부는 재미가 없다. 재미없는 일은 오랜 시간 지속 불가능하고, 이를 갈며 그 순간을 건너뛴 후에는 공부에 대한 손을 놓아버리기 쉽다. 평생을 공부해야 함에도 '공부'라는 단어에 잔뜩 묻어버린 '지긋지긋함'이라는 이미지가 오히려 공부를 방해한다.


공부를 통한 앎의 방식을 통한다면 흥미를 느끼는 분야를 파고드는 방식을 추천한다. 질문을 쫓아가며 궁금증을 해소하는 방식의 공부는 흥미와 깊이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다. '재미'라는 요소는 스펀지처럼 많은 것을 흡수할 수 있게 돕고, 기억 깊숙한 곳에 스며들 수 있게 한다. 차곡차곡 쌓은 것은 자신의 진정한 재산이 된다. 공부의 가장 좋은 형식 역시 글쓰기다. 쓰기 위해서는 심층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이해에는 암기가 필요 없다. 암기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집어넣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다. 하지만 그만큼 사라지기 쉽다. 시험이 끝나면 공부했던 것들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경험은 일상적이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글로 쓰며 풀이해본 것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는다. 한번 써본 내용은 시간이 흘러도 다시 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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