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흐름을 느낄 나이
날짜를 세는 건 진부하지만 피할 수 없는 행동이다. 9월의 첫날은 가을의 시작을 알리는 장마 한가운데에 있다는 것 외에도 특별한 의미가 있다. 처남은 서른한 번째 생일을 이국 땅에서 맞이했다. 그가 호주로 떠난지도 벌써 수년이 흘렀다. 호주는 그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COVID-19로 출입국이 제한되면서 처남은 호주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한국으로 돌아올 수는 있었지만 그랬다가는 호주로 다시 들어갈 방법이 없었다. 종종 현관 앞에는 처남 이름으로 된 택배가 도착했는데 호주에서 인터넷으로 구입한 물건들이었다. 일정량이 모이면 최대한 부피를 줄인 후 박스로 꾸러미 꾸러미 싸서 호주로 보내주곤 했다. 대략 반년에 한 번 꼴이었다. 최근에는 그나마 가능하던 선편마저 끊겨 베란다 한쪽 구석으로 처남의 물건들이 쌓여가고 있다. 가끔 그 물건들을 볼 때마다 처남의 얼굴이 떠오른다.
처남은 이국 땅에 잘 적응한 것 같았다. 아내를 통해 간혹 전해 듣는 소식에 의하면 일하고 공부하며 여행과 사랑도 게을리하지 않는 것 같더니 최근에는 결혼 소식도 알려왔다. 결혼식은 한국에 돌아와 부모님을 모시고 할 예정이지만 호주에서 먼저 혼인신고를 마쳤다고 한다. 호주에 완전히 정착할 예정이라고 했다. 아직 몇 가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아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면 해결될 문제들이었다.
처남도 이제 서른둘이었다. '결혼 적령기'라는 단어가 희미해진 요즘이지만 여러 가지 의미로 적절한 시기의 결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벌써 그렇게 됐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아내와 처음 만났을 때 처남은 까까머리 중학생이었다. 당시 스무 살이었던 우리 두 사람은 어느덧 마흔을 바라보고 있고 첫째 딸이 곧 당시 처남의 나이가 된다. 이렇게 지난 세월을 헤아리다 보니 왠지 내가 굉장히 나이 든 느낌이 들었다. 내가 중학생이 되던 해 여동생이 태어났었다. 그 어리던 동생도 벌써 스물다섯이 되어 있었다. 그 아이도 언젠가는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겠지. 이것도 너무 구시대적인 예측인 걸까? 하긴... 요즘 세대는 비혼 주의자나 DINK족이 많으니 결혼도 안 하고 아이도 없을 수도 있겠구나.
우리 부부에게는 결혼하라고 등 떠미는 부모도, 아이 낳으라고 재촉하는 사람도 없었다. 24살에 결혼식을 올리던 우리 두 사람을 지켜보던 부모님과 친구, 동기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시선은 걱정 반, 기대 반이었다. 결혼이 너무 이른 것 아니냐는 염려.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 빨리 결혼하냐는 호기심 어린 질문. 행복한 결혼생활을 기원하던 많은 이들의 축복과 기도가 혼재된 커다란 사건이었다. 아내와 나 모두 또래에서 첫 번째 결혼이었기 때문에 그들 중 누구도 결혼이나 출산에 대한 조언을 해줄 사람이 없었다. 아이가 자연스러운 존재라는 것에는 동의하는 분위기였지만 출산시기나 육아, 몇 명이 좋을까 등에 대해서는 약간의 온도차가 존재했다. 그것은 아내와 나도 마찬가지였다.
나의 경우에는 아이를 가져야 한다 혹은 갖지 않아야 한다 와 같은 의무조항이 없었다. 아이는 생기면 축복이었고 만약 아이가 없더라도 우리 두 사람만으로 충분히 행복할 거라고 생각했다. 아내의 경우에는 출산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첫 아이의 출산은 어느 정도는 돌발적이었는데, 더 늦게 결혼한 친구 부부가 신혼여행에서 허니문 베이비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은 뒤 약간의 라이벌 의식이 작용한 결과였다.
첫 아이의 출산과정에서 아내는 임신성 당뇨와 조산 위험을 관리하느라 임신 5개월부터 병원신세를 져야 했다. 수축 억제제를 맞으며 침상에 누워 몇 달을 버텼는데 그 기간 동안 아내는 체중도 비정상적으로 늘었고 건강에도 몇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아내는 아이 혼자로는 외롭다며 둘째를 빨리 갖기 원했다. 하지만 순탄치 않았던 첫 아이의 임신과 출산과정을 지켜봤던 나로서는 그 의견에 쉽사리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3살 터울로 둘째 아이가 태어났지만 그 과정에서 아내는 두 번의 유산을 겪었다. 유산은 아내에게 큰 충격이었지만 둘째에 대한 아내의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그렇게 태어난 둘째도 벌써 10살이 되었다.
시간은 물처럼 흐른다. 어릴 적 부모님에게나 듣던 이 말이 이제 내 입에서 나온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하고 왠지 웃음이 나오기도 한다. 하지만 어리게만 보았던 처남이 벌써 서른이 넘어 혼인신고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부쩍 자라난 세 아이를 보고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시간이 물처럼 흐른다는 건 단지 시간의 흐름이 빠르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것이 시간의 흐름이며 그것은 멈출 수도 빨리 감을 수도 없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물은 천천히 그리고 끊임없이 흐른다. 굽이굽이 흐르면서도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다. 멈춘 것 같아도 결국 지나가고 마는 세월이 딱 그렇다. 시간이 빨리 지나가길 간절히 소원하던 시기가 있었다. 나의 20대가 그랬다. 사관학교 시절과 지나온 군 생활은 너무나 힘겨웠고 그래서인지 늘어진 테이프처럼 더욱 느렸다. 누군가에게는 20대가 돌아가고픈 청춘이겠지만 내게는 아니다. 만약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미련하게 버티기보다는 돌아나가리라. 그만큼 나의 20대는 절망적이었다.
새로운 사람과 대화하다 보면 처음에는 나이를 묻고 결혼은 했냐고 묻는다. 아이는 있냐고 묻고 아이가 몇 살인지 묻고 아이가 몇 명인지를 묻는다. 세 아이의 구성과 연령대를 말하면 대개 놀라는 눈치다. 그러고는 아직 젊은데 아이들 다 키웠다며 부러움 섞인 시선을 보낸다. 무슨 연유로 이른 나이에 결혼했냐고 물으면 나는 이렇게 답한다. 그때가 아니었어도 언젠가는 지금의 아내와 결혼할 것 같았다고.
결과적으로 아이들이 어느 정도 자란 지금은 육아에 대한 부담은 덜어진 것이 사실이다. 세 아이는 서로 싸우고 의지하며 가끔 부모 없이 간단한 밥을 차려먹을 정도가 되었다. 때로는 부모가 없는 시간의 자유를 원하기도 한다. 이제 막 결혼해 아이를 낳았거나 아직 첫 아이가 유치원도 졸업하지 못한 친구들에 비하면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셈이다. 아마도 이런 부분이 이른 결혼과 출산의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에는 장점과 단점이 존재한다. 우리 부부는 두 사람 다 사관학교를 졸업해 곧바로 직업군인으로 가혹한 직장생활을 버티며 고만고만한 세 아이를 키워야 했다. 고생이라면 나보다 아내가 천만 배는 더 했겠지만 그 과정에서 어려움을 극복하기에 힘이 부쳤던 나는 극심한 우울증을 경험하며 삶의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우리에게는 20대의 청춘이 없었다. 요즘 어느 20대가 청춘을 찾느냐고 말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우리의 20대는 방황이나 고민에 빠질 여유조차 없었다. 직장은 이미 정해져 있었고 해야 할 일은 매일 가득 차 있는 빨래통만큼이나 넘쳐났다. 그러니 이제 와서 여유를 찾았다 한들 어떤 선택이 더 좋은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인 것이다.
다만 '지나고 보니'라는 다소 흔한 말로 표현하자면 결국 우리 부부는 현재에 도달했고 아내와 아이는 내 인생의 행복이자 축복이라는 사실만이 남아 있다. 과거는 어차피 과거고 어떤 선택도 미래를 모조리 규정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가끔 요즘도 날짜를 확인한다. 그 수많은 같은 날짜들 속에 다른 사랑이 꽃피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