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아니, 아주 조금 많이 반가웠던 것 같다. 수척해진 얼굴, 눈썹을 덮은 앞머리, 색깔 없는 입술. 하지만 초롱초롱 빛나는 눈동자.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지만 나는 그곳에 없었다. 분홍빛이 맴도는 눈동자가 향한 곳은 내가 늘 있던 자리였다. 나는 그 자리에서 그녀를 그렸다. 알아볼 수 없도록 어떤 특징도 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의 응시를.
반가움이 묻은 이의 뒷모습은 말없이 화사하다. 피어나기 직전의 꽃처럼 수줍게 웅크리고 있지만 화향은 이미 만개한 지 오래다. 백색의 도화지 위에 그녀를 닮은 선의 일부를 그릴 때마다 같은 모양의 감정이 덧칠된다. 어두운 방에 스탠드를 탁 하고 켠 것처럼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적막했던 무대 위에 그녀가 등장한다. 나는 관객석 한쪽 귀퉁이에 앉아 소리 없는 박수를 보낸다. 그녀에게 나를 드러내선 안됐다. 그것은 내가 그녀의 곁에 머물기 위한 첫 번째 조건이었다.
사람을 마음에 담는 것은 터무니없는 일이었다. 나는 구속된 존재였고 누군가를 흉내 내는 일밖에 할 수 없었다. 내가 그의 발끝에서 벗어날 수 있는 순간은 어떠한 빛도 존재하지 않는 시간이었다. 그녀가 그를 바라보는 눈빛에 맴돌던 꽃향기가 천리향처럼 나를 이끌었다. 무월광의 밤이 되면 나는 벌이 꽃에 이끌리듯 그녀에게로 갔다. 그를 사랑하는 그녀의 마음을 알았다.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그의 마음도 알았다. 그녀는 그를 바라보았을 뿐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나의 손은 이미 그녀에 닿아 있었음에도.
그녀는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시선은 늘 반대편을 향했다. 나는 태양의 건너편에 선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말없이 떨리던 눈동자를 기억한다. 뻗지 못한 두 손의 머뭇거림과 열리지 못한 입술을 기억한다. 그녀를 눈에 담은 채 그의 발걸음에 이끌려 멀어지던 거리를 기억한다. 간절히 기도하던 내게 들려온 신의 음성을 떠올린다. 그날 이후 나는 해도 달도 뜨지 않는 밤이면 그에게서 벗어나 그녀에게로 갔다. 신이 내게 부여한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그것은 여유롭지 않은 자유의 순간이었고,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스스로 내딛을 수 있었던 목적과 의미였다.
불면의 밤을 헤매던 그녀에게 세상은 밀어낼 수 없는 밤공기였다. 눈을 감아도 꿈은 멀었고 시간은 종종 새벽을 맴돌았다. 나는 연기처럼 그녀 곁에 다가갔다. 그녀가 나를 응시했을 때, 그녀의 눈동자에는 아무것도 비치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마치 내가 그곳에 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내게로 다가왔다. 그녀가 품에 얼굴을 갖다 댔을 때 심장이 뛰기 시작했고, 그녀가 숨소리를 들었을 때 폐가 수축과 팽창을 행했다. 그녀가 손을 잡을 때 뼈와 살이 돋아났으며, 그녀가 턱을 매만질 때 입술이 떨리고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를 듣고 만지고 느낄 수 있었다. 세상에 나는 부존재 했으나 그녀에게 나는 존재했다. 세상에 존재할 수 없던 내게 하나의 독립된 의미가 부여된 건 그날부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