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차원을 살아가는 2차원의 존재
짙은 구름 사이로 달이 수줍은 듯 얼굴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달빛을 벗 삼아 걷기 시작했다. 가로등 빛이 교집합을 이룰 때면 그들은 여러 조각으로 분산되었다가 합쳤다. 자동차가 지나칠 때면 급변하는 빛의 조사에 한층 더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낮에는 태양의 위치만 고려하면 됐다. 가장 확실한 하나의 실루엣만 정성 들여 조형하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실내에 머무르는 클라이언트의 비율이 늘어났다. 가만히 앉아 모니터 화면을 응시하는 클라이언트는 가장 편한 상대였다. 건물을 벗어날 동안 적절히 맞장구쳐주면 됐다. 자동차나 버스, 전철에 올라타면 더 이상 보조를 맞추지 않아도 됐다.
클라이언트의 생활패턴이 변화됨에 따라 그들의 근무환경도 발맞추어 개선이 이루어졌다. 예전처럼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노는 아이들을 쫓아다니느라 진땀 빼지 않아도 되었다. 공연히 자신의 실루엣을 잡아보겠다며 달려드는 호기심 어린 친구들도 없었다. 그들은 점차 나태해졌다. 태양의 고도, 광량, 반사, 산란, 굴절 등을 고려한 복잡한 계산식을 암송할 필요도 없었고 아침저녁으로 길이를 늘리거나 줄일 필요도 없었다. 클라이언트들은 나이와 관계없이 앞날에 대한 걱정에만 시선이 머물렀다. 바닥에서 늘 자신을 따라다니는 이차원의 존재들이 점차 사라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그의 업무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다. 클라이언트의 생활 패턴에 따라 업무강도는 천차만별이었다. 외부활동이 활발한 클라이언트의 경우 부지런히 보조를 맞추어야 했다. 불면의 밤을 보내며 끙끙 앓는 클라이언트나 종종 잠에서 깨어 부지불식간에 바깥을 나돌아 다니는 클라이언트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언제나 단색의 실루엣으로 존재했지만 원래의 모습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클라이언트가 잠들면 그의 업무도 마감되었고, 연기처럼 바닥으로 사라졌다. 눈을 뜨면 익숙한 천장, 침대. 하지만 결코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주는 일정표. 클라이언트가 잠든 시간이 그에게는 깨어있는 시간이었다.
내일은 하루 온종일 비가 예보되어 있었다. 구름이 해를 가려주면 그가 할 일은 없었다. 간혹 기상예보가 부정확하거나 여우비가 내릴 때면 이어폰으로 비상벨이 울렸지만 클라이언트의 최근 경향은 하늘만 올려다볼 뿐 땅을 살피지는 않아서 조금 늦는다 해도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클라이언트에게는 큰 수술이 계획되어 있었다. 오랜만의 휴식이었다. 그는 3차원의 세상에서 살아가는 유일한 2차원의 존재였다. 철저하게 종속된 존재였고, 자율은 없었다. 클라이언트의 모습을 흉내 내며 움직임을 따라 하는 것이 그가 하는 일의 전부였다.
깨어난 시간 동안에는 주로 필라테스와 스트레칭, 그리고 행위예술을 연습했다. 동료들은 그런 그를 고지식하다고 평가했다. 요즘 그런 사소한 움직임까지 신경 쓰는 클라이언트는 없다고. 대충 위치만 맞춰주면 항의 들어올 일도 없다고. 하지만 모르는 소리. 그런 태도로는 잘리기 십상이었다. 클라이언트들은 아무 신경도 쓰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움직임은 본능적으로 잡아낸다. 세심하고 민첩한 반응을 보이려면 전신의 유연함은 필수였다. 클라이언트의 평범한 움직임 하나도 상황과 환경에 따라 다이내믹한 변화가 뒤따랐다. 때에 따라서는 몸을 반으로 접거나 직각으로 구부려야 했고, 온갖 뒤틀림을 감수해야 할 때도 있었다. 적절한 형태로 그 변화를 따라가지 못하면 일을 잃게 될지도 몰랐다. 클라이언트가 뒤따르는 움직임에 의구심을 품는 순간 계약은 자동파기였고, 그 클라이언트는 다른 이에게 할당되는 구조였다. 백수신세가 되면 다시 새로운 클라이언트를 배정받을 때까지 세상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일부는 그런 상황에 만족했지만 그는 아니었다. 그에게는 반드시 현재의 클라이언트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이유가 있었다.
그에게는 남들과는 다른 특별한 일정이 있었다. 그는 시선을 옮기며 벽면을 훑었다. 부착된 수많은 그림이 벽지를 대신하고 있었다. 다른 표정과 다른 모습을 한 그림은 모두 한 사람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 가느다란 물결이 일었다. 시계를 보았다. 곧 달이 질 시간이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