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의 집 앞에 도착한 선명은 차갑고 단단한 문을 두드린다. 이상하게도 열리지 않을 문은 당길 때의 느낌이 다르다. 두드려도 열리지 않을 성문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다. 손잡이에 서린 전기가 흐르는 것 같다. 선명은 초조한 마음으로 기다린다. 역시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없다. 잠든 건 아닐까? 불안을 누르며 달려왔지만 결과는 이미 정해져 있었는지도 모른다. 선명은 이미 수차례 후에게 전화를 걸었다. 데리러 갈 테니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혼자 둬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하기 위해. 하지만 후는 결국 전화를 받지 않았다. 심지어 세 번째 전화부터는 디지털 여성의 딱딱하고 일관된 안내음만 들려왔다. 전화를 받지 않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그리고 얼마든지 벌어질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떤 관계에서는 평범하지 않았다. 선명은 애써 나쁜 예감을 눌러보려 애썼다. 충전기가 없어서 꺼졌을 거야. 기다리다 잠든 걸 지도 몰라. 핸드폰이 고장 났을 수도 있잖아? 가능한 경우의 수를 떠올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이 석연치 않았다. 그런 경우는 끝내 거부하고 부정하고 밀어두었던 마지막 하나의 가정이 진실인 법이다. 선명은 몇 차례 더 벨을 누르고 문을 두드려보다가 결국 체념한다. 역시 후는 이곳에 없는 모양이었다. 어떤 식으로든 후의 신변에 어떤 변화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후가 스스로 이곳을 벗어났을까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끌려 강제로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까 하는 점이었다.
후가 스스로 도망친 거라면 선명의 전화를 피할리 없었다. 그리고 아직 멀리 벗어나지 못했을 테니 인근 지역을 수색하다 보면 의외로 쉽게 만날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후자라면? 후를 데려갈만한 사람이 또 누가 있을까? 후의 아빠는 아닐 거야. 그는 그럴만한 사람이 못돼. 계약까지 성사된 마당에 굳이 감당하지도 못할 아이를 어딘가로 빼돌릴 이유가 없었다. 그의 목적은 어디까지나 후의 몸값을 받아내는 것이었으니까. 의도가 분명하고 단순한 사람은 행동을 예측하기도 쉽다. 갑자기 집에 강도가 들었을 확률은 너무 낮고, 마지막으로 떠올려볼 곳은 결국 연구소다. 하지만 조박사가 내부 사정까지 밝히며 접촉한 현재의 시점에 후를 몰래 낚아챈 장본인이 연구소 측이라면 문제는 더 복잡해진다. 조박사는 전권을 위임받기는 커녕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할 수도 있다. 선명은 생각을 정리하며 조박사에게 전화를 건다. 차분하고 사무적인 목소리가 그녀를 반긴다.
"어쩐 일이야, 벌써?"
"나를 속인 건가요?"
"그게 무슨 말이지? 우리 함께 일하자고 통화한 지 불과 몇 시간도 흐르지 않았어."
"저도 그렇게 믿고 싶군요."
"그냥 쉽게 말하자고.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정말 모르고 있군.'
"후가 없어요. 집에 왔지만 아무도 없어."
조박사의 억양에 숨길 수 없는 당황이 묻어났다.
"그럴 리가?! 아이가 없다고?"
"제가 거짓말할 이유가 있을까요? 당신이야말로 속 시원하게 말해봐요. 아이도 없는 집으로 나를 보낸 이유가 뭐죠?"
"......"
"아무래도 당신의 통제를 벗어난 무언가가 우리 일을 방해하고 있는 것 같아요."
'통제할 수 없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하지만 조박사에게는 흔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는 사람을 믿지 않았다. 늘 제2, 제3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움직이느라 이미 30대 후반부터 머리가 백발이 될 정도였다. 하지만 그런 그도 내게는 속아 넘어갔었지. 속았던 걸까? 아니면 스스로 이용당하길 선택했던 걸까? 믿음은 이유 없이 생기는 법이다. 소장은 조박사에게 그런 소수 중 하나였다.
"소장이 먼저 움직였나 보군요."
"아냐, 그럴 리 없어. 분명 내게 이번 일은 일임하기로 했다고. 소장이 아이를 데려갈 이유가 없어. 그럼 어디로 간 거지? 도망친 건가? 여자아이에 대한 걱정 때문에 그럴 수 없을 텐데?"
여전히 그는 논리와 이성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하지만 사람은 비이성적인 존재다. 그건 조박사도 마찬가지였다. 정작 누군가를 믿어버릴 때, 계산보다는 직감에 의존하지 않던가. 그 아래에 사랑이나 친분 같은 값싼 감정이 흐르는 것도 모른 채. 아무리 열심히 저어도 오리보트는 물살에 휩쓸려갈 뿐이다. 인간에게는 날개가 없다. 조박사도 그런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걸까?
"그나저나 어떻게 하죠? 후가 사라졌는데?"
"기다려. 내가 소장을 찾아가 볼 테니."
"그럼 저는 근처를 돌아다녀보죠. 단순히 집을 나간 거라면 멀리 가진 못했을 테니."
"소장님 안에 계신가?"
"네, 하지만 안에 손님이..."
조박사는 비서의 제지에도 아랑곳없이 거칠게 소장실 문을 연다. 소장 앞에는 50대 후반의 여성이 동석해있다. 소장은 불쾌한 눈빛으로 손을 내저었다. 나가라는 손짓이었다. 하지만 조박사는 그럴 생각이 없었다.
"소장님. 승원이를 빼돌리신 겁니까?"
"이따 얘기하세."
"놀라지 않으시는군요."
"어허, 이 사람! 참! 지금 대화중이지 않은가. 중요한 분이네."
중요한 사람. 소장에게 중요한 사람이 누굴까? 조박사는 일단 물러서기로 한다.
중년 여성이 묻는다.
"저를 알아봤을까요?"
"그럴 틈은 없었을 겁니다.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닌데 오늘은 좀 의외군요."
"다급한 기색이 역력하더군요. 보고부터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별일 아닐 겁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설계에 관한 부분이죠. 아이를 데려오는 일은 그리 급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설계가 끝나지 않으면 쓸 곳도 없고요. 이전 단계에서 필요한 건 다 뽑아내었으니까요."
"하긴."
중년 여성은 고개를 가볍게 끄덕였다.
"칩의 기능을 활용하면 일반인의 생각도 읽어 들일 수 있더군요. 다만 그 대상이 자신의 생각뿐이라는 한계가 존재하지만요. 그 정보를 이용하면 독특한 가상현실 설계도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참가자의 행복감을 극대화하는데도 유용하고요. 예상외로 오래 걸리지 않을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