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27

오미자

by 작가 전우형

중년 여성에게는 목걸이 형태의 명찰이 걸려 있다. 명찰 중앙에는 그녀의 딸처럼 보이는 여성이 해맑게 웃고 있으며 그 바로 아래에는 [소장 오미자]라는 이름이 쓰여 있다. 왼쪽 상단에는 연구소 엠블럼이 그려져 있고, 맨 아래쪽에는 깨알 같은 글씨로 소속이 표시되어 있는데 너무 작아서 보이지 않을 정도다. 소장은 굳이 그녀의 소속을 확인하지 않아도 연구소 산하 3개 연구단체 중 '유토피아 가상현실 연구소' 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최근 그쪽 소장이 교체되었다는 소식이 들렸는데 꽤나 야심 찬 인물이라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미자는 소음과 함께 거칠게 닫힌 소장실 문을 돌아보며 입을 열었다.

"조박사는 무엇 때문에 화가 났을까요? 어떤 소식이 그를 가장 기쁘게 할까요? 아니면 더욱 절망에 빠트릴까요? 이런 질문은 제가 늘 하는 고민이기도 하고 연구원들이 답을 찾으려 애쓰는 부분이기도 하답니다."

미자는 뒤쪽 문을 보느라 비스듬히 돌아갔던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으며 소장을 정면으로 바라보았다.


"소장님도 가끔 꿈은 꾸시겠죠? 어떻던가요? 프로이트가 '꿈은 무의식으로 가는 왕도'라고 했잖아요? 저는 정말 그렇다는 생각을 종종 해요. 깨어나기 전에는 그게 꿈인지 현실인지 알지 못하니까요. 어쩌면 꿈속에서 누군가의 개입 없이 홀로 맞이하는 상황들 속에서 스스로 내린 반응과 결정들이 무의식의 결정체 인지도 모르죠. 깨어나고 나서야 그게 꿈이었구나 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하고 때로는 아쉬워하기도 하는 것처럼요. '가상현실 유토피아'는 프로이트가 말한 꿈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꿈속에서 자신의 무의식과 싸우기도 하고 다가가기도 하며 극적 화합을 이루어내기도 하죠. 극한의 리얼리티를 추구함으로써 가상현실이지만 현실세계와 똑같이 느껴질 수 있도록 하는 이유입니다. 참가자들은 유토피아 접속장치에 들어가면 '꿈꾸는 상태'로 머물게 됩니다. 일종의 긴 잠에 빠져드는 거죠."


미자는 찻잔을 들어 입술을 축였다. 오미자처럼 빨간 그녀의 립스틱이 하얀 찻잔에 진하게 묻어났다. 소장은 그녀의 말을 경청하듯 상체를 앞으로 살짝 기울였다. 그런 소장에게 반응하듯 그녀 또한 의자를 당겨 앉았는데 그 과정에서 벌어진 셔츠 사이로 가슴골이 살짝 드러났다.


"가상현실 유토피아는 매우 은밀한 방식으로 모든 것이 움직입니다. 연구원들이 가장 신경 쓰는 부분은 자연스러움입니다. 참가자가 유토피아의 현실성에 의심을 품는 순간 꿈은 오래갈 수 없습니다. 머지않아 산산조각 날 게 뻔하죠. 꿈속에서라도 죽거나 높은 곳에서 떨어지거나 극심한 충격을 받으면 순간적으로 꿈에서 깨어나게 됩니다. 자신을 보호하기를 위한 자연스러운 현상입니다. 예컨대 하나의 세상에서 죽음을 맞이하면 다른 세상에서 새로 깨어나는 것과 같죠."


소장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장황한 설명으로 불안을 감추려는 것 같았다. 과장된 제스처 탓에 풍만한 가슴이 끊임없이 흔들렸다.

"소장님도 아시겠지만 전문가들은 한두 세대가 더 지나면 인간은 스스로 행복감을 생산하지 못할 거라고 했습니다. 그보다 행복의 상실은 훨씬 더 이른 시점에 다가올 거라고 우려하는 학자도 있죠. 과장도 섞여있을 테지만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세상에는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고, 우리가 모른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 테니까요. 복잡한 이론적 배경이나 근거를 대지만 결국 결론이나 예측에 다다르면 의견이나 직감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근거라고 주장한 것들도 다른 연구결과 중 일부를 차용하는 식이죠. 차용한 연구자료를 찾아보면 또 다른 연구가 근거가 되고, 결국 그 근거라는 것도 너무나 많은 연구가 거미줄처럼 얽히고설켜있어서 연구자 본인의 양심이 아니고서는 진위를 판단할 수도 없는 것이 현실입니다. 어쩌면 미래를 예측한다는 건 인간의 이성으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결국은 상당 부분 직감에 의존할 수밖에 없죠."


미자는 잠시 말을 끊고 소장을 바라보았다.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 같기도 했고 자신의 의견에 동의를 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전문가 집단에 대한 개인의 식견까지 언급하는 걸까? 소장은 내심 계산기를 두드리면서도 적극적으로 그녀의 물음에 화답했다.


"전문가들은 복잡하고 어려운 말로 떠들어대기만 할 뿐 성형한 콧대나 가슴만큼이나 알맹이는 없죠. 아! 오해는 마시고요. 소장님을 보고 하는 말은 아닙니다. 아무튼 논문들이 막상 읽어보면 남는 건 없고 시간낭비, 종이 낭비인 건 저도 동의합니다. 하지만 행복 추출 연구가 어렵사리 시작되고 또 박차를 가하게 된 것도 세상이 소위 '전문가 의견'에 따라 흘러가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소식을 듣자 하니 소장님 쪽 연구에 소득이 있었다고 하던데, 그건 어떻습니까?"


미자는 소장의 맞장구에 활짝 웃으며 입에 침을 튀기 시작했다. 그녀가 얼굴을 더 앞으로 들이민 탓에 소장은 무의식적으로 뒤로 살짝 물러나고 말았다. 이름처럼 다섯 가지 맛을 내는 여자였다. 직설적이고 당돌한 성격도 한몫하는 것 같았다.


"기억 스캔 기술은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참가자가 위화감을 느끼지 않도록 가상현실을 구현하는 장치 또한 시운전을 거의 마친 상태입니다. 연구원들을 상대로 몇 차례 테스트해본 결과 현실과 전혀 다른 점을 느끼지 못했다고 하더군요. 다만 참가자의 기억에 존재하는 수많은 인물과 사건 중 어떤 것이 가장 효과적인지 계산하고 설계하는 과정은 여전히 난제입니다. 매번 참가자에게 과거의 어떤 장면이 가장 인상 깊었나요? 하고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아시다시피 '우리'의 목표는 참가자가 익숙한 과거의 어느 장면을 여행하며 추억 놀이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녀는 마지막 문장을 내뱉으면서 소장의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녀가 굳이 입에도 잘 붙지 않는 '우리'라는 말을 강조해서 사용한 것은 운명공동체임을 부각하려는 속셈일 것이다. 소장은 그녀의 의도에 일단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럴 테지요.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유토피아 참가자들의 행복을 극대화하는 것이니까요. 결국 그게 우리의 경쟁력이 되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보내드린 자료는 도움이 되던가요?"


미자는 이제부터가 진짜라는 듯 자세를 고쳐 앉았다. 진지한 눈동자에 불꽃이 튀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은 '야심차다'는 그녀에 대한 평을 그대로 드러내는 느낌이었다.


"지금부터 말씀드릴 내용이 바로 그겁니다. 참가자의 삶과 경험, 가족관계, 특징적인 사건과 대상 등 사전 정보를 토대로 최초의 세계를 설계하는 것은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만 불가능한 건 아닙니다. 다만 참가자들이 현실과 소통하고 반응하고 선택하는 과정들 속에서 적합한 사건을 부여하고 과제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짜 문제였지요. 관건은 참가자가 얼마나 오랫동안 안정적으로 유토피아 내에서 행복에너지를 생산하며 체류할 수 있는가 하는 부분이니까요. 그러니까 '신놀이'도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닌 겁니다. 일부 종교에서 신은 인간에 대한 계획을 모두 갖고 있다고 말합니다만, 그게 정말이라면 신은 정말 골치 아픈 일을 하는 거라고 봅니다. 만약 저라면 신이고 나발이고 모두 때려치울 것 같아요. 인간 모두에 대한 개별적인 인생을 설계할 수 있다는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능히 그 존재는 '신'으로 불릴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거든요.


예컨대 외딴곳에 홀로 머무는 상황에 처한 참가자가 느낄 감정은 어떨까요? 처음 한동안은 조용함과 평온함을 느끼겠지요. 하지만 그 감정은 곧 지루함과 외로움, 답답함 등으로 바뀔 겁니다. 그나마 초기에는 고려할 변수가 적은 편입니다. 변수를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설계하는 방법도 병행할 수 있고요. 초기 오리엔테이션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면 일탈 범위를 한정하는 것도 가능합니다. 계약내용을 설명하는 형태나 선생이 학생을 가르치는 형태가 사용될 수도 있고요. 마치 그것이 세상의 원리라고 알려줌으로써 문제의 소지는 줄이고 적응에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이끌 수 있지요. 일종의 선입관을 심어주는 겁니다.


보상이나 페널티를 제공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보상은 참가자에게 매우 시급하고 필수적인 것들이 되겠지요. 예컨대 빚더미에 쫓기던 참가자에게 주어질 보상은 채무 대납과 도망자 생활을 청산하는 것, 그리고 가족에게 생활비를 지급하는 것 등이 물망에 오를 겁니다. 보상에는 조건이 붙습니다. '10년간 머무는 곳 반경 50m를 벗어나지 말 것.'과 같은 것들입니다. 달성하기 까다로워야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것은 안됩니다. 하늘을 날아야 한다던가 어딘가로 순간 이동한다던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는 것처럼요.


하지만 유토피아에서의 삶이 지속되는 동안, 아마도 어떤 참가자에게는 그게 평생이 될 수도 있겠죠? 유토피아에 거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개인에 따라 다양하고 많은 일이 벌어질 겁니다. 그 모든 것을 계획하고 실행하는 건 신이 아닌 이상 불가능해요. 차선책은 참가자에게 지속적으로 희망과 절망을 왔다 갔다 할 사건들을 만들어서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입니다. 이 세계에서의 모험과 삶을 유지할 동력을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니까요. 참가자가 모든 걸 포기하고 극단적인 선택을 하거나 나 몰라라 식으로 일탈을 벌이면 통제도 불가능할뿐더러 유토피아에 그를 잡아둘 이유 자체가 사라지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