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게 신이 하는 일이라면 저도 그만둘 것 같군요. 버거운 일입니다. 인간의 속마음을 들여다보는 건요."
"최악의 경우 시스템을 재시작해야 하는데 쉬운 일이 아닙니다. 강제 종료라도 하면 참가자는 엄청난 충격을 받게 되니까요. 참가자 스스로 깨어나도록 하는 게 최선입니다만 그러려면 유토피아의 왜곡을 드러내야만 합니다. 한번 의심이 시작되면 대부분의 참가자는 곧 깨어납니다. 다만 그렇게 리셋한 참가자는 유토피아에 다시 접속해도 오래가지 못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시스템 운용 부하도 극심해지고요."
미자는 잠시 소장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가볍게 끄덕이자 그녀는 말을 이어갔다.
"참가자의 가장 큰 어려움이나 불안, 공포, 초조, 질투 같은 것들을 찾아내서 적절한 사건을 만들어내고, 또 그걸 하나씩 해결해나가도록 유도하는 게 핵심입니다.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새롭거나 친숙한 인물을 투입시켜 해결을 돕는 방법 등이 있겠죠. 바로 여기에 난제가 숨어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컴퓨터가 인간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은 너무 어려운 일 아니겠습니까? 인공지능과 누적된 데이터 등을 활용하면 어느 정도는 대응할 수 있겠지만 사람도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의 변덕과 속내를 어떻게 인공지능에게 가르치겠습니까?
무엇보다도 가장 큰 문제는 자연스러움일 겁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능력은 지능이나 이성이 아니라 '직감'입니다. 인간은 직감을 이용해 생존해왔죠. 주변의 이상한 점을 가장 빨리 눈치채는 것도 다름 아닌 직감입니다. 직감이 경종을 울린 후에야 이성이 작동하기 시작하죠. 결국 이런 문제는 시스템 운용에 필요한 연구원 수요에 직결됩니다. 시스템 확장이나 상용화에 큰 걸림돌이나 다름없어요. 아직은 실험 단계니까 참가자마다 연구원이 배정되어 상황을 모니터링하고 통제할 수 있다지만 수백, 수천 명의 참가자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소장은 순간적으로 맞장구를 쳤다.
"어쩌면 그 문제에 이번 칩이 효과가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오늘 제가 소장님을 찾아뵌 이유이기도 하고요. 보내주신 자료를 몇 번이나 다시 읽어보았는데 정말 엄청난 자료입니다. 이만한 성과는 연구소 전체를 찾아봐도 지금껏 없었을 겁니다. 칩은 선명이라는 과거 피험자의 독특한 데이터에서 파생된 걸로 나와있더군요. 다른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라... 저도 갖고 싶은 능력인데요. 아무튼 기록에 보면 그녀 스스로는 속마음이 목소리처럼 들린다고 했다던데 아마도 본인의 해석을 잘못 판단한 거겠죠. 상대방의 생각을 읽을 때 독특한 뇌파가 발생되는 것도 재미난 부분이고요. 관찰하고 추론한 결괏값이 하나의 완성된 생각으로 도출될 때 바로 그 뇌파가 발생했다, 이게 정말이라면...!"
소장이 자연스럽게 덧붙였다.
"저희가 칩을 개발하면서 가장 집중한 부분이기도 합니다. 뇌파를 흡수하고 분석하면 상대방의 생각이나 결론을 스캔하듯 읽어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획기적이었습니다. 최근 다른 피험자들에게도 한 실험에서도 강도만 약할 뿐 유사한 종류의 뇌파가 뻗어 나오는 것을 발견하기도 했고요."
미자는 흥분한 관중처럼 손바닥을 마주쳤다. 작지 않은 소장의 방에 그녀의 박수소리가 울렸다.
"그겁니다! 칩을 유토피아에 활용하면 엄청난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참가자의 추론과 선택, 결정을 스캔하며 반응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가장 매력적이고 효율적인 스토리 구성이 거의 실시간으로 가능해지는 거죠! 그 정도 수준의 자동화를 이뤄낼 수 있다면 수십 명에 1명 정도만 인원을 배치하면 충분합니다."
미자는 순식간에 흥분을 가라앉히며 공손한 자세로 변했다. 소장은 문득 그녀를 연구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급격한 감정 변화를 관찰하는 것은 재미난 연구과제가 될 것 같았다. 소장은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소장님. 이미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오늘 확답을 받고 싶습니다. 칩을 저희 연구소와 공유해주세요. 향후 공동연구를 제안드리고 싶습니다. 물론 공짜는 아닙니다. 원하는 정보는 모두 드리죠. 소장 선에서 불가능한 정보만 아니라면 필요한 모든 자료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제가 몸이 닳아 직접 찾아오길 기다리셨다는 거 압니다. 숨김없이 다 말씀드린 거예요. 저희는 뭐든지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이 열리고 도도한 표정의 중년 여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소장을 대할 때와는 180도 달라진 모습이었다. 비서가 조박사에게 소장의 부름을 대신 전한다.
"부장님, 들어오시랍니다."
조박사는 대기실 소파에서 일어서다가 중년 여성과 눈이 마주친다. 3개의 연구소는 독자적으로 활동했고 연구원들은 한번 부서가 정해지고 나면 이동이 거의 없었다. 보안이 철저해서 점조직 형태로 운용되었고 그래서 같은 연구소 내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모르기도 했다. 그나마 조박사는 연구소에서 굴러먹은 경력이 꽤 오래된 탓에 소장들 얼굴 정도는 알고 있었지만 소장은 교체가 잦은 편이라 기억하는 얼굴이 언제 적 소장 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만 중년 여성의 웃음이 마음에 걸렸다. 왜 나를 보며 웃는 걸까? 안에서 어떤 이야기를 나눈 걸까? 조박사는 의뭉스러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본다. 그녀는 조박사의 시선을 굳이 피하지 않는다. 오히려 즐기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진한 향수 냄새가 확 몰아쳤다. 조박사는 순간적으로 얼굴을 찌푸리며 돌아섰다. 냄새를 만들어내는 것은 신에 대한 프로메테우스적 도전이라는 것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실제로는 그 모든 화학분자의 무작위적 결합이 후각적 마비를 넘어 두통을 일으킬 정도이기 때문이었다. 예전에는 향수 냄새만 맡아도 구토가 나올 정도였지만 지금은 그저 인상을 찌푸리는 것 정도로 '완화'된 편이었다. 그러나 조박사는 지금 느껴지는 불쾌감이 독한 향수 때문인지, 그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조박사는 잠시 그녀에게 향했던 관심을 정리한다. 대전 상대는 그녀가 아니었다. 중요한 결전을 앞두고 눈을 돌리는 전사에게 승리의 여신은 미소 짓지 않는 법이다. 조박사는 소장실 문을 열고 들어간다.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소장님."
소장은 그의 비꼬는 말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다. 아무렇지 않은 응대가 평정심을 무너트리는데 더욱 효과적인 법이었다.
"그래, 아이가 사라졌다고?"
"그렇습니다. 선명이 아이를 설득해서 연구소로 복귀하면 되는 순간에 일이 어그러진 게 우연 같지 않기도 하고요."
"그 원인이 내게 있다는 건가? 근거는?"
"아이의 행처를 아는 사람이 소장님 뿐입니다."
"아버지도 있지 않은가? 마음이 바뀌어서 아이를 데려갔을 수도 있지 않나?"
"저를 우습게 보시는군요. 떠보시는 이유는 알겠지만 대꾸할 시간도 없군요."
"자네가 내 마음을 다 아는가? 고맙군 그래. 그 선명이라는 아이와 제법 지내더니 자네도 사람 마음 읽는데 아주 선수가 다 된 것 같군. 그런데 말이야. 나는 아직도 자네 속을 모르겠네."
속을 모르겠다는 말은 믿을 수 없다는 말과 동의어였다. 그런 사람에게 어떤 일을 맡길 수 있을까? 이어진 소장의 말이 하소연 같은 이전보다 더욱 진심처럼 들렸다.
"왜 그녀를 끌어들였나? 분명 자네에게 승원이만 데려오라고 했을 텐데? 아직도 선명이에게 미련이 남았나?"
"무슨 말씀입니까? 일전의 보고에서 분명...?"
"물론 그랬지. 나는 듣고만 있었네. 자네가 어디까지 솔직해지는지 보려고. 나는 그래도 우리 사이가 90점 정도는 될 줄 알았네. 하지만 실망이었지. 칩을 아이에게 장착한 건 왜 숨겼나? 왜 보고도 없이 그 아이를 내보냈나? 그저 어린아이 한 명 사라진 걸로 처리하면 내가 모를 줄 알았나? 그 아인 내 하나뿐인 손녀였네."
조박사의 안색이 순간적으로 어두워졌다. 마약 중독과 자해로 결국 숨졌다는 아이 엄마가 소장의 딸이었다니. 하지만 그는 이내 평온함을 되찾았다.
"미리 말씀드리지 못했던 건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그 아이는 심각한 피해망상과 환시로 매우 위험한 상태였습니다. 임신 중에도 마약을 흡입한 탓에 뇌 손상도 심했고 엄마의 충격적인 죽음 이후에는 사람을 가까이하지도 못했다는 거 소장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다섯 살도 안된 아이가 누구도 믿어선 안돼 하며 주문처럼 외고 다닐 정도면 앞으로야 뻔한 거 아닙니까? 물론 손녀딸인 걸 알았다면 테스터로 선정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적어도 소장님께 여쭙고 일을 진행했겠죠. 그 정도는 아시지 않습니까?"
소장의 안색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가장 위험한 곳으로 아이를 보냈나? 그 칩이 선명이나 승원이 같은 아이와 상극이라는 걸 알고도 보낸 건 선명을 연구소로 다시 끌어들이기 위한 구실을 만들려던 거 아닌가? 아이의 생사는 어차피 관심도 없었겠지?"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연구소가 인도주의적으로 돌아가지 않는다는 거, 저보다 소장님께서 더 잘 아실 테니까요. 손녀딸을 사지로 내몬 건 제 실책이니 사과드리겠습니다. 문책하려면 문책하십시오. 하지만 승원이는 선명이 데려오는 편이 가장 안전합니다. 누구를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일반인은 그 아이를 감당할 수 없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