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29

탈주

by 작가 전우형

후는 건장한 요원 두 사람에게 구속된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탄다. 소명은 어느새 있는 듯 없는 듯 그들 뒤에 서 있다. 후가 말을 건다.

"소명아. 넌 어쩌다 여기까지 온 거야? 누나한테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응?"

소명은 후를 처음 만났을 때처럼 말이 없다. 후는 소명에게 다가가려 해 보지만 그들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후는 갑자기 격렬히 몸부림치며 허공에다 발길질을 해댄다. 전등이 깜빡이고 엘리베이터가 멈칫거리더니 결국 멈춰 서고 만다. 층이 표시되는 곳에 14와 15가 반복된다.

"가만있지 못해?"

요원이 윽박지르며 후를 제지해보지만 온 힘으로 몸부림치는 10대를 제압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멀쩡한 채로 데려오라는 지시만 아니었다면 훨씬 간편하고 쉬운 방법을 쓸 수도 있었겠지만 지금은 족쇄가 채워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스피커로 조용한 하루를 방해받은 경비원의 귀찮은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 무슨 일입니까? 엘리베이터에서 그렇게 장난치면 큰일 납니다."

후가 이번에는 양다리를 가슴까지 들었다가 바닥을 내리찍는다. 좁고 긴 허공을 타고 '쿵'하는 소리가 공명하며 한참을 멀어진다. 가느다란 철사 몇 가닥에 의지한 철제 상자가 위태롭게 흔들리더니 초보 기수의 요령 없는 채찍질에 화난 경주마처럼 급속히 낙하를 시작한다. 엘리베이터 내부는 굉음과 함께 순식간에 암흑천지로 변한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구속하던 요원의 팔이 풀리고 후는 고개를 있는 힘껏 뒤로 젖힌다. 뒤통수에 강한 충격이 느껴짐과 동시에 요원의 고통스러운 신음소리가 들린다. 그때 엘리베이터 제동장치가 작동되며 거친 마찰음과 함께 멈춰 서고 갑작스러운 운동에너지의 변화가 탑승객을 강타한다. 코를 부여잡으며 주저앉던 요원은 엘리베이터 손잡이에 부딪혀 쓰러지고 다른 한쪽에서는 고막을 찢을듯한 비명이 솟구친다. 그가 한쪽 눈을 부여잡으며 팔다리를 휘두르는 탓에 소명이 한쪽 벽으로 날아가고 후는 복부를 차인채 주저앉고 만다. 좁은 엘리베이터 내부는 자욱한 피비린내와 비명으로 아수라장이 된다.

"아저씨! 납치예요! 납치! 제발 문 좀 열어주세요! 우릴 죽이려고 해요!"

놀란 경비원이 비상 제어로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주고, 살짝 벌어진 틈으로 후와 소명이 먼저 빠져나온다. 그 뒤를 한쪽 눈에 칼이 꽂힌 요원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뒤쫓다가 바닥에 쓰러진다. 후는 얼른 달려가서 꿈틀거리는 그의 눈에 꽂힌 칼을 뽑는다. 엄청난 통증에 요원이 다시 일어나 발악한다. 두 아이는 다시 처음 만났던 그날처럼 손을 잡고 달린다.


"괜찮아, 소명아?"

후가 고통스럽게 묻는다. 뒤통수에서는 피가 흐르고, 새우처럼 굽은 허리는 제대로 펴지 못한다. 가슴을 부여잡고 가쁜 호흡을 내쉬면서도 다른 손으로는 소명을 이끌고 부지런히 달린다. 여기저기 피가 묻은 모양새가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끌지만 후는 오로지 멀어질 뿐이다. 소명은 입술에 피멍이 들었을 뿐 별다른 부상은 없어 보인다. 곳곳에 피가 튄 자국이 있지만 자신의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소명은 후를 따라 달리면서도 복잡한 눈으로 후를 바라본다. 두 사람은 골목 그림자 뒤에 숨어 거친 호흡을 정돈한다. 소명은 손을 뻗어 후의 얼굴을 어루만진다. 그런 소명의 손에도 검붉은 피가 잔뜩 묻어있다. 우리의 삶은 왜 이렇게 늘 피투성일까? 후는 잠시 하늘을 본다. 언제나 그랬다. 나를 제외한 하늘은 늘 평범하고 푸르기만 했다.

"칼 이리 줘."

소명의 목소리가 후의 짧은 상념을 파고들었다. 그녀의 시선은 후의 가슴에 머물러 있다. 가슴을 부여잡은 손에는 날카로운 단도가 신체 일부처럼 꼭 쥐어져 있다. 후는 들은 척도 않은 채 소매를 당겨 손잡이를 꼼꼼하게 닦고 자신의 손으로 감아쥐고 편다. 그러고는 무심히 자신의 점퍼 주머니 안에 집어넣고는 다시 걷기 시작한다. 소명이 그를 따라 걸으며 따져 묻는다.

"뭐 하는 거야 지금?"

"잊어. 넌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어차피 CCTV에 다 찍혔을 거야."

"불이 꺼졌었고 난리통이라 누가 뭘 했는지 알 수 없을 거야. 사각지대도 있고. 넌 그냥 아무것도 기억 안 난다고 해. 알았지?"

소명은 대답 없이 휙 돌아서서 먼저 걸어간다. 후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채며 되묻는다.

"야! 알았냐고?!"

소명의 어깨에 참을 수 없는 진동이 인다.

"... 재수 없어."

"뭐라고?"

"재수 없다고! 나보다도 어린 게 맨날 지만 어른인 척하고...!"

소명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한다. 적막한 골목 사이로 그녀의 흐느낌만이 잔잔하게 울린다. 후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소명을 달래려 한걸음 다가선다.

"오지 마."

후는 다가가던 자세 그대로 멈칫하며 물러선다.

"이제 눈물까지 닦아주려고? 쪽팔리게 정말..."

소명은 손등으로 눈물을 대충 훔쳐낸다. 아직 눈물도 마르지 않은 눈동자에 익살스러움이 슬며시 묻어난다.

"그나저나 궁금해 죽겠지?"

"뭐가?"

"왜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지?"

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네가 어떻게 알아?"

소명은 머리 뒤편에서 어린아이 손바닥만 한 작은 칩 하나를 꺼낸다.

"이것 때문이야."

"뭔데 그게?"

"나도 잘은 몰라. 연구소 사람들이 머리 뒤편에 이걸 달아줬어. 나는 그날 밤 평소처럼 도망쳤지만 웬일인지 쫓아오는 사람이 없었어. 그리고 다음 날 널 만났지."

호칭이 어색하다. 너? 후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소명이 그의 눈빛을 읽은 듯 톡 쏘는 말투로 대꾸한다.

"왜? 너라고 하니까 이상해? 오빠라고 불러줬더니 좋아가지고는. 내가 원래 너보다 나이가 두 살은 더 많거든? 좀생이 같으니라고. 아무튼 이거 필요하면 줄게. 난 이제 필요 없거든. 그 사람들 내가 하나도 못 알아들을 줄 알았나 봐. 헛똑똑이들 같으니라고."

"무슨 말... 하는 거야, 너?"

"마음 좀 읽을 줄 안다더니, 안되니까 정말 둔하구나 너? 안 되겠다. 아무래도 이건 너한테 주면 안 될 물건인 것 같아. 완전 사람 바보 만들겠잖아?"

"지금 머릿속이 조용한 게 그거 때문이라는 거야?"

"그 사람들 말로는 그렇대. 네가 당황하는 거 보니까 진짠 것 같고. 그 사람들 내가 잠든 줄 알고 자기들끼리 신나서 떠들어대더라고. 그러니까... 무슨 '칩'이라고 하던데 아무튼, 요 작은 물건 하나만 몸에 지니고 있으면 너나 선명 언니 같은 사람들에게 생각이 읽히지 않는대. 그리고 뭐라더라? 오히려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까지 알 수 있다던가? 아무튼 그런 마법 같은 물건이래. 근데 이게 신기한 기능이 있더라고. 내가 한 2년 차고 다녀보니까 머릿속이 깨끗해지는 거 있지? 잡생각이 사라진달까? 나도 원래는 사람들이 다 날 쫓아와서 갈기갈기 찢어놓으려고 하는 줄 알았거든. 근데 널 만나고 그게 없어진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이거 때문인 것 같기도 해. 어때? 너도 써볼래? 원하면 '빌려'줄게."

그녀가 장난스럽게 '빌려'를 강조해서 말했지만 후에게 잘 전달되지는 못한 듯하다. 후는 갑자기 다른 사람처럼 구는 소명이 어색하다 못해 이상하다. 이게 그동안 내가 알던 소명이 맞다고? 다른 사람을 그녀라고 착각한 건 아닐까?

"조심해. 다 들리니까. 딴 사람 생각은 못 들어도 언니와 너, 딱 두 사람 생각은 들리는 신기한 물건이라고. 그동안 너만 내 맘을 다 아는 줄 알았지? 실은 정반대야. 나는 네가 무슨 연예인을 좋아하는지까지 다 알고 있었다고."

소명은 그러면서 챙겨 두라는 듯 후의 주머니에 칩을 쑤셔 넣었다.

"이상해 보여도 조금만 참아. 이따가 이 '누나'가 다 설명해줄 테니까. 어서 가자. 언니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먼저 도착할 줄 알았는데 연구소 요원들과 딱 마주칠 건 뭐야? 상황 봐서 도망치려고 했는데 네가 갑자기 나서는 바람에 칼부림까지 해야만 했잖아. 하마터면..."

그녀는 순간적으로 안색이 어두워졌다가 밝아졌다. 아까의 끔찍한 상황이 순간적으로 떠오른 것 같았다. 하지만 후는 그런 소명을 살필 겨를이 없다. 모든 게 혼란스럽다. 그러고 보니 그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소명은 요원의 칼을 빼앗아서 정확히 눈을 찔렀지. 과연 그게 우연이었을까?

"고민해도 소용없어. 머릿속만 복잡할 테니 잠깐만 잊어. 때 되면 말해줄게."

묵묵히 걷던 후가 입을 연다.

"넌 왜 온 거야?"

"언니가 시켜서 왔지."

"그거 말고. 나한테, 아니, 우리한테 2년 전에 왜 온 거냐고."

"설명하자면 좀 복잡해. 꼭 지금 들어야겠어?"

후는 그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조금 차가운 눈빛이었다.

"네가 나라면 지금 상황에서 아무렇지 않게 믿을 수 있겠어? 그리고 애써 과장해서 밝은 척해도 소용없어. 나한테는 다 보인다고."

소명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얕은 한숨을 내쉬고 발걸음을 멈춰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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