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30

이유

by 작가 전우형

"네가 그런 눈으로 보니까 조금 무섭네. 늘 미움받아왔지만 너한테는 안 그랬으면 했는데. 하... 그래, 나는 연구소에서 자랐어. 엄마는 연구원이었는데 심각한 마약 중독자였고 날 가지고도 약을 못 끊었대. 두 살 때쯤인가? 엄마는 연구소 뒤쪽 절벽 아래에서 발견됐다고 하더라고. 근데 사실 이것도 들은 말 뿐이고, 엄마에 대해선 나도 기억나는 게 거의 없어. 이미 그전부터 연구소 사람들 손에 맡겨져 있었거든. 아빠가 누군지도 몰라. 근데 궁금하지도 않아. 우습지? 분명 매일같이 지나치던 여러 연구원들 중 한 사람이었을 텐데. 근데 그들 중 하나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어.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사람들이 내 부모라니. 그보다 더 나쁠 게 있을까 싶더라고. 근데 이것도 확신할 수 없는 게 거긴 조작이 일상이라 어디까지가 진짜인지도 모르겠고. 그냥 가끔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죄수 면회하듯 찾아와서 엄마가 하던 말이 떠오르는 걸 보면 '엄마라는 사람'이 진짜로 있긴 했었나 봐. 뭐라더라... '아무도 믿지 마, 그게 엄마라도.'였나? 결국 그게 유언이었던 거지. 그래서 정말 아무도 믿지 않기로 했어. 어차피 누굴 믿어본 적도 없었지만 점점 더 사람들이 징그럽고 싫어지더라고. 그러다 어느 날 정신을 차렸을 때 눈앞에 피투성이로 쓰러져 있는 사람을 봤어. 나한테도 피가 잔뜩 흘러나와있었지. 이게 무슨 일일까... 무섭다기보다는 궁금했어. 비명도 못 질렀던 것 같아.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는 누워있더라고. 꿈이었을까? 아니면... 내가 정말 사람을 죽인 걸까? 이런 얘기, 끔찍하지?"


소명은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어간다. 마치 남의 얘기하듯이 자신의 과거를 '설명'하지만 그녀의 행동은 로봇처럼 자연스럽지가 않다. 어떤 말은 묵은 상처를 긁어내지 않으면 할 수가 없다. 연습하면 고통을 참을 수 있지만 어금니는 악물어야만 한다. 후는 놀라지 않았다. 소명이 평범한 아이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후는 그녀를 처음 만난 날을 떠올렸다. 그때 느낀 측은함과 동질감은 분명 진실이었다. 살아온 날의 향기는 어떤 식으로든 몸에 밴다. 좋든 싫든 냄새가 스민다. 그녀에게서도 자신과 같은 냄새가 났다. 배우자를 고를 때 상대방의 냄새를 맡는 것처럼 후는 소명에게서 느껴지는 그 향기가 싫지만은 않았다. 아니, 편안하고 좋았다. 그렇지만 어쩐지 오늘 그녀에게서 풍겨오는 냄새는 지금까지와는 너무나 달랐다.


"나도 네가 좋은 데서 자랐을 거라고 생각한 적 없어. 사람을 죽였든 죽여보지 않았든 그것도 중요하지 않아. 슬픈 일이지만 그렇게 놀랄 일도 아냐. 어차피 사람은 마음속으로 늘 누군가를 죽이며 살아가니까. 내가 궁금한 건 그게 아냐. 넌 대답을 피하고만 있잖아. 지금 한 이야기는 껍데기뿐이야. 힘든 말일 거 알아. 하지만 이대로는 널 '예전처럼'은 믿기 힘들 것 같아."


소명의 안색이 더 어두워졌다. '예전처럼'이라고. 그래, 누구도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지. 우린 앞으로를 살뿐이니까. 예전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그때와 같을 순 없어. 돌아가는 방법은 애초부터 없었잖아? 소명은 우두커니 걸어가던 모습 그대로 말을 꺼낸다. 마치 그녀가 아닌 존재가 말을 대신 전해주는 것처럼 평소와 다른 목소리다.


"솔직히 나도 잘은 몰라. 내가 왜 그들에게 선택받았는지. 왜 너를 만났는지. 왜 여기로 '보내'졌는지. 나는 늘 하던 대로 도망쳤을 뿐이야. 널 만난 건 우연이었어. 적어도 '나한테는' 말이야. 그 우연마저도 조작되고 의도되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그게 내 잘못은 아니잖아?"


"그럼 왜 처음부터 거짓말했어?"


"무서웠으니까! 그리고 너 잊었구나? 난 아무 말도 안 했어. 네가 날 멋대로 데려간 거지. 난 그저 누군가가 필요했어. 잘 곳도 없었고. 돌아가긴 죽기보다 싫었고. 그런 내가, 데려가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겠어? 그리고 내가 첨부터 이런 얘길 했으면 나 같은 앨, 나 같은 징그러운 애를 누가 받아줄 거냐고. 당장 지금 니 반응을 봐. 그런 눈으로, 그런 거지 같은 눈으로 날 바라봤을게 뻔하잖아!"


소명은 또 울음을 터트릴 기색이다. 후는 자기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서고 만다. 하지만 이렇게 이야기를 끝냈다가는 다시는 물어보지 못할 것 같다. 후는 입술을 깨문다.


"그럼 칩 이야기는 뭐야. 결국 다 알고 왔던 거 아냐?!"


"칩에 대한 거야 그 사람들 이야기를 엿들었을 뿐이고. 그게 너랑 언니에게 효과가 있다는 것도 여기 오고 나서 알게 된 것뿐이야. 내가 눈치 빠른 거 너도 알잖아! 난 그냥... 난 그냥, 널 만나고 나서 마음이 편했어. 좋았어. 그렇게 푹 잠든 거 니 옆이 처음이었어. 내가 얼마나 잠을 못 잤었는지 이미 말해줬었잖아. 이전 일은 아무래도 좋았어. 널 만나기 전의 기억은 이 세상에서 사라졌으면 했어. 그게 진심이야. 내 삶은 널 만난 이후가 전부라고!"


소명의 눈에 비친 간절함은 거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후는 돌아섰다. 또 바보같이 다시 믿고 싶어 질 것 같았다. 소명이 뒤에서 울부짖었다.


"그날만 아니었다면! 너희 부모가 널 찾아왔던 그날만 아니었다면! 둘 다 죽여버리려고 했는데. 젠장! 예전 일이 다시 떠오른 건 네가 떠나고 난 다음부터였어. 네가 돌아가고, 선명 언니와 나만 남았을 때 나는 다시 예전으로 돌아가 있었어. 외롭고 분했어. 나는 왜 매번 이렇게 버림받는지 분해서 미치겠는데 아무 데도 화풀이할 곳이 없는 거야. 따지고 보면 나는 너희에게 가족도 동생도, 하다못해 애완견도 아니었으니까!"


그건 아냐, 너는 내 하나뿐인 동생이었다고, 후는 말을 꺼내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는 너를 대신할 수 없었어. 네가 떠오를 때마다 지옥 같은 기억들이 하나씩 되살아났어. 며칠 동안 밖을 내다보며 생각했지. 끝내자. 언니에게 모든 걸 털어놓고 떠나자. 나는 그러면 언니가 당장 날 내칠 줄 알았거든? 그런데 고민하더라고. 네가 떠나고 하루에도 몇 통씩 전화가 계속 걸려왔었어. 언니는 뭣 때문인지 절대 받지 않았어. 벨소리가 너무 거슬려서 내가 수화기를 들었다 놓으려고만 해도 소리칠 정도로 날카로웠어. 그런데 내 이야길 듣더니 드디어 걸려오던 전화를 받는 거야. 통화를 하던 언니의 표정이 달라졌어. 그리고는 내게 손짓하더니 쪽지 하나를 주는 거야. 거기 너희 집 주소가 쓰여 있었지. '후를 데려와. 빨리.'라는 메모와 함께. 나는 상황이 변한걸 눈치챘어. 사냥개로 키워지던 사람이니까 그런 쪽으로는 내가 또 민감하잖아? 언니도 짐작하고 나를 보낸 걸 거야."


여기까지 말한 소명은 쏟아내던 것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모든 것을 체념한 표정이다. 한편으로는 후련함마저 맴돈다. 어떤 일이 생기든 받아들이자, 그런 마음인 걸까?


"지금 상황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래도 다행이야. 조금만 더 늦었으면... 하... 생각도 하기 싫다. 좋든 싫든 어서 가자. 언니를 만나는 게 우선이야. 이 근처라고 했는데..."


저쪽에서 선명이 손을 흔드는 모습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