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화가 끝난 후 선명은 조박사가 여전히 꼭두각시라는 걸 직감했다. 그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아니, 못했다. 자신만의 세상에 빠져 살았고 교만과 아집으로 가득 차 있었다. 늘 스스로를 대단한 존재로 착각했다. 자신이 저평가된 우량주라며 타인의 안목을 폄훼하는 게 그의 일상이었다.
선명은 조박사의 장담에도 불구하고 연구소에서 자신의 역할은 이미 끝났음을 진작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그녀는 가장 적극적으로 연구에 협력했던 참가자 중 하나였다. 가장 성실하게 협조하는 참가자를 연구원으로 발탁한다는 조건부 약속을 액면 그대로 믿었던 순진함이 컸다. 하지만 선명에게서 필요한 데이터를 모두 빼낸 연구소 측은 태도를 완전히 바꿨다. 선명이 희망을 완전히 내려놓은 것도, 모든 것을 걸고, 무슨 수를 써서든 연구소를 벗어나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랬던 그들이, 나와 후를 동시에 불러들인다고? 앞뒤가 맞지 않았다. 후의 위치가 파악되고 부모와 협상이 끝났을 시점에 이미 조박사의 이용가치는 상실되었을 거야. 그는 이미 소장의 눈 밖에 나있을지도 몰라. 버리는 장기말 같은 거지. 일임 어쩌고 하는 말은 그저 조박사의 눈을 가리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고, 방해거리에 불과한 선명과 조박사를 동시에 처리하려는 걸지도 몰랐다.
선명이 서둘러 소명을 보냈던 것도 같은 이유였다. 조박사가 칩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을 때부터 선명은 소명이 훈련받은 아이임을 눈치챘다. 그게 아니면 이런 데 동원될 까닭이 없었다. 소명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와 조박사가 꺼낸 이야기는 적잖이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두 사람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한 가지는 분명해 보였다. 그들에게는 나도, 후도 크게 필요 없다는 것. 그들이 후를 데려가면 미진한 연구분야에 재료처럼 쓰이다가 얼마 못 가 폐기 처분되겠지. 예전에 보았던 숱한 아이들처럼.
아파트를 돌아 나오던 선명은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고 출입통제를 알리는 노란 테이프가 둘러쳐진 현장을 본다. 핏자국이 흥건한 모습에 놀라지만 다행히 아이들은 보이지 않는다. 걸음을 옮겨 약속 장소로 향하던 선명의 눈에 소명과 후의 모습이 들어온다. 몇 군데 타박상과 찢어진 흔적은 있지만 생명이 위급할 정도는 아닌 것 같다. 후는 생각에 잠겨 있다. 상황을 이해해보려는 중이겠지. 선명은 말없이 두 사람을 차에 태운다.
뒷좌석에 앉은 후가 선명에게 말을 건넨다.
"누나, 이제 어디로 갈 거야?"
평소 목소리 그대로다. 별다른 감정이 묻어있지 않다. 선명은 후의 아무렇지 않은 목소리가 신경 쓰인다.
"집에 있을 순 없으니 다른 곳을 찾아야겠지?"
"다른 곳?"
"응, 다른 곳."
후는 물끄러미 창밖을 내다본다.
"누나."
"왜?"
그의 부름이 심상치 않다.
"나 방금 같은 차를 봤어. 완전히 찌그러진 채로 견인돼 가더라고."
선명은 불안을 떨치려는 듯 애써 밝게 대답한다.
"기시감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너답지 않게. 이제 좋은 일만..."
"나다운 게 뭔데?"
선명은 입을 다문다. 후는 여전히 창 밖에 시선을 둔 채로 말을 잇는다.
"나는 저 차가 나 같아. 다 부서져서 남에게 끌려가는 차."
선명은 후를 달래 본다.
"후야. 잠깐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있긴 했지? 일단 눈 좀 붙여. 잠깐 자고 일어나면..."
"자고 일어나면, 그럼 이 모든 게 꿈처럼 사라질 수 있는 거야?"
선명은 가슴 한쪽이 쿵 하고 내려앉는 것 같았다. 후의 다음 말이 들리지 않길 바랬다.
"연구소로 데려다줘. 누난 거기가 어딘지 알잖아. 나 그냥 그리로 가고 싶어."
선명은 운전대를 부여잡은 채 말이 없다.
"쫓기는 것도 진저리나. 어차피 나 집으로 돌아갔었잖아. 저 덩치들... 아빠가 기어코 날 팔아넘겼다는 거 아냐?"
선명은 자기도 모르게 화나서 소리친다.
"너는 거기가 어떤 곳인지 몰라서 그래. 거긴 사람 살 곳이 못돼. 그냥 생지옥이라고!"
"알아. 소명이에게 대충 들었어. 근데 누나 그거 알아?"
선명이 흠칫하며 되물으려다 멈춘다.
"어차피 돌아간 집도 지옥이었어. 아무도 없는 지옥. 누나 곁이 아니면 어디든 똑같아."
"그러니까, 누나랑 같이..."
후는 듣지 않는다.
"아니, 이제 싫어.
후의 입술이 용접된 철판처럼 다물어졌다가 벌어진다.
"부탁이 있어."
"..."
"소명인 돌려보내지 마. 해줄 수 있지?"
이번에는 선명이 대답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