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32

통화

by 작가 전우형

선명은 그저 운전에 집중한다. 후도 더 이상 아무 말 않는다. 소명은 뭔가 말을 하고싶은 눈치나 차마 입을 떼지 못한다. 그렇게 세 사람에게는 피아노 단조같은 어색함만 흐른다. 떠나려는 아이를 붙잡는 엄마의 심정이 이러할까? 선명은 마음이 복잡하다. 나만 믿으라며 해결해 줄 자신이 없다. 오히려 상황을 가장 명확하게 보는 사람은 후였으니. 하지만 선명은 자기 스스로는 도저히 이 아이를 놓아줄 자신이 없다. 마치 키울 자신이 없는 부모가 고아원 앞에 아이 버리듯 그렇게, 연구소에 후를 두고 떠날 수 없다. 그런 자신을 책망하며 살아갈 자신이 없다. 아이는 자꾸만 자신을 버리라 한다.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도망치라 한다. 그런 말도 안되는 요청을 단칼에 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밉다. 너무 빨리 철든 아이의 힘든 결정을 되돌릴 패가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다. 후는 그렇게 우두커니 서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겠지. 더 이상 보이지 않을때까지. 그리고 그때 그 순간을 영원히 기억하겠지. 나는 끝내 어떤 거울도 바라보지 못하겠지. 거울이란 거울을 볼 때마다 덩그러니 세상 앞에 홀로 선 그 아이의 모습이 떠오를테니까. 재회는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짧은 만남 뒤에 찾아올 이 헤어짐은 누구의 탓일까. 아니면 그저 조악한 노질만으로는 흐르는 강물을 거스를 수 없기 때문일까.


요란하게 벨소리가 그녀의 상념을 밀어낸다. 선명은 잠시 핸드폰을 무심히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는다. 조박사다.

"네. 안 그래도 저도 전화하려던 참이었는데... 다른 사람들이 먼저 왔었대요... 네... 그런데 어차피 연구소 사람이면 누가 데려가든 상관없지 않나요?.... 후를 꼭 제가 데려가야 할 이유라도 있어요?"

선명은 은근슬쩍 블루투스를 연결했다. 조박사의 목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모두에게 들렸다. 선명은 검지를 들어 입술에 갖다 댔다. 후와 소명은 호기심어린 눈길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끄덕인다.


"알잖아. 그런 아이들은 말 몇 마디면 사람 바보로 만드는 거. 너처럼 말이야."

"뭐야. 자신만만하더니. 그 칩, 그거만 있으면 우릴 허수아비로 만들 수 있다면서요? 역시 거짓말이었던 거죠? 아직 못 만든 거 아녜요?"

"아니, 그게 아니고..."

조박사는 낮은 한숨을 내쉰 뒤 혀를 찼다.

"칩은 아직 시제품이라 1개밖에 안 만들었어. 그걸 그 아이에게 달아준 거고."

소명과 후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선명은 룸미러로 두 아이의 반응을 보며 말을 이었다.

"시간은 충분했을 텐데요? 소명이가 우리집에 온지 벌써 2년도 더 된걸요?"

"그게... 그 칩은 너희한테밖에 효과가 없어. 그러니까 더 이상의 수요는 없었다고. 개량 중이야 지금은. 일반인들에게도 쓸 수 있게."

"그럼 뭘 믿고 소장이 당신을 속인 걸까요?"

"아무래도... 내가 아이를 잘못 골랐던 모양이야. 그 소명이라는 아이. 소장 손녀딸이었나 봐. 소장이 화가 잔뜩 나 있더라고. 그동안은 능구렁이처럼 티도 안내더니... 혹시 그 애도 같이 있어?"

선명은 힐끔 뒷좌석에 앉은 소명을 바라보고 대답했다.

"왜요? 아직 연구소로 안 돌아왔나 보죠?"

조박사의 목소리는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하... 원래는 돌아올 필요가 없었지. 솔직히 그렇게 오래 지낼 거라곤 생각도 못 했고."

"그럼 칩은요? 칩 회수는 어떻게 할 생각이었어요?"

"그야 뭐... 데이터가 있으니 생산하는 데는 아무 문제가 없어. 너희에게 쓰려고 내가 손 본 거라 이제 쓸모도 없고... 젠장, 아무튼 이제 그 아일 데려와야 되게 생겼어. 혹시 짐작갈만한데 없어?"

"글쎄요. 제 발로 뛰쳐나간 아이가 어딜 갔는지 제가 어떻게 알겠어요. 그보다, 후는 이제 어떡할 거예요?"

"후? 아... 승원이 말하는 거지? 거참, 헷갈리게. 그 아이 집에 갔을 때 확실히 없었어? 잠깐.... 아까 왔었대요,라고 했잖아...? 지금 같이 있지? 응?!"

쓸데없는 눈치 하나는 비상한 사람이었다. 선명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일그러졌다.

"같이 있구만, 그렇지?? 귀신을 속이려고 해."

'귀신은 무슨. 바보 천치 같으니라고.'

"아니에요. 저도 근처를 돌아보는 중이긴 한데 아직 못 찾았다고요."

"정말이야?"

한 번 의심이 시작된 그를 속이긴 어렵다. 선명은 아쉬움을 삼키며 다음 말을 생각했다.

"하... 그런 눈치, 다른 데나 좀 쓰지 그러셨어요. 네, 후는 지금 같이 있어요. 아슬아슬하게 탈출해 왔더군요."

"천만 다행이군. 일단 그 애부터 연구소로 데려와."

"저도 그러려고 했는데, 지금은 마음이 바뀌었어요. 당장 칩이 있는 것도 아니라면서요? 후도 가기 싫데요."

동시에 선명은 나서려는 후를 손을 내저으며 제지한다.

"네가 그 아이 부모쯤 되는 줄 착각하나 본데. 너는 법적으로 아무 권한도 없어. 그 아이 아빠가 이미 우리에게 아이를 보내기로 계약을 마쳤다고. 지금 그거 납치야."

"흥! 말같잖은 소리 작작 해요. 법? 당신네들이 법에 가장 취약한 사람들 아냐? 그리고, 누가 아이 팔아넘긴 걸 법적으로 보호해준대요? 그 계약자체가 엉터릴텐데!?"

"오해 마. 널 납치범으로 신고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고 그 아이 아버지니까."

"맘대로 하세요."

"야! 너...."

선명은 전화를 끊어버린다. 뒤에서 후와 소명이 막혔던 숨을 내쉰다.

"푸하... 혹시 들릴까 봐, 숨 참느라 힘들었어요."

"이제 어쩔까?"

선명이 두 사람에게 묻는다.

"소명아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우리 그냥 도망쳐요."

"나도 마음이야 굴뚝같지만... 어디로 도망치면 그들에게서 벗어날 수 있을지..."

벨소리가 다시 울린다. 조박사다. 선명은 전화기를 꺼버린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가 않단다.'

문득 소명이 굳은 결심이 서린 눈으로 말한다.

"그럼, 제가 돌아가서 말해볼게요. 전화에서 그랬잖아요. 제가 소장 손녀라고. 그럼 되지 않을까요? 언니, 그 아저씨한테 전화해서 나랑 같이 있다고 하세요."

맞아. 저 아이가 소장 손녀라고 했지?

"소명아, 지금 너 몇 살이지?"

"열 살... 아니 열넷이요... 왜요?"

소명은 말 끝을 살짝 흐리며 눈치를 살핀다. 그동안 속인 것이 미안한 탓이다. 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선명 역시 괘념치 않는다. 아니, 그보다 다른 것에 온 신경이 쏠린 분위기다. 소명은 티나지 않게 가슴을 쓸어내린다.

"열넷이라..."

그러고보니 잠깐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소명의 분위기는 한껏 달라져 있다. 그래서일까? 선명은 달라진 소명의 모습에서 잊어버린 줄 알았던 한 사람이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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