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33

선명과 미진

by 작가 전우형

그녀는 선명의 곁을 맴돌았다. 그녀가 가진 인력이 선명의 마음을 밀물처럼 이끌었다. 선명은 불편하면서도 내심 기대했다. 그녀가 보이지 않는 날이면 괜스레 걱정까지 되곤 했으며 길을 가다가도 종종 주위를 힐끔거리며 돌아볼 때도 있었다. 언젠가부터 선명은 자신의 방에 타인의 흔적이 조금씩 남아있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개의치 않았다. 방은 가끔 스쳐 지나가는 곳일 뿐이었다. 그 조악한 공간에 아무런 욕심도 애정도 없었다. 선명을 비롯한 대부분의 아이들은 며칠씩 연구실로 끌려가 돌아오지 않았다. 가끔 영영 다시 보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누구도 그에 대해 문제 삼는 사람이 없었다.


선명이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익숙하고도 낯선 천장이었다. 왜 내가 누워있는 걸까. 어떻게 돌아온 걸까.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았다. 헝클어진 실타래처럼 뒤엉킨 생각들을 미처 정리하기도 전에 다시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방을 떠나야만 했다. 곳곳에 카메라가 달린 그 방은 그저 무늬만 다른 연구실이나 다름없었다. 선명은 가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정말 내 방이 맞긴 한 걸까? 내 방과 똑같이 만들어 둔 실험실이나 꿈속은 아닐까? 그런 불안들이 시시때때로 문을 두드렸다. 도돌이표 같은 불안과 의심이 선명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문을 열어보기 전에는 불안이 잦아들지 않았다. '1236호'라고 쓰인 그 문. 아무 의미 없는 네 자리 숫자. 그것만이 일정 부분 통째로 사라진 기억의 시간 속에서 현재의 좌표를 확인시켜주는 것 같았다.


실험은 짧게는 며칠, 길게는 몇 달까지도 이어졌다. 선명은 그저 긴 잠을 자고 깨어난 느낌이었다. 거울에 비친 모습이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계절이나 연도가 달라져 있기도 했지만 선명은 특별한 위화감은 느끼지 못했다. 대조군이 없어서였을까? 잠들기 전 자신의 모습도, 그때가 언제였는지도 기억에 없었다. 긴 시간 동안 나는 어떤 상태였을까? 어디까지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꿈이었을까? 지금 나는 꿈에서 깨어난 것일까, 아니면 또 다른 꿈을 꾸고 있는 걸까? 가끔 자는 사람은 하지 않을 고민들 때문에 선명은 두려웠지만 나중에는 그마저도 희석되고 없었다. 오랜 시간 많은 일이 있었을 것 같은 '느낌'은 있는데 마치 그 부분만 숟가락으로 퍼낸 듯 어떤 기억도, 증거도 남아있지 않았다. '느낌'이나 '직감'이 증거로서의 효력을 갖지 못하는 건 바깥세상이나 실험실에서나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실험쥐처럼 살아가던 어느 날, 선명은 늘 비어있던 자신의 방에 낯선 소녀가 앉아 흥얼거리는 모습을 마주한다.


1236호, 12시 36분, 12월 36일... 아니, 이건 안되네. 1236년. 오, 이건 되겠다.


언젠가 자신을 따라다녔던 그 아이였다. 한동안 보지 못했었는데. 예전 같으면 반가웠을 수도 있는데 그날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토킹은 자유지만 다른 사람의 방까지 들어와 있는 건 너무한 거 아냐?!


"누구야 너! 뭔데 내 방까지 쳐들어온 거야?"

"내... 방?"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선명을 바라보았다. 선명은 그녀의 반응에 순간적으로 말을 잃는다. 왜 놀라거나 움츠러들지 않고 의아한 표정이지? 당황스러움도 잠시, 반가운 기색으로 일어선 그녀는 선명에게로 다가온다.

"뭐야?! 너도 이 방 쓴 거였어?"

"너... 도?!"

"나 이 방 쓴 지 2년도 더 됐는데? 여기 붙어있잖아."

미진은 손가락으로 책상 한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임미진'


그녀는 한껏 들뜬 분위기다. 마치 쇼윈도에서 한참을 바라보며 갈망하던 옷이 어느 날 자기 방 옷장에 떡하니 걸려있는 것처럼.

"룸메이트였다니... 그래서 어쩐지 낯익었던 거였구나."

그녀는 이제야 알겠다는 얼굴로 환하게 웃었다. 얼떨떨한 얼굴의 선명에게 미진은 손을 내밀며 악수를 청한다.

"반가워. 우리 2년 만에 처음 인사하네. 임미진이라고 해. 넌?"

"선명, 이선명..."


웃는 모습이 아름다웠다. 같은 여자가 봐도 반할 정도로. 선명은 미진을 바라볼 때면 우울이 한순간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통성명을 하고 한참 동안 얼굴조차 보지 못했지만 선명은 철저히 혼자라고 여겼던 그곳에서 누군가를 기다리는 마음을 알았다. 그리움과 설렘이 선명을 버티게 해 주었다. 처음엔 미진이 그저 웃음이 많은 아이인 줄 알았다. 하지만 선명은 그녀의 웃음 뒤에 숨겨진 우울이 보였다. 웃음소리와 겹쳐 들리는 울음소리가 선명의 마음 한구석을 아릿할 정도로 아프게 했다.


선명은 뒤늦게 미진이 약에 취한 걸 알았지만 놀라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라도 웃을 수 있다면, 이런 지옥에서 그깟 일탈로 잠깐이라도 행복할 수 있다면. 선명은 차라리 그런 미진이 부럽기까지 했다. 자신은 그럴 깜냥도 없었으니까. 선명에게는 미진이 벽을 넘어 날아가는 새처럼 자유롭고 강해 보였다. 미진이 연구소장의 딸이라는 걸 안 건 그로부터 3년이 더 흐른 뒤였다. 그때서야 깨달았다. 웃음소리 뒤에 늘 들려오던 눈물의 출처를. 하지만 선명은 물을 수 없었다. 악의 없는 호기심이 누군가의 상처를 죽도록 아프게 들쑤신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질문은 잦아들지 않았다. 어째서 소장의 딸이 이런 데 와 있을까? 같은 질문을 백 번쯤 삼켰을 때 그녀가 먼저 말을 꺼냈다.


뭐 어려운 질문이라고, 가 그녀의 첫마디였다. 하긴 궁금하긴 했겠지. 나라도 그랬을 테니까. 그냥... 어떤 아빠는 남보다 못해. 그게 이유야.


선명은 그 말을 이해해보기 위해 있지도 않은 아빠를 상상해보곤 했다. 얼굴 없는 아빠는 그 길고 튼튼한 팔로 선명을 하늘 끝까지 들어주곤 했다. 구름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고 발은 땅 위에 동동 떠다녔다. 그러다 아빠는 갑자기 날아올랐고 선명은 그의 손에 이끌려 하늘로 끊임없이 치솟았다. 까마득한 높이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무섭지만 아름다웠다. 흥분과 긴장으로 넋이 빠져 사방을 둘러보는데 어느새 아빠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부터 사정없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고 피가 정수리와 등가죽, 손끝과 발끝으로 몰려 아프고 따끔거렸다. 세찬 바람에 눈도 뜰 수 없는데 이상하게도 바닥이 가까워지는 것은 보였다.


선명은 까무러치기 직전에야 잠에서 깼다. 온몸에 땀이 흥건한 채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하긴, 있다가 없을 아빠라면 처음부터 없는 게 나을지도. 그래도 한 번쯤은, 그런 아빠라도 있어봤으면 하는 생각은 여전했다. 하지만 선명은 그때부터 미진이 더 이상 부럽지 않았다. 소장의 딸이면 뭐해. 아니, 대통령의 딸이면 뭐해. 여길 벗어날 수도, 자유롭게 누굴 만날 수도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니 자신의 처지가 더 절망적으로 느껴졌다. 소장 딸도 이런 실험에 동원되는 판에, 나처럼 연고도 없는 아이의 운명이야 뻔한 거겠지?


연구소 내에는 향정신성의약품들이 잔뜩 있었다. 유토피아 재단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이유가 구하기 어려운 향정신성의약품들을 빼돌리기 위해서라는 말도 있을 정도였다. 분명 출입이 통제되는 장소에 보관되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손댈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정도 힘 있는 사람들은 다들 알음알음으로 꺼내 썼고 재고 파악이나 소비 보고도 허점 투성이었다. 약물에 손대는 것이 발각되어도 불문에 붙이는 것이 관행처럼 굳어있었다. 어차피 정상인채로는 살아갈 수 없는 곳이었다. 부모 곁을 떠나 끝도 없이 생체실험을 당하는 아이들이나, 그런 아이들을 상대하는 연구원들이나 인간의 존엄, 약물 오남용 같은 고차원적인 문제를 고려하고 따질 형편이 못 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저 하루하루를 미치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최선을 다할 뿐이었다. 나름 귀한 대접을 받던 미진이 지금과 같은 현실을 버텨내려면 세상이 허락한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재고 따질 형편이 아니었을 것이다.


한 사람의 정신세계는 튼튼한 것 같으면서도 물러서 잘 버티는 듯하다가도 한 순간에 무너지고 만다. 부풀어 오르다 어느 순간 펑하고 터져버리는 풍선처럼. 약물에 중독된 미진은 언제 분화할지 모르는 화산처럼 변해있었다. 아름다웠던 웃음도 마귀처럼 일그러져 있었고 극도의 흥분과 한없는 우울의 온탕 냉탕을 오가느라 제정신이 아닐 때가 많았다. 그녀는 약을 마지막 잠금장치로 여겼다. 그게 없으면 자신은 더 이상 살 수 없을 거라고. 선명은 그녀가 아슬아슬했지만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누가 그녀를 탓할 수 있을까? 팔다리가 잘린 병사에게 모르핀 투약이 허락되는 것처럼 그녀에게 약이 주는 잠깐의 위안은 고통을 잠깐이나마 밀어내어주는 마지막 햇살 같았다.


연구소를 도망쳐 나오고 이듬해쯤이었나, 그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상상도 못 한 일이었지만 선명은 놀라지 않았다. 세상엔 어떤 일도 벌어질 수 있지, 그 정도쯤으로 생각했다. 문득 궁금했었다. 아빠는 누구였을까? 약은 끊었을까?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뿐이었다. 묻지 않아도 답을 알 것 같은 질문들이 있다. 아이는 엄마의 팔자를 닮는다지. 분명 그 아이도 아빠가 있었겠지. 남보다 못한 아빠가. 그녀가 약을 끊었는지는... 선명은 소명을 본다. 결국 그녀는 죽은 것이다. 그녀가 멀쩡했다면 저 아이가 여기까지 올 일도 없었겠지. 부모 없는 아이의 삶은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가혹한가 보다.


그나저나, 이제 어떻게 할까?

어떻게 하면 나와 이 아이들 모두 그 지긋지긋한 곳으로부터 도망칠 수 있을까?


그때 거대한 충격이 모두를 덮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