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 25

카운터 펀치

by 작가 전우형

마치 원래부터 사람이 살지 않았던 것처럼 개미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사방이 고요하다. 어쩌면 지금 이 집은 예전보다 조금은 덜 외로울지도 모른다. 한 사람이라도 곁을 지켜주고 있으니. 하지만 집은 함께 머무는 사람의 입장을 전혀 배려해주지 않았다. 집은 끊임없이 말을 걸어준다고, 집안 구석구석에 머물던 추억들이 못다 한 이야기를 풀어내느라 조용할 틈이 없을 거라고, 분명히 누나가 그랬는데, 그런데 이 집은 조용하기만 했다. 후에게 이 공간은 너무나 낯설었다. 하다못해 벽지 한쪽에 낙서 자국이라도 남아있었다면 착각 비슷한 추억이라도 떠올려보려 노력해보았을 텐데 집은 너무나 깨끗했고 인간의 흔적이라고는 남아있지 않았다. 마치 예전에도 지금도 늘 혼자였던 것처럼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하고 있었다. 후는 그 세상에 단 한 발자국도 들여놓고 싶지 않았다. 그 세상에 발을 들여놓는 순간 세숫대야에 풀어진 물감처럼 원래의 색은 잊어버리고 거뭇거뭇하고 혼탁한 구정물만 남을 것 같았다.


아빠를 따라 억지로 돌아온 공간이 따뜻할 거라고는 짐작하지 않았다. 하지만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면 긴 시간을 건너뛴 이후라도 좁쌀만 한 익숙함 정도는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정도, 관계도 익숙함의 씨앗에서 싹트는 거니까. 하지만 후는 아무리 기억을 되돌려봐도 자라났던 공간을 전혀 기억해낼 수 없었다. 0세에서 5세까지 인생의 폴더가 통째로 삭제된 것처럼 선명을 만나기 전의 기억들은 사소한 것 하나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싫은 소리가 고막을 찌르던 날카로운 통증만 조각조각 남아 마음 곳곳에 박혀 있을 뿐이었다.


후는 우두커니 앉아 시간을 확인한다. 아빠가 집을 나선 지 만 이틀이 지나고 있었다. 아빠가 그리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선명을 만난 이후 후는 이토록 긴 48시간을 살아본 적이 없었다. 내심 돌아가고 싶었다. 이름을 지어준 곳도, 다시 태어난 곳도 선명의 품 속이었다. 머물던 어제의 따스함은 차가운 현재를 밀어내 주지 못했다. 그 온기를 그리워할수록 오늘은 더욱 얼음장처럼 식어가기만 했다. 미래를 모르는 건 축복이라고 했는데, 그건 자신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 같았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현실이 후는 너무 답답하기만 했다. 그저 기다리는 일은 굉장한 인내심을 필요로 했고, 이제 그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후는 아빠에게 전화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확인했지만 전화번호조차 없었다. 그 무신경한 아빠라는 사람은 아이를 혼자 두고 떠나면서도 연락할 방법 하나 알려주지 않았다. 그게 지금의 내 처지겠지. 기대가 없으면 실망도 없는 법이었다. 후는 그저 이 순간이 빨리 흘러가버렸으면 하고 바랄 뿐이었다. 분명 어딘가로 데려가려는 눈치였는데 왜 아무 연락도 없는 걸까?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후는 놀라기보다 오히려 반가웠다. 벨소리와 함께 현관문 밖에서 여자의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선명은 스마트폰에 걸려온 전화를 잠시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가 고민에 빠진다. 그 속에는 애증과 그리움이 함께 묻어있다. 선명이 세상에서 유일하게 죄책감을 느꼈던 상대였다. 절규라는 이름의 바보 같은 남자. 이름과 달리 언제나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던 남자. 이름과 행동 사이의 괴리가 가장 컸던 남자. 그는 과연 내가 떠나버린 후 속 시원하게 울긴 했을까? 아마도 그 바보는 그때도 큭큭거리며 웃기만 했을 것이다. 자신의 한심함을 곱씹으며.


나는 웃음 뒤에 숨겨진 그의 슬픔을 보았다. 덜컥 내게 탈출시켜줄 테니 함께 살자고 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게 정말 진심이었다는 것도. 정말 그렇게 할까 고민도 했었지. 나는 그의 마음을 알고 있었고 그 또한 굳이 숨기려 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연구소에서 우릴 가만둘 리 없었어. 특히 그와 함께 있는 한 숨을 거두기 전까지 늘 쫓기는 신세로 남을 수밖에 없었어.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그래, 내가 어디 있는지 몰라서 찾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어. 15년 동안 그는 어떻게 변했을까? 어떤 마음으로 나에 대한 원한을 곱씹어 왔을까? 그때 그는 37살이었지. 이제는 내가 그 나이가 되었어. 우리 사이에 무슨 할 말이 더 남아있을까? 선명은 떨리는 손길로 통화버튼을 누른다.


"왜 전화한 거죠?"

"직원이 아무리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길래."

"내가 연구소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을 거라고 생각했나요?"

"궁금해서라도 한 번쯤은 받아볼 거라 생각했어. 네가 보호하던 아이에 대한 소식, 안 그래? 너라면 충분히 그 아이의 미래를 알고 있었을 테니까."


선명은 조박사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나는 그저 후를 보호하려 했을 뿐이야. 선명의 마음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그 마음이 얼마나 진심인지 스스로도 확신할 수 없었다. 외통수에 당했을 때처럼 앞날을 뻔히 알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는 것들이 있다. 인생에서는 장기알을 던질 수도 판을 엎어버릴 수도 없다. 조박사는 그녀의 침묵을 괘념치 않는 듯 태연하게 말을 이어갔다.


"요점부터 말할게. 너도 나와 오래 말하고 싶지 않을 테니. 그 아이, 승원이라고 했던가? 아버지가 그 아이를 우리 연구소에 맡기기로 했어. 계약절차는 마무리되었고 이제 아이를 데려오는 일만 남았지."

"그래서요?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죠?"

"네가 그 아이를 연구소로 데려와 줬으면 해."

"내가 정말 그 일을 할 거라고 생각해서 말하는 건 아니죠?"

"예전이나 지금이나 넌 정말 눈치가 빨라. 항상 그렇게 상대방의 의중을 앞서 나가곤 했지. 하지만 이번엔 틀렸어. 너는 그 아이의 일을 마무리 지어야만 할 거야."


선명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았다. 조박사는 말을 허투루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저 정도로 확신을 갖고 말한다는 건 선명이 거절할 수 없는 확실한 패를 쥐고 있음을 의미했다. 하지만 짐작 가는 바가 없었다. 선명은 상대방의 패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이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불편했다.


"승원이가 데려왔던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한 명 있었을 거야. 어쩌면 지금 네 옆에 있을지도 모르지."

선명은 자기도 모르게 소명이 있던 곳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지금 아무도 없었다.

"왜? 보이지 않나? 그래도 인사는 하고 오라고 했는데. 아직 인간관계에는 서툰 나이라서 말이야."

"당신, 소명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소명? 아... 그 여자아이 이름이 소명이 되었나? 하긴, 어차피 이름이 없던 아이였으니 적절한 이름을 하나 붙이는 것도 괜찮았겠군. 난 그 아이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어. 그 아이는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스스로 찾아냈을 뿐이야. 영특한 아이지. 마치 예전의 너처럼."

해야 할 일을 찾아냈다... 라. 그가 소명을 보낸 거라는 말일까?

"머리 좋은 너라면 이미 추측에 들어갔겠지만... 맞아. 그 아이는 네가 스스로 승원이를 보내주도록 하기 위해 우리가 보낸 아이야. 아니지, '보냈다'는 말은 적절치 않군. 그저 우연한 시기에 그 아이가 도망치는 걸 막지 못했을 뿐이라고 하는 게 어울리겠어."


선명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내가 후를 스스로 보내도록 하기 위해?'라는 질문이 머릿속을 빙글빙글 돌며 끊임없이 선회했다. 선택을 되돌아볼 때 흔히 벌어지는 일이었다. 합리와 이성 외에 언제 어떻게 타인의 의도가 끼어들었던 걸까? 조박사의 목소리가 그녀의 질문 사이에 새치기하듯 밀려들어왔다. 목소리에는 약간의 흥겨움마저 묻어있었다.


"그 아이는 너에 대한 십수 년간의 연구 데이터를 토대로 완성된 아이야. 네가 연구소를 탈출한 후 너와 같은 아이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지만 불가능한 일이었어. 상대방의 마음을 완벽하게 알아맞히는 건 너처럼 신에게 선택받거나 아니면 신에게 버림받은 사람들만 가능한 일이야. 나는 방향을 조금 틀기로 했지."


선명은 그 말을 듣자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는 이번 일을 꽤 오래 준비해온 것 같았다. 그에 반해 자신은 현재 상황에 대한 아무런 분석도 준비도 되어있지 않았다. 질게 뻔한 게임이었고 한쪽이 너무 불리해 역전이 불가능한 전투였다. 피해를 최대한 줄이며 퇴각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너무 멀리 나는 새는 분하지도 않은 법이다. 그녀는 조박사의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그 아이, 조금 특별하지 않던가? 보기 드물게 순수하고 깨끗한 아이지. 그 아이는 속마음이랄 게 따로 없어. 마음과 언어 사이에 종이 한 장만큼의 벽도 없어서 특별히 마음을 들여다볼 필요도 없이 1 급수처럼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아이야. 아마도 그런 점이 너희처럼 위선에 질린 사람에게 더 매력적이었을 테지."


후가 소명을 데려온 날이 떠올랐다. 후는 소명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자기가 '보증'할 수 있는 아이라고. 후와 함께 했던 5년 동안 후가 누군가를 데려온 것도 처음이었고 그토록 확신에 찬 어조로 누군가를 변호했던 일도 처음이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조박사의 '확신'을 설명하기 충분치 않았다.


"그래서요? 소명이 당신이 의도적으로 우리에게 '흘려'보낸 아이고, 나와 후에게 호감을 얻을만한 아이라고 쳐요. 하지만 소명이 함께 살게 된 것과 내가 결과적으로 후를 부모 품으로 돌려보낸 것과 무슨 관계가 있죠?"

"그 부분이 바로 관전 포인트야. 나도 신제품을 테스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나는 너를 연구하면서 다른 사람은 쓰지 않는 독특한 뇌파를 사용한다는 것을 밝혀냈어. 너는 지극히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존재야. 논리와 이성을 바탕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공감하고 추론하고는 그 결과를 상대방의 속마음과 비교하지. 그때 순간적으로 흘러나오는 뇌파가 있어. 나는 쓸모없는 칩 하나를 개발해서 그 아이의 몸속에 심었지. 특별한 기능은 없어. 다만 그 뇌파에 반응해서 너희가 추론한 결과를 해석하고 증폭해서 되돌려주는 역할을 할 뿐이야. 너희는 소명의 속마음을 전혀 알지 못해. 너희가 소명에게서 읽을 수 있는 건 너희가 추론한 결과의 반영일 뿐이야. 그건 실제 그 아이의 마음과는 아무 관련이 없어."


선명은 쇠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처럼 멍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네가 그 '후'라고 부르는 아이, 아마도 네 마음은 읽을 수 없겠지? 아직 영글지 못한 그 아이의 뇌파는 너를 이길 수 없을 테니까. 그 아이가 너와 함께 있을 수 있었던 이유겠지. 하지만 그 아이는 분명 소명을 만났을 때 어떤 소리를 들었을 거야. 그리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그 아이를 데려왔겠지. 그 아이가 느끼는 두려움과 허기, 외로움, 절망, 울음소리 같은 것들을 안타까워하면서 말이야. 그렇지 않나? 너도 대략은 알고 있었을 텐데?"


선명은 이제 상황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후는 소명을 보며 마치 자신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도저히 두고 올 수 없었다고. 하지만 소명이 후를 대하는 태도 또한 거짓이 없어 보였다. 두 아이는 분명 어린 나이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서로를 아꼈다. 마치 그 사랑은 어른의 그것 같았다.


"너는 너대로 소명을 걱정스러워했을 거야. 아직 영글지 않은 자아가 누군가와 감당할 수 없는 사랑에 빠지면 그를 동일시하게 되고 스스로마저 흔들리게 되지. 그리고 너는 승원이 같은 아이가 타인을 어떤 식으로 조종할 수 있는지도 잘 알고 있어. 이미 네가 예전에 수차례 해왔던 것처럼."


선명은 순간 그의 음성에 섬뜩한 원한이 묻어있는 것을 느꼈다. '네가 수차례 해왔던 것처럼'. 그 일련의 과정들 속에서 가장 고통받은 이가 바로 조박사였으니까. 그는 자신이 받았던 방식 그대로 내게 되돌려주고 싶은 것이 분명했다.

"너는 너의 그런 불안 그대로를 그 여자아이에게서 읽었겠지? 그렇지 않나?"

분했다. 모든 것이 그의 의도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분함이 선명의 입을 다물게 했다. 하지만 조박사는 그런 그녀의 속내를 바로 앞에서 보고 있는 것처럼 말을 이어나갔다.


"내가 이토록 자세하게 말해주는 이유가 궁금할 테지. 이제 제안을 말하지. 승원이를 데리고 연구소로 돌아와. 그 아이에 대한 연구를 네게 일임하지. 이미 소장님의 허락도 받아뒀어. 지난 일은 모두 잊고 우리가 다시 힘을 합치는 거야. 네겐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을 거야. 첨언하자면 그 칩은 너희를 위해 제작되기도 했어. 너희가 듣기 싫어도 상대방의 마음을 듣고 마는 건 그 뇌파 때문이야. 칩을 심으면 뇌파를 흡수할 수 있어. 그럼 그 지긋지긋한 지옥으로부터도 해방될 수 있는 거야. 어때?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제안 아닌가?"


멈춰있던 선명의 머릿속이 다시 원활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단 후를 혼자 연구소로 보내지 않아도 되었다. 칩에 대한 내용은 매력적이었다. 그녀는 연구소를 떠나서도 늘 외로웠고 불안했다. 후를 만나기 전까지 그녀는 늘 혼자였다. 그리고 가까이하는 사람도 없었다. 한때는 진정으로 절규를 기다렸던 날도 있었다. 그가 자신을 찾아와 주기를.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라도 함께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소명에 대한 일도 궁금했다. 아직 구름이 걷히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그 일들을 안갯속에서 끄집어내려면 연구소로 돌아가는 방법뿐이었다. 선명은 그제야 조박사의 확신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제안은 분명 자신이 거절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후는 현관문 밖에서 들리는 그 목소리가 익숙한 것임을 눈치챘다. 소명의 목소리였다. 여기를 어떻게 알고 찾아왔을까? 반가움에 문을 열었을 때 그를 기다린 건 건장한 사내 둘이었다. 소명은 뒤로 물러섰고 후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후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묻어났다. 마치 '네가 왜 내게?'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후는 소명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미안하지만 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머릿속으로 내리 꽂히듯 들리는 목소리, 그를 늘 괴롭히던 그 목소리였다. 후는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들은 단순히 소명과 함께 온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소명을 인질로 붙잡고 있는 한 후는 그대로 따라가는 편이 이로웠다. '결국 아빠는 돌아오지 않았구나.' 어떤 관계에서는 절망도 사치였다. 소명을 볼모로 잡으라고 아빠가 그들에게 알려준 거겠지. 내 몸값으로 얼마를 받았을까. 후는 자신이 이제 무슨 일을 당할지 별로 궁금하지도 않아졌다. 그저 그는 묵묵히 건장한 두 사내를 따라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그 뒤를 소명이 그림자처럼 조용히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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