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흥민 선수 '10-10' 달성
2020년 7월 13일, 월요일 새벽. 토트넘과 아스널의 프리미어리그 경기가 있었다. 이 두 라이벌 팀의 경기는 '북런던 더비'라 불릴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지만 정작 토트넘은 상대팀 아스널과의 최근 몇 경기에서 승점을 획득한 적이 전무할 정도로 상대전적에서 밀리고 있었다. 시즌 종반이 가까워지는 지금, 두 팀의 승점 차이는 무척 미미했고, 이번 경기의 승패에 따라 리그 순위가 뒤바뀌는 것은 물론, 유로파 리그 출전 자격이 주어지는 7위 경쟁에서 한 발 앞서 나갈 수 있을 정도로 이번 경기는 양 팀 모두에게 중요한 경기였다. 이번 아스널전 뿐만 아니라 최근 리그 몇 경기에서 부진한 경기력으로 질타를 받아왔던 만큼 감독과 토트넘 팬들 뿐 아니라, 선수들에게도 승리에 대한 갈증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강렬했을 터였다. 그런 갈망을 보여주듯 토트넘의 초반 기세는 다른 경기에서와는 달리 공격적이었고 꽤 맹렬했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휘슬이 울리고, 양 팀 선수들은 전력으로 필드를 누비기 시작했다. 경기 초반의 흐름은 경기 전체의 분위기를 좌우하기도 하기 때문에 선취점을 어느 팀에서 가져가는지가 대단히 중요했다. 아스널의 수비들이 연거푸 몇 차례의 실책을 저질렀고 토트넘은 그 기회를 잘 살려 날카로운 공격을 이어나갔지만 번번이 상대팀 마르티네즈 골키퍼의 선방에 막혀 득점으로 연결되지는 못했다.
정작 고대했던 선취점은 아스널에서 먼저 터트렸다. 아스널의 공격수 라카제트의 발끝에서 출발한 중거리슛은 유성처럼 토트넘 좌측 상단의 니어 포스트를 파고들었고, 그곳은 공격수가 제대로 노릴 수만 있으면 골키퍼들이 결코 막을 수 없는 사각지대였다. 토트넘의 수문장 요리스가 몸을 날려보았지만 볼을 쳐낼 수는 없었다. 절대 막을 수 없는 완벽한 중거리슛. 그 골은 누군가의 실책이나 전략적 누수라기보다도 모두 멍하니 볼의 궤적을 쳐다볼 수밖에 없게 만드는 그런 원더골이었다. 이 골 한방으로 토트넘의 분위기는 찬물을 끼얹은 듯 가라앉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스포츠가 그렇듯이, 분위기는 경기력에 대단히 큰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아마도 스포츠를 행하는 주체가 인간이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은 끊임없이 변수가 생긴다는 점이다. 피지컬, 지적 능력, 기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거기에는 정신적인 부분이 비율로 곱 연산된다. 그래서 이와 같은 수식이 만들어진다.
피지컬이나 지적 능력치는 특별한 부상이나 병이 나지 않는 한 갑작스럽게 큰 폭으로 떨어지지는 않지만 멘탈은 인간의 무의식에 의존하기 때문에 순식간에 곤두박질치기도 한다. 물론 뛰어난 선수들일수록 멘탈관리 역시 갑이지만, 이미 고르고 골라진 최고의 선수들로 가득한 최상급 리그에서는 잠시의 망설임이나 약간의 긴장만으로도 치명적인 실책이 일어나며, 발군의 프로선수들은 이 한 번의 기회를 잘 놓치지 않는다.
그래서 기계에는 당연히 존재하는 ‘정격 성능’이라는 것이 운동선수들에게는 존재하지 않는다. 물론 그중에서도 큰 기복 없이 자신의 기량을 뽐내는 선수들이 일류가 되지만 그들 역시도 매번의 퍼포먼스가 동일하지는 않다. 아무리 뛰어난 선수도 멘탈에 구멍이 나면 원래의 능력을 펼쳐내지 못하기도 하며, 어떤 팀에서는 펄펄 날아다니던 선수가 다른 팀으로 이적한 후 급격히 내리막을 걷기도 한다. 프랑스 리그에서 매 시즌 두 자릿수 골을 기록하던 박주영 선수가 프리미어리그로 옮긴 후 출전 기회조차 제대로 얻지 못하고 몇 시즌을 벤치 신세만 지다 쓸쓸히 귀국한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당시 박주영 선수에게 쓰라린 좌절을 맛보게 했던 팀 역시 아스널이었다.
아무튼 이러한 여타의 이유들로, 경기의 결과는 선수들의 컨디션과 분위기에 달린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선수들의 스쿼드와 감독의 리더십, 포메이션이나 전략, 전술 등도 대단히 중요하지만 이 모든 것도 선수들의 멘탈이 흔들리면 빛을 발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멘탈은 사람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몇 번의 좋은 찬스를 만들었어도 결국 골로 이어지지 않던 상황에서 상대팀 선수가 원더골을 꽂아 넣는 모습을 보게 된 토트넘 선수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아마도 축구를 해본 사람은 바로 떠오르는 기억이 있을 것이다. 어떤 날은 대충 킥을 해도 차는 대로 들어가는 날이 있는 반면에 어떤 날은 분명히 들어갔어야 하는 골이 들어가지 않기도 한다. 이럴 때면 무의식적으로 미신스러운 불안감이 솟구친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약간의 의심은 몸을 움츠러들게 만들고 긴장은 실수를 유발한다. 이런 몸과 마음의 부조화는 때때로 불길한 상상을 현실로 가져오기도 한다. 얼마나 빨리 이런 무의식적인 위축 상태로부터 벗어나는가가 이어지는 경기의 승패를 좌우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때일수록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만회골이 중요해진다. 그 만회골이 손흥민 선수의 발끝에서 터졌다. 선취골을 내준 지 3분 만의 일이었다. 손흥민 선수의 이번 시즌 10번째 골이자 북런던 더비의 향방을 다시 원점으로 돌린 신들린 칩슛은 그가 팀 스피릿을 어떻게 끌어올려야 하는지 아는 키플레이어임을 증명하는 신호탄 같았다. 상대팀의 백패스를 그대로 낚아챈 손흥민 선수는 특유의 빠른 스프린트로 최종 수비수와의 몸싸움을 이겨내고 감각적인 칩슛으로 상대팀의 골망을 흔들었다. 몇 차례의 유효슈팅을 야신처럼 막아대던 상대편 골키퍼를 유유히 넘어 골망으로 흘러 들어가는 장면은 다소 비현실적이라 느껴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만회골로 인해 토트넘 선수들은 다시 자신감을 되찾았고 자칫 상대팀으로 쏠려버릴 수 있었던 경기 분위기를 다시 가져올 수 있었다.
결국 경기가 종반으로 접어드는 약 85분경, 역시 손흥민 선수의 코너킥에서 이어진 토비 알데르베이럴트 선수의 헤딩골로 토트넘은 2대 1로 역전승을 거두었다. 이 경기에서 손흥민 선수는 승점 3점을 안겨준 두 골 모두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하여 많은 영국의 스포츠매체로부터 MOM으로 선정되었다. 더불어 1골 1도움을 추가함으로써 2019-20 시즌 프리미어리그 중 아직 1명(케빈 데 브라이너, 맨체스터 시티의 간판 미드필더로써 유럽 리그를 통틀어 최고의 선수 중 하나로 꼽힌다.) 밖에 이루지 못한 '10골-10도움'을 달성하기에 이른다. 프리미어리그 진출 4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이라는 개인 기록 역시 갈아치웠다.
득점왕, 도움왕 등 한쪽 측면에서 최고의 기량을 발휘하는 선수들 역시 대단하기는 매한가지이지만, 득점과 도움을 고르게 기록하는 선수는 감독과 팬들의 입장에서도 다른 느낌을 준다. 필요에 따라 득점도 가능하지만, 넓은 시야와 돌파, 패싱 능력으로 다른 선수들에게 득점 기회를 만들어 줄 수 있는 선수는 팀에 있어 보물과도 같다. 이런 만능 공격수 한 명이 팀에 있으면 감독은 팀을 운영함에 있어 여러 가지 옵션을 구상할 수 있고 굉장한 전술적 자유도를 가질 수 있다. 더구나 양발이 모두 능한 손흥민 선수는 필요에 따라 왼쪽과 오른쪽 사이드를 오가며 어느 쪽에서든 크로스와 돌파, 슈팅을 할 수 있기에 그의 전술적 가치는 더욱 높아진다.
여기에 더불어 리그 중 한 골도 넣지 못하는 선수들이 즐비한 프리미어리그에서 득점과 도움을 모두 두 자릿수로 기록했다는 점은 그 자체로 손흥민 선수의 클래스를 입증한 것이나 다름없기에 더욱 의미가 크다고 볼 수 있다. 손흥민 선수 자신의 커리어로써도 처음 달성한 기록이지만, 이것은 아시아 선수로도 처음 달성한 기록이어서 팬으로서 더욱 기쁘다.
손흥민 선수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겸손한 자세를 유지했다. 그의 겸손이 더욱 뜻깊은 이유는 그가 자신의 어떤 기록보다도 팀의 승리를 기뻐하는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었다. 때때로 선수들은 득점왕을 노리기 위해 페널티킥을 도맡아 하거나 좋은 프리킥 찬스에서 서로 자신이 키커로 나서겠다고 갈등을 보이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과격한 갈등 양상으로 드러나지는 않지만 그런 사소한 갈등과 의견 차이가 팀 경기력에 영향을 미칠 것임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팀의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에서 타이틀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과, 타이틀 그 자체가 목적이 되는 것은 분명한 차이가 있어 보인다. 이것은 마치 돈을 벌기 위해 좋은 직업을 가지려는 것과 같다. 직업을 정하는 것은 자신이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지의 문제가 주가 되어야 하는데, 본말이 전도되면 좋은 직업을 갖더라도 곧 추진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자신이 그 일을 왜 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결여되면 지속적인 동기부여가 일어나지 못하고, 이것은 종종 급격한 쇄락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예전 브라질의 축구천재로 이름 높았던 ‘호나우도’ 선수 역시 얼마간의 전성기를 누린 후 갑작스럽게 불어난 체중으로 충격을 준 적이 있었고, 특유의 외모와 함께 지구인의 실력에서 벗어났다는 의미로 ‘외계인’이라고도 불렸던 ‘호나우딩요’ 선수 역시 마찬가지로 자기 관리에 실패하며 선수생활을 마무리지어갔다. 돈이 목표가 되면, 그것을 이룬 후에는 그 일을 할 이유가 없어지고, 이유가 없어진 일에는 곧 의욕이 떨어지고 실력마저 떨어지는 메커니즘을 여지없이 보여준 예시였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이유로 일을 시작할 수밖에 없었더라도 자신이 왜 그 일을 하는가, 나는 이 일을 통해 달성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가, 내가 하는 일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의 질문에 답을 찾아가지 않으면 결국 성장동력은 바닥나고 만다. 인간은 시간이 지날수록 적응하고 노후되기에 계속해서 발전시키지 않으면 원점조차 유지하지 못한다. 스포츠, 학문, 예술가 등 그것이 무엇이든 정체되면 쇠퇴되고, 그 분야에서 뒤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수록 그 일을 계속할 동인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아무튼 이번 경기에서 보여준 토트넘의 승리는 여러모로 정신적인 부분이 팀 전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보여주는 사이다 같은 승리였다. 축구를 좋아하고, 즐기고, 같은 한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손흥민 선수였기에, 그의 맹활약은 더욱 반가웠다. 역경의 순간 팀 스피릿을 끌어올릴 수 있는 키 플레이어로써의 성장한 모습도 좋았고, 아시아인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체격적으로 우세한 유럽, 중남미, 아프리카 선수들과의 몸싸움을 이겨내면서도 엄청난 스프린트로 공간을 쇄도해가는 모습도 참 멋졌다. 투지와 기량, 겸손함, 헌신적인 플레이까지 갖춘 그가 꾸준히 현재의 폼을 유지하며 아시안 프리미어리거로써 박지성 선수를 뛰어넘는 레전드로 성장해가기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