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여름

by 작가 전우형

비다.

소낙비다.


소낙비가 아스팔트 바닥을 두드렸다. 덩달아 심장도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비가 몰고 온 서늘한 바람이 살갗을 스치는 느낌이 좋았다. 짜릿한 냉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짙게 가라앉은 마음에 청량감이 피어났다. 적란운이 파도처럼 하늘을 뒤덮은 모습이 장관이었다. 며칠을 프라이팬처럼 달궈대던 초여름 더위도 어느덧 기세가 한풀 꺾인 사춘기 소녀처럼 얼굴을 붉게 물들인 채 잠잠해지고 있었다.

비 오는 여름만큼 운치 있는 날도 드물다. 비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공사장도 하루 쉬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질주하는 차들은 여전했지만 내뿜는 매연만큼은 빗줄기에 쓸려 이내 바닥으로 가라앉고 말았다. 공기는 상쾌하고 기분은 산뜻했다. 독하고 찌든 냄새들은 모두 비에 씻겨 내려가 버렸으면.

비 오는 날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평소와 전혀 다른 소리의 질감과 색깔들이다. 세상도 비가 오면 수다스러워지는 걸까? 작고 희미하던 소리들이 좋은 스피커를 옆에 둔 것처럼 크고 명확하게 들린다. 들으려면 말하기를 멈춰야 하는 것처럼, 세상의 대화에 응하려면 나를 잠시 내려놓고 그들의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소리가 마음까지 전달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잔잔한 호흡으로 기다리면 처음에 들리지 않던 소리가 하나씩, 하나씩 고막에 상을 만들어낸다. 내리는 빗방울의 미세한 틈으로 사소한 소리들이 중첩되며 화음을 이루고, 형태 없는 세상이 바로 눈앞에서 노래하기 시작한다. 타이어가 빗물이 새로이 층을 이룬 바닥을 긁으며 지나가고, 가까워지던 소리가 왈칵 물보라를 일으키며 순식간에 잦아들었다. 그 후에는 오르막을 힘겹게 올라가던 화물트럭의 엔진 소리가 유난히 크고 무겁게 귓가를 채운다. 그 소리는 마치 그가 지금도 쉼 없이 화물트럭을 몰아야 하는 이유들처럼 버겁다. 양손에 거머쥔 김이 폴폴 묻어나는 두툼하고 묵직한 비닐주머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유난히 경쾌하고 바쁘다. 우의를 뒤집어쓴 배달대행 아주머니는 스마트폰을 연신 만지작거리며 다음 행처를 정하는 모양새다. 그런 사이에도 구름은 쉼 없이 흘러갔다. 찢긴 구름 사이로 드문드문 하늘빛이 새어 나왔다. 주차된 차들이 하나씩 자취를 감추고, 나는 식은 커피를 집어 들었다. 식은 커피는 또 다른 맛을 낸다. 편안하고 자극적이지 않으며 끝이 무뎌서 나름의 특색이 있다. 단숨에 마실 수도 있지만 오래 두고 마시는 것도 나쁘지 않다. 비가 그친 땅은 순식간에 색이 옅어졌다. 여름 비의 귀환은 이토록 빠른 걸까. 유랑 서커스단이 막을 올렸다 내리듯 한여름 소낙비의 공연은 어느덧 이 고장을 지나 저 고장으로 갔나 보다. 그 신속함이 좋은지 나쁜지 나는 평생 답을 모를 것 같다.

주위를 무심히 둘러본다. 한결같이 곁에 존재하는 사물들에 시선이 저절로 머문다. 조정래의 정글만리 2권, 하얀 커피잔, 배터리가 절반쯤 남은 노트북, 노트, 만년필, 쓰다 만 상태의 초고,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가의 각오, 묘사의 힘, 그리고 10년을 매도 올 하나 풀리지 않는 샘소나이트 가방. 분명 빨간색이었던 것 같은데 이제는 갈색이 되어버린. 이 중에서 마스크를 제외하면 모두 자의로 짊어지고 다니는 일상들이다. 한결같은 건 좋은 걸까? 습관처럼 또 겁이 났다.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 속에서 나만 화석처럼 굳어있는 건 아닐까. 마른 잎사귀는 가지를 붙들 힘도, 낙화를 면할 기력도 없다. 총천연색으로 물든 환상 속에서 홀로 회색빛의 그림자로 남을 때 누가 그의 이름을 부를까. 매일 무언가를 쓰고 있어도 실은 아무것도 쓰지 못한 건 아니었을까. 구멍 난 물독에 물을 채우며 나는 텅 빈 눈동자로 시계만을 바라보고 있다. 시계를 보고 있으면 문득 내가 시계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한결같은 삶 속에서 누군가에게는 시간을 말해주면서도 정작 스스로는 그 시간을 살지 못하는 종속물. 초침이 움직이지 않으면 1분도 앞으로 갈 수 없는 분침처럼 톱니바퀴 연쇄의 결과물이 되어버린 느낌.


비가 내렸고, 비가 멎었으며, 나는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잠깐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으나 나는 같은 곳에 머물고 있다. 유일한 변화는 비어있던 장에 글씨 따위가 나열되어 있다는 것. 이 문자들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지금부터 고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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