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머니 속 이야기

구겨질 대로 구겨진 메모를 펼쳐보다가

by 작가 전우형

교과서를 훔쳐가는 친구들이 있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저는 눈치 없이 "교과서를요?" 하고 정색을 하고 말았어요. 그러자 그녀는 말꼬리를 흐리며 배시시 웃었어요. "그 동네에서는 안 그랬나 봐요?" 저는 왠지 실수한 느낌이 들어 이렇게 덧붙였죠. "제가 기억을 못 하는 걸 수도 있어요. 아시잖아요. 저 오래된 일 기억 못 하는 거. 고등학생 때라면 벌서 20년도 더 지났을 시긴 걸요." 샛길로 빠지긴 했지만 실은 대화 주제는 다른 것이었어요. 이른바 '한계를 인정하는 법'에 대한 거랄까. 그녀의 깨끗한 수학 1 교과서 이야기는 꽤 오래 제 머리를 두드렸어요. 그런 방법이라면 저도 꼭 배우고 싶었거든요.


조금, 그러니까 아주 조금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아주 조금만 돌아가면 늘 같은 곳을 맴도는 저를 만날 수 있다고. 기왕 가는 길이라면 조금만 벗어나서 내가 홀로 머무는 공간을 다른 색깔로 채워주길 바랬던 거죠. 하지만 '조금'이라는 단어의 용례에 차이가 있었나 봐요.

갖춰진 장소에서만 만들어낼 수 있는 맛과 분위기가 있었어요. 지나치는 사람들에게는 늘 아무렇지 않게 하고 있는 것들을 그녀에게도 해주고 싶었죠. 그러면서 칭찬, 인정, 격려, 응원 같은 걸 받고 싶었어요. 다른 누구도 아닌 그녀에게. 그런데 욕심이었나 봐요. 어느 날 제게 그러더군요. 자신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지 말라고. 제가 무리한 요구를 하고 있었던 거죠. 그러니까 제가 '조금만'이라고 생각했던 거리가 그녀에게는 '그만큼'이었던 거겠죠? 처음에는 몇몇 개의 말들이 식도에 걸렸지만 이내 수긍이 되더군요. 사과했어요. 그런데 왼쪽 가슴 아래쪽인가가 쿡쿡 수시더군요.


공주시의 철길 이야기가 떠올랐어요. 전환이 터무니없긴 하네요. 기찻길이 지네를 닮아서,라고 했던가? 공주는 닭을 중요하게 여긴데요. 그런데 지네는 닭과 상성이 안 좋다나요? 그래서 끝내 공주로는 기찻길이 들어서지 못했데요. 그러다 한참 뒤에야 공주와 인근 지역의 경계쯤에 기차역이 세워졌다고. 미신 때문에 공주로는 기차가 들어서지 못했다는 말도 재밌었지만 그런 믿음을 신봉하는데 가장 앞장섰던 건 역시 버스회사를 필두로 한 지역유지들이 아니었을까, 그런 우스꽝스러운 생각부터 들었어요. 기차가 못 다니는 곳만큼 버스가 성업하기 좋은 환경도 없을 테니까요. 그러고 보니 제가 사는 고장에도 복선 전철 선로가 설치되고 있어요. 논밭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데 출퇴근 때마다 조금씩 모래가 쌓이고 언덕이 만들어지더니 철로가 놓이면서 그 위로 전력선을 이을 철제 구조물이 늘어서더군요. 전철이 생기면 '조금' 덜 돌아가도 되려나. 하지만 조금에 대한 감각의 차이가 서로를 물고 늘어지겠죠. 기대를 내려놓는 것도 방법일 거예요. 기다려도 오지 않으면 섭섭하겠지만 생각 없이 눈가에 문득 나타나면 반가울 테니까요. 그나저나 철로가 놓이고 나서 공주시의 닭들은 괜찮았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