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무소음 무선 키보드와 마우스를 선물해주었고 나는 그것을 처음 사용해보는 중이다. 확실히 끝이 다듬어진 소리라 자체로도 작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아서 더 마음에 든다. 여전히 한밤중인 아이들을 깨우지 않는 걸 보면 조용한 곳에서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오히려 신경 쓰이는 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기침 소리뿐. 새벽 4시. 첫새벽. 특별할 건 없다. 잠들기 직전 홍루이젠 샌드위치를 먹어서 그런지 속사정이 말이 아니다. 눈이 빨리 떠진 건 아마도 그 때문인 것 같다. 특별한 긴장이나 불안은 없다. 다만 그라목손이 어쩌다 아목시실린으로 바뀐 걸까, 그런 쓸데없는 생각으로 하루를 시작했을 뿐. 종종 내 기억 속 단어는 유통기한이 있어서 시간이 지나면 상하고 곰팡이가 피어 있다. 그래서 기억은 대체로 믿을만한 것이 못 된다고 거의 신봉하듯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밖은 새벽 비가 한창이다. 아침은 조금 덜 더울 것이다. 시원함이 하루, 이틀 정도는 갈까.
손 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흔들림은 멈추지 않았고, 심장은 안보다 밖에서 더 많이 두근거리는 느낌이었다. 저주는 늘 거기 있었다. 아무리 달려도 해가 늘 거기 있듯이. 해가 스스로 저물지 않는 한 나는 도망칠 수 없었다. 그래서 내가 바라는 건 저주의 모래가 더 빨리 흘러내리는 것뿐. 수많은 시간들이 책장에 빼곡히 꽂혀 있었지만 손이 가는 지점은 없었다. 유통기한이 지난 기억들만 여전히 밝게 빛나는 쇼케이스에 버젓이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이 아님을 알면서도 유난히 두려울 때가 있다. 받아들여야만 해. 받아들이지 않으면 떨쳐낼 수 없어. 더 가라앉지 않으려면 머리까지 완전히 물속으로 집어넣어야 해. 힘은 빼라면서도 팔다리는 있는 힘껏 저으라는 모순을 이제는 받아들여야 해.
그녀가 말했다.
"빠진 이빨을 처마지붕 위에 올려두면 까치가 물고 가서 새 이빨로 바꿔준다고 엄마는 말했어요. 엄마는 눈에 다래끼가 나면 꾹 짜서 그걸 벽돌 사이에 발라 길 가운데 두곤 했죠. 지나가던 누군가가 그걸 발로 차면 그 사람에게 다래끼가 옮고 너는 낫는다, 고 엄마는 그랬죠."
어린 딸은 궁금했을 것이다. 그래서 대략 30년이 지난 지금도 기억에 남아 있을 테지. 나는 말했다.
"이제 나을 것 같아요. 어제부터 끙끙 앓기 시작했거든요. 보통 옮으면 낫더라고요."
내가 이 말을 했을 때 그녀는 까치와 다래끼 이야기를 꺼냈다. 나는 이번에도 아, 그래요? 하는 표정으로 바라보고 말았다. 그녀는 또다시 예의 그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어릴 때 그런 적 없었어요?"
나는 설명하듯, 아니 변명하듯, 혹은 다독이듯 말했다.
"아, 제가 아파트에 살아서요. 그런데 아파트면 옥상 위에 올려두어야 하나요?"
그녀는 맥없이 웃다 말했다.
"그런데 제가 이 얘기를 왜 꺼냈던 거죠?"
잠깐 생각하던 그녀는 맞다!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비슷하다고 생각했어요. 다래끼가 옮으면 낫는다고 믿었던 것과 지금의 감기."
나는 그런가? 하고 속으로 갸웃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의도와 경험적 믿음의 차이랄까. 귀납적 결론 같은. 예컨대 감기가 옮았으니 나을 거라고 믿었다기보다는 지금껏 늘 그래 왔던 경험, 그러니까 곁의 누군가가 같은 증상으로 시름시름 앓을 때쯤이면 나는 대충 나을 때가 다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다래끼는 의도가 담긴 행위였으니까. 누군가가 지나가다가 발로 차서 다래끼가 옮도록 길 가운데 짜낸 다래끼의 잔여가 묻은 벽돌을 놓아두는 거니까. 물론, 그것으로 누군가에게 다래끼가 옮을 것이라는 발상 자체가 아직 때 묻지 않은 어린아이에게 통할만한 미신적 행위지만.
아마도 엄마는 그렇게라도 다래끼로 힘들어하는 아이를 달래주고 싶었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뭇 엄마들이 그렇듯, 그녀는 어떻게 하면 자신의 아이가 진정되는지 잘 알았던 것이다. 그리고 인간의 상처는 의외로 이제 낫는다고 생각하면 정말 빨리 낫기도 하니까. 절대 나을 수 없다고 믿는 것만큼 치료에 방해물도 없다. 인간은 그런 식의 절망을 덧씌우며 스스로를 죽음으로 몰아넣기도 한다. 그러니 인간을 믿음의 동물이라고 부르는지도.
나는 어쩌면 종교도 비슷한 관점에서 인간에게 힘을 준다고 생각했다. 지고지순한 어떤 존재가 나를 창조하고 사랑하고 지켜본다는 믿음. 지금 겪는 일들에 반드시 어떤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믿음. 또한 그가 만든 시련에는 반드시 끝이 있다는 믿음. 달리 말하면 나를 낳아주신 건 처음에는 엄마였고,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돌봐준 존재도 엄마였다. 그런 엄마가 까치가 물고 가서 새 이빨로 바꿔준다면 그런 것이고, 누가 저 돌만 차고 가면 다래끼가 나을 거라고 하면 또 그런 것 아닐까? 그런 믿음에 빈틈은 없다. 그 믿음이 바로 자신의 믿음이라고 믿어질 정도로. 행위에 대한 가벼운 의문은 있을지라도. 그러니 엄마가 아이에게 하는 한마디, 한마디는 얼마나 크고 무거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