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이덴티티에 대하여 생각하다.
글쎄... 언제부터였을까? 버틸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건... 버티다 보면 그것도 습관이 된다. 참다 참다 폭발하는 건 나의 오래된 문제점이다. 문제는 어느 순간부터 폭발이 사라져 버린 것. 아픔이 마음속에서 맴돌기 시작한 건 사소한 폭발조차도 용납할 수 없어진 나의 완벽주의 때문이었다.
착한 사람이고 싶었다.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아니... 사실은 누구에게도 비난받고 싶지 않았다. 불가능한 희망이란 걸 알면서도 나는 끊임없이 그것에 집착했다. 사실은 누구보다도 부족한 것이 많다고 생각했기에. 자존감이 바닥이었기에. 의심하고 의심하고 또 의심하다 보니 스스로의 솔직한 모습을 드러내지 못하게 돼버렸다.
겁이 너무나 많았기에 아무것도 겁내지 않는 척하려고만 했다. 물이 너무나 무서워 발이 닿지 않는 물에는 들어가지도 못했던 내가, 밑바닥이 보이지 않는 거무죽죽한 바닷물에 뛰어들어야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원래의 나일 수 없었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아마도 물에 들어간 그 순간에 까무러쳤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그 안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나 강했다. 그 안에서 버티지 못하고 낙오자가 되어 다시 세상으로 쫓겨나는 것은, 그 깊은 물에 뛰어드는 것보다 더욱 공포스럽고 싫었다. 나는 더 큰 공포를 피하기 위해 내가 가진 공포심을 억지로 밀어내어야만 했다.
사관학교 시절 나를 가장 두렵게 했던 건 개인훈련이었다. 몇 번의 잘못으로 지독한 개인훈련을 받으면서 나는 더욱 철저하게 나를 바꿔야만 했다. 진심으로 아무것도 지적받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냥 하지 말라는 건 무조건 안 했다. 군대에는 하지 말라는 것도 많고 해야만 하는 것도 너무나 많았다. 그것은 사관학교에서 더욱 엄격했고, 나는 이것을 지키는데 모든 에너지를 쏟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에 대해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원래 하고 싶은 것도, 되고싶은 것도 많았던 내가, 그 4년간의 생도생활을 겪어내면서 그렇게 변해버렸다. 명령과 복종이라는 메커니즘에 완벽하게 녹아들었던 것이다.
잠수함은 비좁고 개인 공간이 전무했다. 하지만 나는 그곳이 좋았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상대적으로 멀미가 덜했기 때문이었다. 일단 물속으로만 들어가면 만날 수 있는 그 고요함이 좋았다. 사람들은 점차 말수가 줄어들었고 각자의 침대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한평 남짓한 침대를 제외하면 사람들은 혼자 있을 수 있는 공간이 없었다. 24시간 누군가와 밀착된 시간. 그런 출동을 한 달 남짓 다녀오면 나는 맥이 탁 하고 풀리는 것을 느끼곤 했다. 아무리 편한 가족이라도 항상 붙어지내다보면 다툼이 일어나고 갈등이 생기기 마련이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누구에게도 편안함을 느끼지 못했다. 나에게는 모두가 어려운 사람이었고 경계대상이었다. 언제나 불편했고 극도로 신경을 써야 했다. 그 스트레스가 폭식으로 돌아왔다. 달달한 것을 먹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고 움직임이 적은 잠수함에서 1년을 근무하는 동안 나는 10kg 가까이 체중이 늘었다.
나는 온전하게 관리할 수 있는 범위가 한정되어 있었다. 기껏해야 스스로의 인생 정도였을 것이다. 솔직히 가족도 버거웠고, 부대도 버거웠다. 수십 년간 알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내가 책임지고 관리해야 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것처럼 여겨졌다. 그토록 삶의 바운더리가 좁은 사람이 나라는 걸 알았기에, 장교로 근무하는 동안 나는 본래의 모습을 끊임없이 눌러야만 했다. 다정다감하고 사람을 잘 챙기는 사람이 되고 싶었고, 그들의 어려움을 해결해주고 사기를 북돋워주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나라의 녹을 받는 책임 있는 군인의 모습으로 치장하고 싶었고 용서와 양보가 미덕이라고 끊임없이 자기 최면을 걸어야만 했다. 이런 자기 최면은 꽤나 성공적이었고 나는 군대에서 비교적 인정받고 믿을만한 사람으로 평가받아왔다. 문제는 그것이었다. 나는 나조차도 속일 정도로 그곳에 잘 적응하는 것 같았기에, 점점 무너지고 엇나가는 나를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랬다. 나는 군인이라는 직업, 국방의 의무, 숭고한 희생 같은 것들에 특별한 애착이 없었다. 더군다나 그곳은 원래의 나와 너무나 다른 성향을 가진 사람들에게나 어울리는 곳이었다. 나는 시간을 죽이는 것을 잘하지 못했다. 하지만 군대의 일을 하다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대기해야 하거나, 아무 일이 없어도 뜬 눈으로 밤을 새야 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했다. 왜 그렇게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버티려고만 하니 나로서는 정말로 미칠 노릇이었다. 그래도 그러려니 하고 참고 살았다. 으레 했던 생각은 대충 이런 것들이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나도 이런 생활이 편안해질 날이 오겠지. 그래도 이런 직장이 어딨어. 나처럼 매달 나라에서 주는 월급 따박따박 받으면 요즘 행복한 거야. 바깥에는 취업이 안돼서 힘들어하는 사람도 많은데. 20년 채우면 평생 연금도 나와. 이런 직장이 어딨어.’
그런데도 자꾸만 골이 나고 이곳이 힘들다 여겨지는 것은 배가 불러서 그런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고생을 덜해봐서 이런 생각이 드는 걸까? 감사한 줄 알고 살아야 하는데 왜 이러는 걸까? 그런데 계속해서 해결되지 않는 이 갈증과 좁아지지 않는 괴리감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이런 자조적인 의문들이 나를 힘들게 했다.
너무나 이른 나이에 경황없이 시작한 군인이라는 직업과 이어지는 결혼은 ‘나’를 잊어버리도록 강요했다. 도대체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그런 것에 대해 고민하거나 생각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고민은 사치라고. 모두들 나처럼 버티며 살아간다고. 나에게는 가족이 있으니까. 키워야 할 아이들이 있으니까. 현재의 직장을 그만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다른 길을 찾아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내가 원하는 것을 하기에는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겨우 삼십 대에 접어든 내가 어쩌다가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던 걸까? 사실 지금도 약간은 미스터리다. 나는 왜 그토록 참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을까? 스스로를 죽이는 것을 강요했을까? 무엇이 그토록 겁이 났던 것일까? 그동안의 고민을 통해 내가 내린 결론은 더 이상 생각의 여지를 지워버린 것. 아무 생각도 할 수 없게 만든 것. 그리고 스스로 다른 대안이 없다고 단정 지어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스스로 단정 짓고 나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더욱더 그곳에서 버티는 것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데까지 버티자. 이 생활을 버티자. 생각하지 말고 버티자. 그냥 버티자. 누가 뭐래도 버티자.’ 그런데 점점 더 버티기 힘들어지는 나를 만나기 시작했다. 어떻게든 버티려고 하면 버텨졌던 20대를 지나고 30대에 접어들면서 정신보다도 육체가 먼저 백기를 흔들어대기 시작했다. 자꾸만 어딘가가 아프고 극심한 피로가 몰려왔다.
몸이 힘들어지자 정신도 피폐해지기 시작했다. 버티고 싶은데 버티지 못하는 나를 보며 의지가 약하다 자책하고 비난했다. 도망치고 싶은 마음과 버텨야 한다는 강박이 끊임없이 충돌했다. 잠이 오지 않고 술에 의지하게 되고 한순간의 쾌락과 즐거움을 주는 것들의 유혹에 빠지기 시작했다. 현실에서 벗어날 수 없기에 현실을 잊어버리려 애썼다. 이것이 또 다른 악순환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생활이 엉망이 되자 몸은 더욱 무거워졌고 그런 나를 보며 자책은 더욱 심해졌다. 이른 나이에 과거의 영광을 그리워하게 됐고 현재의 내 모습은 점점 더 불만족스럽게 느껴졌다. 내가 싫었고, 내가 미웠고, 이 모든 것을 바꿀 수 있다면... 이루어질 수 없는 바람에 끊임없이 골몰하며 현재를 불행하게 만들었다.
성공이라면 성공이었다. 나는 죽지 않는 데 성공했다. 나는 현재가 아직 존재하는 것에 진심으로 감사한다. 나는 나를 죽지 않게 붙들어준 가족에게 감사한다. 가족에 관한 한 나는 늘 애증에 시달렸다. 나는 가족을 사랑하기도 했지만, 가족의 존재가 부담스럽기도 했다. 죽음의 경계선에서 마지막 발걸음을 떼지 못했던 건 그 지독한 책임감 때문이었다. 나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자살을 선택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와 결별하고 너무나 힘들어하는 어머니를 보며 내 아내는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 다짐했었고, 아빠의 빈자리를 느꼈던 나는 아이들에게는 그런 아빠가 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것이 내가 결혼을 선택하고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뿌리 깊은 초심이었다. 그래서 한때는 끊임없이 이것을 꿈꾸기도 했다. 내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으로 말미암아 ‘완벽한 타살’에 이르고 싶다고. 누가 나를 좀 죽여줬으면 좋겠다고. ‘더 이상 버티고 싶지 않은 마음, 이 세상의 힘겨움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은 마음, 그리고 가장이자 아빠로서의 책임감.’ 이 3가지를 모두 충족시켜줄 수 있는 것은 일하다 죽는 것뿐이었다. 그것이 한때의 가장 큰 바람이었다. 하지만 결국 나는 완벽한 타살에 이르는데 실패했고 결국 다시 살아나고야 말았다.
나를 살린 건 역설적으로 끊임없이 고민했던 ‘죽음’이었다. 죽음 앞에 섰을 때만큼 벌거벗은 것 같은 순간은 없었다. 모든 것을 내려놓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죽음. 그 죽음을 결국 밀어내면서 나는 새로운 생명을 얻었다. 누군가는 그렇게 말할지 모른다. 의지가 약해서 그렇다고. 죽는 건 뭐 쉬운 줄 아냐고. 그렇다. 죽는 것은 어렵고, 사는 것은 더 어렵다. 하지만 끝내 나는 사는 것을 선택했다. 그 과정에서 글쓰기가 커다란 도움이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나는 나에 대해 생각하고 쓰면서 죽음의 길목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끊임없이 죽음에 대해 생각하고 골몰했던 그 순간들을 통해 다시 태어났음을 영혼의 그림자를 통해 느낀다.
죽음에 가까워진 시간들은 세상을 다르게 보는 눈을 만들어주었다.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것이 평등하게 느껴졌다. 곧 죽을 것이라 생각하면 나를 불편하게 하는 많은 것들이 편안해졌다. 쓸데없는 것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나를 짓누르던 완벽주의를 내던질 수 있었다. 도대체 무엇을 위해 나는 그토록 애를 쓴단 말인가. 그러자 보이지 않던 많은 것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랑도 증오도 특별할 것이 없게 느껴졌다. 가족이라고 해서 사랑해야만 하는가? 증오는 죽여야만 하는 감정인가? 나만 생각해서는 왜 안되는가? 당연한 것이 없는 이 세상에 당연하다고 여겼던 그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져갔다. 삶을 위한 나만의 논리가 완성되어가기 시작하자 지독했던 불안도 차츰 안정되어갔고 그동안 잃어버렸던 ‘나’를 다시 찾아갈 수 있었다.
생각, 즉 사유하는 것은 본래 나의 아이덴티티였다. 애늙은이 취급을 받을 정도로 나는 진지했고 깊이 탐구해보는 것을 좋아했다. 학창 시절에 내가 가장 힘들어했던 모든 것은 단순 암기였다. 나는 이해하지 못하고 외워야 하는 것들을 증오했다. 세상에 ‘그냥’ 그런 것이 어디 있다는 말인가?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고 배경이 있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이 내가 어떤 곳에 들어가면서 망가져야만 했고 깊이 묻어버려야만 했다. 그곳이 바로 사관학교였고 군대였다.
19살 꿈 많은 시절에 그저 독립하기 위해, 집을 떠나 내 힘으로 버티기 위해 들어갔던 그곳에서 나는 나의 가장 근본적인 기질을 포기해야만 했다. 생각하고 비판하고 탐구하면서 버티기에는 그곳은 너무나 억압되고 경직되고 의문을 허용하지 않는 곳이었다. 가끔은 나는 그런 내가 답답하기도 했다. 그냥 있는 대로 하고, 시키는 대로 하면 될 텐데. 마음속으로 끊임없는 의문이 드는 내가 비정상이라고 여겨질 정도로 내적 갈등이 극심했다. 그랬던 기간이 17년이다. 나는 그만큼 버틴 것이 자랑스럽다. 이것을 깨달으면서, 한때는 실패한 인생이라고, 모든 것은 끝났다고 체념하고 포기했던 그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여전히 나는 참고 버틴다. 참고 버티는 것은 나의 오래된 습관이며 이것은 어쩔 수가 없다. 그것은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하는 나의 일부다. 이미 굳어진 기질은 결코 변하지 않는다. 다만 이제는 내가 무리하지 않을 만큼만 버틴다. 내가 버티는 습관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정도를 조절할 수 있고, 가끔 무리해서 버텨야 할 때면 그 이후에 반드시 휴식하고 회복할 시간을 갖기 위해 노력한다. 이 작은 ‘자각’이 균형을 만들어주었다.
지금도 간혹 떠올린다. 그 참혹했던 시간들을. 그것은 단지 우울하고 기분이 처지는 것이 아니었다. 삶에 희망이 없는 곳. 그곳이 곧 지옥이라면, 나는 지옥의 길목에서 오랜 시간 방황해왔던 것이다. 그 방황의 시간은 나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단단해진다는 건 무작정 버티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장단점을 정확히 파악하고 불필요하게 무리하지 않는 것이다. 너무 단단해지다 못해 부러지지 않고, 너무 연해 쉬이 구부러지지 않는 것. 적당한 탄성과 강도를 갖고 때로는 유연하게, 때로는 우직하게 자신의 고유한 삶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 내가 정의한 ‘단단함’이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있다.
그것이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우리는 자신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생각해야 한다. 내가 어떤 존재인지 규정해야만 한다. 어떤 이유로든 자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는 한, 우리는 영원히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내가 살고 싶은 인생, 추구하고 싶은 목적과 의미, 내가 하고 싶은 일, 함께하고 싶은 관계, 우정, 사랑. 이 모든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사회가 만들어둔 줄이 무척이나 튼튼해 보이고 그것이 정답처럼 보일 때가 있다. 나 역시 그랬다. 빨리 취업하고 안정된 직장을 갖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것. 그것을 따라가는 삶이 가장 올바르고 모두에게 환영받는 길이라고 여겼다. 이 단단해보이는 동아줄을 잡지 않을 때, 우리는 실제로 많은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기도 한다.
안타깝게도 주변 사람들은 이미 사회가 만들어둔 단계에 익숙해져 있고 그 흐름에 순응하지 않는 사람을 걱정스럽게 여기거나 비판하기도 한다. 때때로 그런 사람이 미끄러져 넘어지고 무릎이 까질 때면 그것 보라며, 내가 빨리 이쪽으로 오라고 하지 않았냐며 핀잔을 주기도 한다. 비단 나를 시기하는 사람들 뿐만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 동료들 역시 유사한 반응을 보일 때면,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여러가지 어려움들에 직면할때면, '정말 내가 잘못된 사람인가?'와 같은 자기부정에 빠질수도 있다. 이러한 현재의 한국사회 안에서 우리는 약간의 조급증과 의심, 불안에 빠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자신에 대한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하지 않은 채 사회의 거친 물살에 휩쓸려가는데 급급하다 보면, 남들을 따라 그저 살기만 하다 보면, 결국 돛이 찢겨나가고 표류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정말이지 너무나 막막하고 답답한 일이다.
세상에는 정답 따윈 없다. 정답은 우리가 그토록 풀이해온 학창 시절 객관식 문제지 안에나 있을 비현실적인 것이다. 세상의 많은 문제들은 고민하고 해결해나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정답을 달달 외우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답이 정해져 있는 문제들을 배우면서 우리는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린다. 그저 시키는 것을 하는 과정에서 생각하지 않는 습관이 몸에 베인다. 이것은 비극이다.
의문을 통해 우리는 성장하고, 자신만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 속에 그동안 몰랐던 자신의 능력을 발견한다. 답이 정해져 있다고 주장하는 모든 것들에 대해 의문을 던져야만 한다. 이러한 비판적 사고를 통해 자신의 진짜 모습을 발견한다. 생각하는 것을 멈추어서는 안 된다. 내 주위를 둘러싼, 나를 포함한 모든 것들에 의문을 던지고 생각하고 고민해보아야 한다. 왜 그것들이 소중하고 감사하고, 당연하지 않은지에 대해 지극히 몰두해보아야 한다. 이런 생각과 깨달음이 나의 심장을 다시 뛰게 만들어주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