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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독과 그릇된 욕망

화려함의 이면에 잠재된 수치스러움에 대하여

by 작가 전우형

자신에게 만족하는 삶을 사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요구하는 것이 많은 세상에 살고 있다. 이러한 요구를 하는 주체는 사회나 직장, 타인뿐 아니라 자기 스스로이기도 하다. 잘 사는 것에 대한 기준도 높고 학벌에 대한 기준도 높다. 비교는 자신에게 혹여나 잘못된 부분이 있는지를 타인에 비추어 판단해보는 것인데, 이상하게도 현대사회의 비교는 자신의 위치를 재단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할 수밖에 없고 언제나 서열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인간마저도 자원이 되는 세상. 우리는 지금 그런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는 곧잘 자신의 본모습을 표출하는데 인색하다. 가면을 써야 할 상황들에 늘 놓이다 보니 가면이 진짜 자기 모습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가면을 벗고 편안함을 느낄 공간이 있어야 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마저도 누리지 못한다. 일상생활 역시 각종 SNS에 홍보하기 위한 수단이 되고 우리가 고삐를 늦출 수 있는 공간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뭔가 점점 답답해지고 할 수만 있다면 이 답답함을 빠르게 해소해줄 무언가를 갈급하게 된다. 그런 행위들이 생활의 일부가 되면 그것이 곧 중독으로 자리 잡는다. 중독은 별다를 것이 없다. 그저 내가 하기 싫어도 나도 모르게 하게 되는 그 모든 것들이 중독이 된다.


성도착증, 연애중독, 니코틴 중독, 알코올 중독, 마약중독, 게임중독, 쇼핑중독... 중독의 종류는 한도 끝도 없다. 중독이 일어나는 이유는 그 행위가 주는 강렬한 쾌감에 중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한번 강력한 쾌감을 맛보기 시작하면 그 이후로는 어지간한 건전한 활동으로는 그만한 카타르시스를 느끼지 못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런 쾌감은 급격히 치솟아 오르는 것만큼이나 사라진 이후의 반작용 또한 만만치 않다.


중독으로 인한 쾌감은 대부분 일시적인 것이어서 그것이 지나간 후에는 급격히 공허해지고 수치스러운 마음이 들고 자책에 빠진다. 이런 스트레스를 누르기 위해 또다시 중독 행위에 몰두하게 되기도 한다. 중독을 일으키는 행위들은 우리가 몰입이라고 부르는 상태와 유사한 상태를 만들어주기 때문에 충분히 자신이 원하는 수준의 현실도피를 실현해준다.


현실도피는 현실의 문제를 잠시 잊어버리는 것일 뿐 현실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현실도피에 빠진 동안 현실적인 문제들은 오히려 심각해지며, 해결할 수 있는 적절한 시점을 지나치기 마련이다. 더 심각해진 문제를 감당하거나 직면하는 일은 더욱 어렵고 부담스럽게 느껴지며, 이것은 또 다른 회피적 성향을 가속화시키는 악순환을 만들어낸다.




중독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은 대략 이렇다.


“나는 왜 이렇게 자제가 안될까?” 스스로에게 수치심을 느끼고 자신을 책망한다. “나는 원래 이것밖에 안 되는 사람이야. 인간 말종. 나도 내가 정말 역겨워. 그런데 내 맘처럼 절대 되지 않아. 나도 정말 미치겠어.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끊임없이 생각하고 다짐하는데도 그때뿐이야. 무언가가 나를 강력하게 지배하는 순간이 찾아와. 나는 또 그 문 앞에 서 있고, 나는 또다시 나를 잃어버리지. 몸과 마음이 각자의 의지를 가진 생명체처럼 마음대로 움직여. 이 상태가 되면 나는 아무것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없어. 나도 내가 더럽다고 느껴. 내 안에 있는 이 징그러운 괴물들을 모두 토해낼 수만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정말 소원이 없을 것 같아. 점점 초라해지는 나를 느껴. 어떤 것도 내가 스스로 이뤄낼 수 있는 것은 없어. 나는 끊임없이 절망에 빠져. 스스로가 너무나 수치스러워. 이 끔찍한 기분을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어. 그건 불가능해. 진짜 내 모습을 조금이라도 알게 된다면 모두 나에게 환멸을 느끼고 떠나버릴 거야. 나는 외로워지고 싶지 않아. 그런데 점점 더 외로워져. 이 외로움은 나를 더욱 얼어붙게 해. 이 참담한 기분을 잊어버릴 방법은.... 나도 모르겠어. 이 괴물 같은 그림자들이 언제 갑자기 튀어나와 나를 집어삼킬지 몰라. 나는 언제나 불안해. 이 불안으로부터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언젠가 이 그림자가 나의 일상을 산산조각 낼 것을 알아. 하지만 그림자는 이미 나의 일부가 되었어. 나는 이것을 결코 떼어낼 수 없고 그래서인지 시시때때로 알 수 없는 욕망에 휘둘리기도 해. 나는 이중적이게도 그림자에 휩쓸린 순간에 쾌감을 느껴. 그 잠깐의 쾌감이 지나고 나면 극심한 자기혐오가 찾아와. 흔히 말하는 ‘현타’ 같은 것이지. 나는 또다시 내가 미워져. 이런 나를 증오해. 그런 것들로 즐거워하는 내가 너무나도 싫어. 가해자도 나고, 피해자도 나야. 나는 누구에게도 보상받을 수 없는 고통에 신음하고 있어.”




중독에 빠진 사람들을 가장 미워하는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자신을 수치스럽게 바라볼수록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대면하는 것이 어려워진다. 점점 더 자신의 치부를 숨기는 것에 골몰하고, 다른 사람 앞에 당당하게 나서지 못한다. 자꾸만 움츠러들고 자신감을 상실한 자신의 모습을 만난다. 스스로에게 떳떳하지 못한 마음이 온몸을 지배하고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도록 발걸음을 얼어붙게 한다. 자꾸만 도피처를 찾고 그 도피처는 대개 자신이 가장 피하고 싶었던 자신의 그림자를 향한다. 이 굴레에서 스스로 벗어나기는 결코 쉽지 않다.


세상의 화려한 명성과 권력을 가진 사람들의 이면에도 이처럼 스스로를 부끄럽게 여기는 마음이 존재한다. 그들의 페르소나는 화려하게 치장되어 있지만 내면은 벌거벗은 채 오그라들어 있다. 그들은 그런 초라한 내면을 숨기기 위해 더 화려한 가면을 쓰는데 집착하고 자신의 본래 모습과의 괴리는 점차 심화된다. 가면 중독은 스스로를 공허하게 만들고 그림자는 점점 더 으슥한 곳에 숨어서 활동하게 된다. 사람들이 보지 않는 곳, 대단히 사적이고 음침한 공간에서 눌러둔 그림자가 폭발하게 되면 그들은 평생 쌓아둔 자신의 명성을 한 순간에 무너트릴 엄청난 문제를 일으키기도 한다.


최근 한 유명인사의 죽음과 그 배경이 된 일련의 사건들이 이슈가 된 적이 있다. 나는 무엇이 그를 자살로 이끌었는가에 대해서 관심이 갔다. 죄를 짓는 사람들이 모두 스스로 목숨을 끊지는 않는다. 어떤 사람은 죄를 짓고도 뻔뻔하게 잘만 살아가기도 한다. 그런 측면에서 나는 그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어떤 생각들이 오갔을지에 대한 관심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죽음의 이면에는 도덕성에 대한 너무나 높은 장벽이 있었을 것이다. 그를 둘러싼 과도한 도덕성에 대한 기준은 그를 어떤 욕망도 표출할 수 없게 만들었을 것이다. 너무나 유명해지고 스스로의 커리어를 그런 문제를 해결하면서 쌓아온 그 유명인사로써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욕망을 털어놓거나 표출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세월이 그의 내면에 그릇된 욕망을 차곡차곡 쌓아갔을 것이고, 그 욕망이 자신이 절대적으로 컨트롤할 수 있고 편안함을 느끼는 그 누군가를 향해 새어나갔을 것이다. 그는 그런 자신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고, 그런 사실이나 의혹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도저히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커다란 상처를 입었을 피해자의 인생이 너무나 안타까운 동시에 욕망을 눌러두기만 하는 것이 어떤 위험을 초래하는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자는 누구에게나 존재하며, 그렇기에 우리는 사소한 중독에 늘 신음한다. 심한 중독으로 가정 파탄에 이르거나 인생이 완전히 망가질 지경에 처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언제나 통제되지 않는 욕망으로 인해 힘들어한다. 그것은 누군가에 대한 거두어지지 않는 증오이기도 하고 친구의 성공을 진정으로 축하해주기 힘든 시기심이기도 하다.


‘미워하지 말아야지!’ 하며 100번 생각하고 다짐했다가도 정작 그 사람의 행동이나 이기적인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미움과 분노, 증오가 표출되고 이성을 잃어버리는 나를 발견하기도 하며, 절친의 성공에 박수를 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받았어야 할 관심과 영광을 빼앗긴 것처럼 배알이 틀리고 속이 쓰린 이중적인 내면의 모습을 본다.


중독은 그릇된 욕망과 자책에서 기인한다. 욕망은 누르기보다는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릇된 욕망의 출처가 무엇인지 자신에 대한 깊은 탐색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감정과 마찬가지로 욕망은 에너지이며, 해소되지 못한 채 맴도는 에너지는 끊임없이 빠져나갈 틈새를 찾아다닌다. 이것이 우리를 그릇된 욕망에 집착하게 만든다. 욕망 자체는 가치중립적인 것이며, 선한 것도 악한 것도 아니다. 그 욕망에 어떤 행위가 접착되었는가로 인해 때때로 욕망 자체가 누명을 뒤집어쓰지만, 잘못된 것은 그 행위일 뿐 욕망이 아니다.


우리는 금기시된 것에 무의식적으로 끌리고, 억눌러둔 욕망은 종종 그런 금기시된 것을 향한다.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떳떳하고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적절한 표출 수단을 발굴해야 한다. 자신이 충분히 즐거움을 느낄 수 있는 건전한 행위를 찾아, 욕망의 방향을 전환해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것을 위해서는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찾아내는 것이 우선이다.




대부분의 그릇된 욕망은 자신의 근본적인 모습을 무시하는 것에서 만들어진다. 동전의 양면처럼 우리의 내면에는 천사와 악마가 공존한다. 우리는 이 중 천사의 모습만을 인정하고 악마 같은 성향은 부정하지만, 이것은 원래부터 존재했고 앞으로도 존재할 것이기 때문에 부정하고 또 부정해도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유일한 방법은 내 안에 악마적인 면도 존재함을 인정하고, 그것을 보다 안정적이고 부작용이 덜한 방법으로 풀어낼 수단을 찾아내는 것이다.


내 안에 존재하는 현실적인 문제를 부정할수록 문제는 더욱 커진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정면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원인을 바깥으로 돌릴수록 문제의 근본적 해결로부터 멀어진다. 우리의 진짜 문제는 우리 안에 있고, 그것을 해결할 방법 또한 우리 안에 있다.


중요한 것은 ‘나는 완벽하다.’는 식의 망상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 망상에 빠져있는 한 우리는 언제까지고 환상이라는 거울에 비친 이상적인 모습만을 바라볼 뿐이다. 백설공주의 모습을 비춰주는 거울 앞에서 마녀는 자신의 본모습을 보지 못한다. 내가 아름답기만 할 것이라는 모순된 시각에서 벗어날 때 진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고, 우리가 가진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기 시작한다.


언제나 중요한 것은 ‘자각’이다. 문제를 정확히 보지 못하면, 결코 제대로 된 해결책은 나오지 않는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부족한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용기와 그런 나를 수용할 수 있는 열린 마음이다. 과도하게 높이 책정된 자신에 대한 기준을 조금 느슨하게 해 줄 필요가 있다. 턱밑까지 바싹 쪼여둔 단추를 하나 정도는 풀어줄 필요가 있다. 숨 쉬는 것이 답답한 사람은 결국 단추를 푸는 것이 아니라 단추를 뜯어버리게 된다.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추를 뜯는 것이 아니라 푸는 것이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스스로를 옥죄여두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상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필요할 때는 단추를 풀어주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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