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시간 잠들어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눈 깜짝할 새로군요. 시간을 두 번 접어서 한 점에서 만난 느낌이에요. 감각할 수 없는 나의 일부만 그 공백을 서늘하게 알아차려요. 손으로는 잡을 수 없는 그림자처럼. 그럼에도 분명 존재하죠. 제가 기억하지 못하는 시간도 마찬가지겠죠. 끔찍하리만치 가벼워요. 저 아이들이 가지고 노는 풍선처럼 툭 치기만 해도 공중으로 붕 떠올라요. 그리곤 바람에 제멋대로 날아가 버릴 테죠. '지금'의 감각이 딱 그래요. 부유하고 있죠. 이 순간은 언제든 과거나 미래로 변할 수 있어요. 그러면 깨닫죠. 아, 내가 알던 시간은 허구나 착각이었구나. 그래서 믿을 수 없어요. 내가 지금을 살고 있다는 감각을. 의심하고 또 의심하죠. 옆사람과 같은 시각을 공유한다는 믿음을 되찾고 싶었어요. 그 믿음이 모래성처럼 부서질 때마다 혼란스러웠죠. 이제는 그 혼란마저도 익숙하지만... 나는 열두 시간이 아니라 나흘 반을 잠들어 있었구나. 저 해는 어제저녁에 지던 해가 아니었구나. 시간을 잃는 건 흥미로운 경험이에요. 잠든 동안에도 몸은 홀로 나이 들어요. 지금의 부유가 반복될수록 몸과 마음의 시간은 뒤틀리고 사이가 벌어져요. 저는 제가 살아온 시간보다 훨씬 더 늙은 상태죠. 잠들기 전에 항상 일기를 써요. 정확히는 유서에 가깝지만요. 첫 줄은 항상 이래요. 내가 만약 다시 깨어나지 못한다면. 처음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여덟 살 때였죠. 이미 그때 제 나이는 열여섯이었지만요. 잠이 왔냐고요? 후후... 편의상 '잠'이라고 표현했지만 제가 잠드는 방식은 여느 일반인들과는 달라요. 저는 스스로 잠들지 않아요. 동력이 끊어지는 것과 유사하죠. 한밤중에 갑작스럽게 정전된 것처럼 온통 캄캄해지죠. 보이지 않는 선을 통해서 에너지를 공급받고 있는 것 같아요. 역시 믿을 수 없는 표정이군요. 당신도 저를 망상이나 조현병 환자쯤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죠. 맞아요. 이건 가정일 뿐이고 증명할 수도 없죠. 하지만 생각해보세요. 그저 눈을 한 번 깜빡였을 뿐인데 모든 것이 바뀌어있다면. 이미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흐른 뒤라면. 당신은 그런 기분을 상상할 수도 없을 거예요. 저도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걱정스러운 눈으로 저를 지켜보던 사람들이 설명해 주었지만 이해할 수 없었어요. 아빠가 저를 안고 엉엉 우는 것 조차도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그러더군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냐고요. 저는 되물을 수밖에 없었어요. '무슨' 일을 말씀하시는 거예요?라고. 잠깐의 공백이 머물렀고 의사는 아빠를 데리고 병실 밖으로 나갔죠. 그리고 돌아왔죠. 아빠는 아까보다 더 처참한 얼굴로 저를 바라봤어요. 이유를 몰랐지만 기분은 썩 나쁘지 않았어요. 아빠가 제게 그토록 관심을 준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분들은 제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아주려고 하셨던 것 같아요. 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죠. 왜냐면 제가 잃어버린 건 기억이 아니라 시간이었으니까요. 그저 눈을 감았다 떴을 뿐이라는 걸 아무리 설명해도 그들은 받아들이지 않았어요. 나중에는 아빠마저도 저를 설득하려 했죠. 무척이나 섭섭한 얼굴로요. 마치 제가 치료에 협조하지 않는다고 질책하는 것처럼.
그때 그녀의 눈빛이 흐릿해졌고 눈동자의 불이 꺼졌다. 걷던 자세 그대로 멈춘 그녀를 나는 바라보았다. 그녀는 힘을 잃고 스르륵 무너졌다. 나는 그녀를 품에 안았다. 나는 그녀의 가슴에 귀를 갖다 댔다. 두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너무나 크고 명확해서 안과 밖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어지럽고 뜨거워졌다. 나는 어느새 잔잔하고 규칙적인 진동보다도 훨씬 더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감각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때 분명 같으나 다른 움직임이 느껴졌다. 슬며시 고개를 들었을 때 나는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아까와는 다른 불이 선명하게 들어온 눈동자였다. 나는 얼굴을 붉혔다.
깨어나셨군요.
네. 어쩐지 아쉬워 보이는 건 착각이겠죠?
나는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예전에는 낌새조차 느낄 수 없었어요.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게 되었죠. 제가 언제 '잠'들 지를요.
방금도 뭔가를 느꼈나요?
그전에 확인할 게 있군요. 제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나요?
음... 1분 정도 되었을까요?
정말인가요?
나는 잠시 그녀를 바라보았다.
제가 거짓말을 한다는 건가요?
저는 알 수 없으니까요. 지금이 정말로 언제인지.
시간을 보면 알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녀가 코웃음 쳤다.
몇 사람만 입을 맞추면 저 하나 속이는 건 일도 아니니까요. 하... 좀 전에도 뭔가를 느꼈냐고요? 네. 느꼈죠. 손 끝에서 가늘고 기다란 무언가가 죽 뽑혀나가는 느낌이 들었어요. 마치 주삿바늘처럼요. 그러곤 눈을 떴고 제 가슴에 얼굴을 파묻고 있는 웬 정수리가 눈앞에 보이더군요.
나는 고개를 모로 비틀며 헛기침을 했다.
그렇게 신경 쓸 것 없어요. 이제는 놀랍지도 않으니까요. 제가 잃어버렸던 시간 동안 제 몸뚱이는 좀 전과 마찬가지로 완전한 무방비 상태였을 테니까요. 죽지 않고 여태껏 살아있는 것도 기적일 테죠.
그녀는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는 것들이 있어요. 바로 그 시선. 지금 당신이 짓는 그 표정과 눈빛. 그 걱정 가득한 눈동자들이 저를 불안에 떨게 만들어요. 전혀 비를 맞지 않는 그들 속에서 저는 속옷은 물론 내장까지 흠뻑 젖은 채로 서 있죠. 같은 장소에서 같은 시간을 살고 있지만 이방인처럼 어색해요. 숨 쉬는 것조차 아귀가 맞지 않는 주전자 뚜껑처럼 덜그럭거리죠. 답할 수 없는 질문들에 둘러싸이면 왠지 죄스러워져요. 당연히 알아야 할 것들을 모르는 바보 천치처럼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지죠. 모르겠다고.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고. 기억의 공백 따위 전혀 느낄 수 없다고. 저는 진실을 말했을 뿐인데 그들은 저를 너무나 안타깝게 바라봤어요. 저는 그 눈이 싫어요. 마치 인수분해를 아무리 설명해도 이해 못 하는 학생을 보는 수학 선생님처럼요. 짠하고 애틋하고 티 나지 않게 한심해하죠. 제가 없는 곳에서는 제 이야기를 하며 한숨을 쉬겠죠.
맞아요. 저는 위태로워요. 어쩌면 그게 당신이 제 곁에 머무는 이유겠죠. 제 상황이 녹록지 않다는 거 잘 알아요. 힘든 일이란 것도 알아요. 하지만 그런 슬픈 표정은 싫어요. 저를 정말 위하고 원한다면 지금이 또다시 멀리 도망쳐버리기 전에 저를 잡아주세요. 저를 꼭 안아주세요. 지금 분명히 뛰고 있는 제 심장소리를 들어주세요. 제가 당신을 느낄 수 있게. 엎질러져 흘러내리고 증발할 시간 대신 제가 감각할 수 있는 시간 속에 함께 머물러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