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나기

소설

by 작가 전우형

감각이 딱지처럼 떨어지지 않아요.

그녀는 자꾸만 스친 곳을 비볐다.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그녀의 얼굴에는 그날의 당황과 혐오가 새것처럼 묻어 있었다.

사무실이 너무 좁아서 서로 닿지 않을 수 없었죠. 나이 많은 남자 선배가 있었어요. 군대를 마치고 복학한. 그 선배의 팔이 제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저는 입을 틀어막아야만 했어요. 비명을 지를 것 같았거든요. 조금은 새어나갔었나 봐요 공기가 순간적으로 어색해졌죠. 그 선배는 나를 노려봤어요. 그러곤 거칠게 밀치며 밖으로 나갔죠. 따라나가거나 사과하지는 않았어요. 이상하게도 그때는 정말 그러고 싶지 않았어요.

그녀는 몸을 뒤척이며 돌아누웠다.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말했다.

왜 아무것도 묻지 않나요? 그 안에 든 것들이 궁금해요. 들어가 보고 싶어요. 당신의 눈을 보면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요. 하지만 저는 용기가 없고 당신은 열쇠를 잃어버렸군요.

내가 턱을 비볐을 때 그녀는 정색하며 나를 밀어냈다.

따가워요.

그러고 보니 면도를 안 했군.

스위치를 올리자 윙 하는 소리가 났다. 턱에 갖다 대자 무언가가 갈려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전기면도기를 아래 턱끝에서 위쪽으로 볼과 귀밑을 돌아 인중으로 천천히 움직여 갔다. 까슬한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다시 그녀에게 다가가 턱을 비비려 했다. 그녀는 잠들어 있었다. 나는 그녀의 이마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그녀가 말했다.

전 불은 라면이 싫어요. 밀가루 심이 남았을 때 불을 끄죠. 찬 밥 한 그릇이면 돼요. 면이 젓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면 밥을 말아요. 숟가락으로 네 등분을 내요. 밥이 라면 국물에 완전히 풀어지기 전에 얼른 떠먹죠. 저는 딱딱한 게 좋아요. 너무 무르면 맛을 느낄 수 없어요. 물렁한 마음에 한번 발을 잘못 디디면 다시 빠져나올 수 없을까 봐 두려워요. 자기도 모르게 늪 한가운데로 다가가다 보면 어느 순간 도저히 돌아나갈 수 없다는 걸 느끼는 것처럼요.

그녀는 소리 없이 입술을 비틀었다.

우습죠? 맞아요. 저는 늘 도망칠 생각부터 해요. 앉을 때도 뒤를 먼저 살피죠. 언제든 의자를 밀고 일어설 수 있는지. 사랑은 무서워요. 한번 빠지면 그의 모든 것이 좋아지고 마는 저 같은 사람은 자기도 모르게 스르륵 모든 걸 내려놓을지도 모르니까요. 저에게는 달아날 곳이 필요해요. 뻥 뚫린 하늘이 보고 싶어요. 구름이 무겁게 저를 짓눌러요. 폐가 절반으로 쪼그라든 것 같아요. 시원하게 숨을 쉰 게 언제인지 이제는 기억조차 나지 않네요. 침투하는 마음이 있어요. 저는 막을 방법을 모르겠어요. 그런데 어쩌면, 이런 무방비를 바라 왔던 것 같아요. 무성하게 뻗어 나온 저 고무나무 잎들처럼. 저는 어딘가로 마음껏 손을 뻗고 싶었나 봐요.

그녀는 한참을 말하다 잠이 들었다. 그녀의 어깨가 숨소리와 같은 속도로 쌕쌕거렸다. 소나기는 도망칠 수 없었다. 달리는 속도보다 더 빨리 쏟아지고 멈춰버리니까. 우산을 매번 챙겨 다니는 일도 우습다. 소나기는 맞으면 된다. 맞으라고 내리는 비는 그래도 된다. 잠이 오지 않았다. 따뜻한 라떼 한 잔을 탔다. 우유가 부드럽고 쌉싸름했다. 아래로 갈수록 진한 맛이 올라왔다. 소나기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빗소리가 들리지 않네요.

그녀가 뒤척였다. 덮고 있던 담요가 흘러내렸다. 그녀가 어깨를 움츠렸다. 다행히 지금은 어깨를 손으로 닦아내지 않았다. 나는 담요를 주워 그녀의 어깨를 덮어주었다.

고마워요.

잠이 안 와?

그녀는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안 오는 건 아니에요. 잘 깨는 것뿐이지.

이제 갈까 해.

그래요.

나는 일어나지 않는 그녀를 두고 조용히 집을 나섰다. 소나기가 그쳤으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