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아이 낳았을 때 그런 생각을 했다. 이제 엄마가 되었구나. 아이가 다 클 때까지 나는 아파도 안되고 다쳐도 안 되겠구나. 어른이 된 건 모르겠고 그때부터 아이한테 밀려 올라가듯 억지로 나이를 먹었다.
- 김형경, 꽃피는 고래, p.96 -
젊은 나이에 부모가 되어'버린' 사람들은 '아이한테 밀려 올라가듯 억지로 나이를 먹었다'는 말의 의미를 안다. 아직 나도 어린데, 뭐가 뭔지 모르겠는데, 아이는 태어났고 부모는 수습기간이 없다. 어른이니 부모니 하는 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그렇게 현실을 버티다 보면 어른은 아닌데 이미 나이 든 내가 있다.
내가 부모가 되었을 때 옛 친구들을 그제야 입영통지서를 받아 든 채로 울상을 지었다. 휴학은 언제 하고 복학은 언제 하니 와 같은 것들이 그들의 주된 고민이었다. 나는 나보다 나이 많은 그 '어린' 친구들을 위로하는 한편으로 복귀하면 처리할 업무들의 목록을 곱씹느라 정신이 어지러웠다. 집에 가면 육아에 지친 아내와 유난히사람을 많이 찾던 첫 아이가 기다렸고 그마저도 얼굴을 보는 일조차 힘들었다. 잦은 출동으로 땅에 발붙인 날이 손에 꼽던 시절이었다. 기다렸던 희망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나이와 다르게 이미 너무 많은 일들이 켜켜이 쌓여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한숨이 자꾸 나왔다. 물러설 곳이 없다고 스스로 못 박았던 건 그런 한숨이 너무 막막한 탓이었을지도 모른다.
할아버지는 국제포경위원회의 최초 약속을 믿었다고 했다. 오 년간의 일시 금지기간이 지나면 1990년에 꼭 바다에 나갈 수 있을 거라 기대했다. 고래배를 내수면 깊이 옮겨놓던 날 함께 고래 잡던 할아버지 아들이 처용포를 떠났다. 일본이나 노르웨이에 가서 포경선을 타겠다고 했다. 그 나라들은 국제포경위원회의 결정에 동의하지 않은 채 고래잡이를 계속하겠다고 버티고 있었고, 그때도 고래를 잡았다. 나라가 힘이 없으니 국민들도 힘이 없는 거야 왜정 때부터 알았다.
"그런데 약속했던 1990년이 되어도 국제포경위원회는 약속을 지키지 않더라. 고래잡이를 재개하기는커녕, 영영 금지한다고 공표했지. 그해에 내가 많이 늙었다."
- 김형경, 꽃피는 고래, p.142 -
'그해에 내가 많이 늙었다.' 이 말이 너무 아프게 들렸다. 장포수 할아버지처럼 확 늙어버린 해가 내게도 몇 번 있었다. 우울증이 오고, 잠수함 부대를 제 발로 걸어 나온 뒤, 나도 나를 이해할 수 없었다. 참 외로웠다. 세상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그날따라 유독 날이 너무 좋아 보였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여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해 내게 흰머리가 났다. 서른 되던 해였다. 고작 임관한 지 8년 만에 나는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이대로 죽는 게 나을 거라고 정말 생각했었다. 그리고 그건 기정사실처럼 여겨졌다. 그래서인지 가끔 아직도 내가 살아있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사관학교 첫 해도 그랬다. 가입교 훈련 중 다쳤던 다리가 재발하고 어찌 된 일인지 육 개월을 절름발이로 지내던 그해, 나는 마른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무릎을 부여잡고 몇 날 며칠을 울었다. 내게는 돌아갈 집이 없었다. 부모님은 가입교하던 날 사관학교 정문 앞 허름한 식당에서 소고기를 사주셨다. 그때 두 분이 나란히 앉은 모습이 내가 기억하는 부모님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날 부모님은 내게 아무 말도 안 했지만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날로 내게는 돌아갈 집이 사라졌다는 걸. 죽으나 사나 여기서 버텨야 한다는 걸. 반년 만에 나간 첫 휴가를 무릎 수술과 재활로 보내고 목발을 짚은채 복귀했다. 모든 훈련에 똑같이 참여할 수 있었던 건 그로부터 한 달 뒤였다. 사관학교에 입교한 뒤 8개월 만의 일이었다. 그해 나는 뒤떨어지고 아픈 이의 마음을 배웠고 동시에 참 많이 늙었다. 스물 되던 해였다.
나는 세상에서 제일 질기고 무서운 게 첫정이다. 우리 영감 끝까지 나한테 마음을 주지 않았지. 당신의 그 첫정 때문에. 영감한테는 따로 첫정이 있고, 내겐 영감이 그 더러운 첫정이어서. 영감은 죽는 날까지 첫정을 품고 있다가 무덤 속까지 가지고 갔지.
열다섯에 영감한테 시집왔다. 고향은 함안이지. 본도 함안이고. 우리 아버지 독립운동한다고 만주 가 소식 없고, 엄마 혼자 자식 데리고 고생 많았다. 나 하나라도 배곯지 말라고 시집보낸다는데, 안 가겠다고 못했다. 입 하나라도 덜어야 했으니까.
첫눈에 영감이 좋더라. 서른 넘은 홀아비라도 내 좋으면 됐지.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불렀다. 죽은 전처 제사 지내는 것도 좋았다. 아들 낳으면 정이 옮겨간다는데 나는 안 그랬다. 아들은 아들대로 이쁘고 영감은 영감대로 좋았지.
- 김형경, 꽃피는 고래, p.134 -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른 건 어떤 기분일까? 그게 그 더러운 첫정일까. 아니면 그 더러운 첫정을 잊지 못하는 남편에게 사랑받길 바라는 어린 아내의 마음일까.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건 힘든 일이다. 그런 거지 같은 일도 없다.
스님은 바랑을 어깨에 메며 할아버지가 누워 있는 방을 바라보았다. 그런 다음 할머니 눈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 눈빛이 몸을 가득 메우는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처사님을 보내드리십시오. 보살님이 붙잡고 있어 저분이 떠나고 싶어도 가지 못합니다."
할머니는 스님 말씀이 서운했다. 저 양반이 세상을 뜨고 싶어 한다고? 내가 지극정성으로 보살피고 간병했는데 나를 떠나고 싶어 진다고? 설움이 복받쳤다. 할머니는 스님이 대문을 나서기도 전에 울음을 터뜨렸다. 널뛰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을 때 의식 없는 남편 손을 잡고 물어보았다.
"영감, 정말로 돌아가고 싶소?"
남편이 대답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저 답답한 마음에 혼잣말을 했을 뿐이다. 그런데 힘 없이 늘어져있던 남편 손에 힘이 들어갔다. 천천히 손바닥을 그러쥐더니 완강하게 그 상태를 유지했다. 힘은 할머니의 손바닥으로 전해져 팔뚝을 타고 올라가 등골까지 전달되었다. 온몸으로 진저리가 지나간 후에야 할머니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았다. 서럽고 서운해서 남편을 붙들고 한나절을 울었다. 그다음 날 마음을 바꾸었다. 이제 그만 갈길 가소. 나도 여한은 없소. 할아버지는 사흘이 되기도 전에, 바로 그날 밤에 세상을 떴다.
"나중에 알았지. 그 양반 목숨 아까워 붙들고 있었던 게 아니었다는 거를. 과부 되기 싫어서, 혼자 살기 겁나서 잡고 있었던 거지. 첫정한테만 주고 나한테는 안 준 것, 그걸 받아내고 싶었던 거다. 내 욕심 때문에 영감이 오래 고생했지."
- 김형경, 꽃피는 고래, p.152
떠나는 이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야 홀로 남겨질 이의 한결같은 바람이겠으나 그걸 또 저렇게 묻고 답을 확인하는 이의 마음은 또 어떨까. 비슷한 마음은 다른 대목에서도 읽을 수 있다.
아무 쓸모없더라도 할아버지한테는 고래배를 간직하는 행위 그 자체가 필요했던 것이다. 고래배를 할아버지 곁에 묶어놓는 일이.
- 김형경, 꽃피는 고래, p.150 -
잊지 않기 위해, 잊히지 않기 위해 사람은 뭔가 붙들 게 필요한지도 모른다. 그게 병들어 의식조차 없는 남편이건 앞으로 출항할 일 따위 없는 고래배 건 남겨진 사람들에게는 그게 전부다. 그 전부가 정말 전부였는지 아닌지는 수없이 기다리고 버티다가, 결국 억지로 떼어내듯 보내고 난 뒤에야 알 수 있을까. 그러니 두려워서라도 붙들 수밖에 없다. 정말 아무것도 안 남을지도 모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