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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Aug 23. 2022

김형경 '꽃피는 고래' part 3

독서 에세이

할머니는 늘 그랬듯이 내가 밥을 먹는 동안 맞은편에 앉아 숙제를 했다. '제니 에미 보거라' 밑에는 '너도 자식 키워봤으니 이제 알겠구나. 에미 창자는 개도 안 먹는다는 말. 하도 속이 썩어 문드러져서 그렇지'라고 쓰여 있었다. 무심히 읽은 그 대목에서 뜨거운 것이 올라올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찌개국물을 떠서 밥과 함께 삼켰다. 엄마 아빠도 그랬을까. 알 수 없었다. 내가 엄마 아빠가 되어보기 전까지는.

- 김형경, 꽃피는 고래, p.232 -


커가는 자식 바라보는 부모 마음이야 대견하고 조마조마하고 애가 타겠지만. 가족이고 식구고 또 배 아파 낳은 자식이라고 해서 마냥 이쁘기만 한 것도 아니라. 속상한 일도 많고 서운하고 섭섭한 일 투성이지만. 막상 또 부모라서, 그 지긋지긋한 먼저 산 인생이라서, 내가 안 참으면 누가 참고 버티겠나 하며 이를 악문다. 그런 게 또 부모의 의무고 사랑인가 싶어서. 아프고 답답한 티도 못 내고 속으로만 푹푹 삭히니 그게 속이 썩어 문드러지는 거고, 부모들이 자꾸 까스 활명수를 들이붓는 이유다. 돌덩이 같은 한이 내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 이 병은 영어로도 anger disease 따위가 아니라 'hwa-byung'이라고 발음 그대로 번역되는 조선 풍토병 '화병'이다.


나는 계속 궁금해하고 있던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이 바위그림이 왜 중요해요?"

"기억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기억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할아버지한테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지난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는 게 나은지, 기억하는 게 좋은지.

"기억하는 일은 왜 중요해요?"

"그것을 잘 떠나보내기 위해서지. 잘 떠나보낸 뒤 마음속에 살게 하기 위해서다."

나는 다시, 다른 방식으로 물어보았다. 기억하는 일이 힘들고 따가워도 기억해야 하는지. 할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기억하는 법을 몰라서 저 물건들을 오래 붙잡고 있었다. 내 인생을 낡은 물건들을 쌓아두는 창고로 만든 셈이지. 잘 떠나보내고서 기억하고 있으면 되는걸."

- 김형경, 꽃피는 고래, p.236 -


밀어둔 기억들을 뒤늦게 꺼내어보려 했지만 손이 닿지 않았다. 손을 최대한 밀어 넣고 한참을 뒤적거렸다. 그러나 묻어 나오는 건 먼지뿐이었다. 유독 기억나지 않는 시간들이 있었다. 기억하는 일에 문제가 생겼던 순간들. 고통스럽고 힘겨워서 남기는 것도 떠나보내는 것도 불가능했던 순간들. 빛이 없어서인지 내가 눈을 감아서인지. 추상화 같은 기억 속에는 몇 년 사이에 기억하는 장면이 손에 꼽을 만큼 적다. 딱 그만큼만 살아 있었던 게 아니라면 시간의 대부분은 기억의 그물을 그대로 통과해 버렸던가 그도 아니라면 그물 자체를 잃어버렸던가. 둘 중 하나다.


언니가 지당하신 말씀 같은 격려나 희망을 이야기하지 않을수록 나는 점차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언니도, 나보다 두 배쯤 더 산 언니도 여전히 악몽을 꾸거나 갈등한다는 게 위안이 되었다.

- 김형경, 꽃피는 고래, p.250 -


뻔한 충고보다도 내게 사소한 위안이 되는 건 그도 나와 같다는 걸 알게 되는 순간이다. 나는 결핍이 많은 인간이다. 글을 쓰는 건 그런 결핍들을 조금이나마 채우려는 몸부림이고. 그럼에도 쓰는 내내 불안과 고독, 그리움과 외로움을 느낀다. 동시에 그것들을 달래기 위해 연료를 태우듯 글을 쓰는 것이고.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 암막커튼처럼 하늘을 뒤덮고 있던 구름 떼가 슬그머니 걷혔다. 쏟아지는 빛무리보다 더 빠른 속도로 그림자들이 치솟기 시작했다. 희미하던 그림자들은 점차 선명해지고 높아졌다. 여름은 이 시간부터 카페에 해가 든다. 겨울이었다면 이미 마지막 햇살이 분무기처럼 흩뿌려지다 남색 이불보에 뒤덮일 시간이지만.

나는 빈자리에 아른거리는 잔상을 본다. 메마른 미소 뒤로 공간을 채우던 눈부신 빛을 본다. 심장이 따뜻해지고 숨소리가 거칠어진다. 바다로 돌아간 장포수와 고래배처럼. 허공에 너울 치던 빈 바다처럼. 나는 이 순간을 기억하는 일을 멈추지 않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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