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단절된 삶이 가장 불행한 삶이다. 단절은 내면을 들여다보지 못하게 한다. 마음 상태를 살피지 못하며, 마음밭에 물을 주지 못한다. 그래서 타인의 관심을 갈구하게 되고, 자신으로부터 유리된 공허함과 외로움을 타인을 통해 채우려 든다. 이런 마음 상태는 스스로를 ‘부정’하게 한다. 자신에 대한 신뢰가 없으므로 타인의 평가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그들의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계속해서 가면을 쓴 채 살아가는 악순환에 빠진다.
언행은 마음을 비추는 거울이다. 우리가 내뱉는 말의 근원은 마음에 있다. 우리를 해롭게 하는 것은 마음속까지 스며들어온 악의다. 악의란 거짓을 스스로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자신을 살펴보지 못하는 것이며, 문제의 원인을 외부에서 찾는 것이다. 남 탓은 남을 탓하기에 나쁜 것이라기보다, 관심을 외부로 돌리기에 좋지 않다.
결과보다 그 일을 행한 마음, 그 속에 숨은 의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비록 누군가를 해하지 않았더라도 그를 해치려는 의도로 행동했다면(얼마 전에 구급차를 멈춰 세웠던 그 택시기사로 인해 응급차로 후송 중이던 환자가 사망했던 것이 큰 이슈가 되었다. 하지만 만약 그 환자 분이 사망하시지 않았더라도 이것은 그가 평소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었는지에 관해 심각하게 성찰해보아야 할 문제다.), 그가 실제로 다쳤는지와 관계없이 이미 우리는 누군가를 죽인 것이다. 마음속에 악의가 들어서면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무의식적으로 새어 나온다. 적절한 계기를 만나면 억압된 감정들은 자의적으로 움직여 우리를 당황스럽게 한다.
도로에서 서행하는 한 자동차가 나의 앞을 막고 있었다. 제한속도가 70km/h인 도로에서 50km/h로 달리는 차량을 보며 괜한 짜증과 불편함, 분노가 치솟는다. 이 감정의 원인은 누구에게 있을까? 한번 생각해보게 된다. 도로에서 길이 막히는 상황은 한두 번 일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때마다 분노가 치솟지는 않았다. 되돌아보면 그 분노는 나의 조급함에 있었다. 당시 나는 시간에 쫓기고 있었고, 1분 1초가 아쉬운 상황이었다. 이러한 나의 상황이 조급한 마음을 강화시키고, 그 분노와 짜증이 내 앞에 있던 차량에 투사되었을 뿐이다. 수시로 신호에 걸리는 시내주행에서 속도는 도착시간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앞질러갔던 차들을 잠시 후 다음 신호에서 다시 만나는 상황을 많이 겪어보았을 것이다. 평소에 급히 달리는 차들을 보며 ‘뭐가 저렇게 급하다고... 어차피 도착하는 시간은 별반 차이도 없는데... 쯧쯧...’ 하며 혀를 찰 때도 있었지만, 때로는 앞을 막은 차를 보고 분노가 치밀 때도 있는 것이다. 이것은 상황의 문제라기보다 내가 어떤 마음을 갖고 있었는가의 문제다. 마음가짐과 태도는 사고의 방향성을 정하는 것이기에 대단히 중요하다.
마음에 악의가 깃들면 말과 행동에 그것들이 묻어 나온다. 이것은 빨간 잉크로 채워진 펜으로 쓴 글씨가 빨간색인 것처럼 매우 당연한 결과다. 우리의 말과 행동은 끊임없이 생각과 감정의 영향을 받는다. 갈등으로 감정이 격해진 상황에서 우리는, 주위 사람들에게 감정적인 사람으로 보이지 않기 위해 마음을 다스리려고 최선을 다한다. 여타의 노력으로 당장 눈앞의 상황은 간신히 넘길 수 있었지만, 이미 감정 주머니는 찰랑찰랑할 정도로 차오른 상태다. 이처럼 억압된 감정은 엉뚱한 곳에서 폭발한다. 그것은 별 뜻 없이 어깨를 툭 친 동료일 수도 있고, 그날따라 때를 쓰는 자녀일 수도 있다. 이처럼 대면하는 사람, 사건, 상황은 평소와 다르지 않지만, 그에 대한 반응은 큰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그 원인은 바로 우리의 마음 상태에 있다.
마음 상태는 외부의 자극에 대한 반응을 변화시키며, 억압된 감정은 그 변화의 폭을 더 크게 만든다. 누군가가 굉장히 미운데, 도저히 그 사람을 미워할 수 없는 관계에 있다면(가족이나 친구, 또는 부모, 직장 상사와 같은), 또는 나의 직위나 직업의 특성이 누군가를 미워해서는 안 되는 종류의 것이라면(종교인이나 고위 정치인, 유명 연예인과 같은), 이러한 증오는 대체로 표출되지 못한 채 억압되고, 마음 상태에 영향을 미친다.
뿜어내지 못한 증오는 마음밭에 씨앗으로 고스란히 심어지며 증오의 새싹을 피울 양분을 축적하며 때를 기다린다. 이런 상황에서 비난받을만한 짓을 저지른 사람을 만나면(선배를 가두고 가혹행위를 저질러 온 후배 커플, 연쇄살인마, 아동 성추행범과 같은), 그를 마음껏 미워해도 아무런 도덕적 책임이나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면(특이한 취향 또는 도덕적 문제가 드러난 유명 연예인, 잘못된 정책을 추진했던 정치가나 고위 공무원에 이르기까지), 혹은 자신의 공격적이거나 드러나서는 안될 행동이 절대 드러나지 않을 확신이 든다면(큰 실수를 저지른 사람이나 인사평가나 진급이 달린 직원, 자신을 거부할 수 없는 비서나 학생과 같은), 마음속에 잠재되어 있던 증오와 억제되었던 공격성이 마음껏 뿜어져 나오기 시작한다.
현대사회에서 이런 예를 수도 없이 볼 수 있다. 댓글의 수준은 이미 우리가 통상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선 지 오래다. 구하라, 셜리와 같이 악성 댓글로 인해 연예인들이 무자비하게 공격당하고 그로 인해 목숨을 끊는 사례를 우리는 심심찮게 접한다. 선배 선수들이 저항하지 못하는 후배를 괴롭혀 자살로 이어지게 하거나 대학교수가 수년간 같은 과 학생을 성추행하는 등 이러한 사례는 이미 주위에 만연한 지 오래다.
인터넷, SNS 댓글은 눌러두었던 공격성을 뿜어내기에 최적의 장소다. 자신의 존재가 직접적으로 노출되지 않으며(물론 요즘은 조사하면 드러난다. 예전처럼 익명성이 강하게 보장되지는 못한다.), 인터넷이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직접 대면하지 않기에 얼마든지 비난과 공격적인 언어, 인신공격들을 내뱉을 수 있다. 표현의 자유로 치부되기 힘들 정도의 원색적인 비난들이 난무한다. 이런 말들을 상대방과 직접 대면한 채로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아주 높은 도덕성을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누군가를 괴롭히는 것도 마찬가지의 문제다. 화가 나도 웃어야 하는 사람들일수록 마음의 병이 생기거나 사회적 파문을 일으킬 정도의 충격적인 사건을 저지른다. 억압된 감정의 존재가, 악의가 깃든 마음 상태가 인간을 궁지로 점점 몰아넣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자신과의 연결통로를 다시 구축해야 한다.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살필 수 있어야 한다. 인간은 부족한 구석이 많은 불완전한 존재다. 하지만, 사회에서 요구하는 기준은 점차 높아지고, 각자가 처한 사정들로 인해 '완벽한 존재'로 포장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자신을 포장하려는 시도가 많아질수록, 그 반작용으로 본래 모습에 대한 자신감은 줄어든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두려워지며, 그랬다가는 모두의 비난을 면하지 못할 것 같이 느껴진다. 그동안 잘 포장해온 자신의 커리어나 이미지, 사회적 가면이 너무나 두터워져 실제 자신과의 괴리가 너무나 커져버린 것이다. 이처럼 자신을 믿지 못하는 마음이 단절을 만들어낸다.
타인과 대중은 때때로 변덕스럽고, 그 영향으로 나의 정체성도 하늘과 땅을 오간다. 이런 시간들이 길어지면 내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기억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많은 것들이 공허해지는 순간이 온다. 이처럼 마음의 방어막이 약해지고 나면, 별것 아니게 여겼던 댓글과 타인의 평가들이 칼자국이 되어 마음을 헤집어대기 시작하는데, 이상하게도 그런 말들을 뿌리칠 수가 없다. 점점 더 그 말들을 집요하게 쳐다보게 되고 입지 않아도 될 상처를 스스로 만들어낸다. 자신과 단절된 시간이 길었기에 상처 입은 자신을 돌보는 법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상처를 치유할 방법을 모른다. 가해자도 나, 피해자도 내가 되어 자책의 늪에 빠진다. 화는 나지만, 대상을 찾을 수 없다. 이러한 화는 내면을 향하고 강한 악의로 자리 잡는다. 악의의 방향이 바깥을 향하지 못할 정도로 절망적일 때, 결국 최종 선고를 내린다. 자기 자신을 해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모순적인 상황에 빠지기 이전에 자신과의 연결을 되찾아야 한다. 그것은 모든 것에 대한 관심과 기준을 다시 나에게로 회귀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