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와 '기더기', 멸칭이 생겨난 이유와 배경

언론이 휘두르는 마술봉의 최면 효과로부터 벗어나자.

by 작가 전우형

‘자유 표면효과’라는 것이 있다. 어떤 공간에 연료 또는 물이 완전히 채워져있지 않을 때 발생하는 효과로, 선박의 요동에 따라 채워지지 않은 공간으로 액체가 따라 움직이며 선박의 요동을 더 크게, 위험한 상태로 만드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선박의 요동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그 공간을 완전히 채워 안정성을 확보하는 것이 필요하다.


나는 ‘자유’라는 단어에 종종 끌리곤 한다. ‘자유’ 표면효과. 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자유는 긍정적인 의미의 자유가 아니다. 가득 채워지지 않은 그 무엇은, 외부의 영향에 쉽게 휩쓸리며 실질적으로는 ‘자유’를 잃어버린 상태를 초래한다. 그 흔들림과 휩쓸림마저 일말의 자유라고 표현한다면 자유 표면효과의 자유는 껍데기의 자유이며, 우리 내면과 외면이 서로 분리되어 따로 움직이게 되는 실질적 ‘부자유’의 상태라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더럽다, 역겹다'라고 느끼게 될까? 그 대상으로부터 최소한의 도덕성조차 느껴지지 않는 경우다. 인간으로서 어쩌면 저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명확하게 법에 명시된 적절한 죄목을 붙일 수 없을 때, 저 OO은 정말 인간쓰레기야 라는 말이 나온다. 나는 ‘기레기’, 심지어는 ‘기더기’와 같은 멸칭들이 만들어진 이유와 배경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악행을 저지른 사람을 ‘범죄자’라고 부르거나 ‘나쁜 O’ 등으로 부른다. 하지만 우리가 누군가를 ‘쓰레기’나 ‘구더기’와 접붙여 칭하는 것에는 평범한 나쁨과는 다른 어떤 것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 단어에 내포된 더러움, 역겨움, 상종하기도 싫은 그런 느낌을 기자들에게서 느끼고 있다는 일종의 가치판단의 결과일지도 모른다.


언론 또는 기자는 수많은 사람들의 공통된 이름이다. 같은 직업인으로 일하는 모든 저널리스트들이 ‘기레기’ 또는 ‘기더기’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런 언론의 저품질 사태는 너무나 오래 지속되어왔고 좀처럼 자정작용이 이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무리가 되어 달려가는 야생마들 중 일부가 이쪽 방향이 아니라고 생각해도 그들은 발걸음을 돌리지 못한다. 이미 파국의 흐름을 타고 일방적으로 달리는 그 무리로부터 빠져나오지 못하기 때문이다.


‘국민의 알 권리’라는 측면에서 주요 정보를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해야 하는 언론의 기능에서 점점 ‘정확하게’라는 가치가 사라져 가는 것을 느낀다. 정확성이 사라졌다는 것은 결국 사실이 보도로부터 도태되어버렸음을 의미한다. 취재가 어쩌다 누군가의 발언을 그대로 “따옴표” 치는 것이 되었고, 누군가가 주는 기사를 그대로 올리는 것이 되어버렸을까? 당사자를 만나 사실을 확인하고, 제보된 내용의 사실 유무를 판단하는 '취재'의 과정을 건너뛴 채, 가장 빠르게 잘못된 내용을 국민들에게 던지는 언론의 풍토는 도를 지나쳐도 너무 많이 지나친 것이다.

우리는 한쪽으로 과도하게 몰려있다. 공격은 또 다른 공격을 부른다. 그에 앞서 누군가를 공격할 때는 최소한 사실 확인 정도는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 상식선인 것이다. 누군가 있지도 않은 일로 나를 모함한다고 생각해보라. 그리고 그것이 아니라고 이야기해도 듣지 않는다고 생각해보라. 머리의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상황은 일어나서도 안되고, 만약 일어났다면 반드시 사죄해야 할 일이다. 최선을 다해 의혹을 뿌린 만큼, 그에 대한 정정과 해명도 최선을 다해 알리는 것이 최소한의 도덕성이다. 하지만 그 최소한의 도의마저 지키지 않는 누군가에게 붙일 수 있는 최소한의 단어가 ‘기레기’, ‘기더기’라는 멸칭인 것이다.




언론통제는 과거 독재정치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자신들에게 유리한 정보만 공개하고 자신들에게 불리한 정보는 숨기거나 왜곡 보도함으로써 국민과 대중들의 생각을 비틀어온 것은 독재정치의 오래된 역사다. 그 어두운 역사를 뒤로 하고 수많은 이의 희생과 노력으로 민주주의 '국가'가 '민주'주의 국가가 되었다. 나라의 주인 된 권리를 다시 국민에게 돌려주고자 했던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언론의 자유는 어떤 불가침의 성역화되었다. 특히 살아있는 권력에 대한 자유로운 보도와 비판은 함부로 비난할 수 조차 없게 되었다. 마치 최근 억측을 사실화하여 기자회견을 한 후 그에 대해 제기하는 모든 의문은 '2차 가해'라 외치는 누군가의 모습과 오버랩되는 장면이다.


언론의 자유가 성역화된 이유는 그것이 또 다른 종류의 언론탄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하지만 ‘비판’과 ‘비난’은 다른 것이며, 언론의 ‘자유’가 ‘방종’이 되어서는 안 된다. 언론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그들이 제멋대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을 가만히 내버려 둬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바른 목소리로 정치, 검찰, 경제의 권력들을 견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수구가 되어 '그들을 위한' 보도를 쏟아내기 시작한다면 이것은 언론 스스로 자유를 포기하고 권력의 일부가 되기를 선택하는 것과 같다.




우리들, 일반 시민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는 우리가 가진 저 ‘자유 표면효과’를 인식하고 극복하는 데 있다. 국민 개개인의 힘은 미약할지 모르나 그것이 하나의 흐름을 형성하면 거대한 힘을 지닌다. 그 힘은 때때로 국가의 체제를 뒤엎을만한 개혁으로 이어질 정도로 강대했다. 하지만 이 흐름이 누군가의 농간에 흔들리기 시작한다면, 우리는 자신의 의사와 상관없이 누군가를 공격하게 되고, 잘못된 비난을 쏟아내게 된다. 자유를 잃어버린 인간의 자유 표면효과는 언론의 힘을 극대화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며, 언론의 권력화가 지속되는 주요 동력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가슴 아픈 것은 이런 무자비한 파도에 휩쓸려 누군가는 삶을 송두리째 잃어버리거나 생명을 포기하고 만다는 사실이다.


SNS의 발달은 양날의 검과 같다. 기술의 발달을 인간의 도덕성이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SNS의 발달로 말미암아 누구나 자신의 의견을 인터넷이라는 가상공간에 쏟아낼 수 있게 되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댓글’이라는 표현양식이 되었다. 도를 넘은 신상 털기는 사회적 문제가 된 지 오래고, 네티즌들이 사이버수사대가 되어 사생활을 파 해치는 일도 빈번하다. 아동폭력으로 의심받던 보육교사가 학부모들의 과도한 신상 털기에 결국 투신자살한 사고가 있었다. 부모이기에 아이를 돌보고 가르치는 사람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이 가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교사의 신상을 털고 흠이 될만한 것을 골라 유포하고 공격하는 행위는 누군가의 생존을 위협할 정도가 된 것이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은, 집단으로부터 유기되는 것에 대한 엄청난 불안을 DNA에 탑재하고 있다. 자신의 치부가 만천하에 공개된 사람은 심한 공허함과 수치심, 외로움을 느낀다.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 스스로 부끄러움을 몰라서도 안되지만, 그것이 타의에 의해 공개되었을 때 극대화되는 수치심의 공격에 압도될 수밖에 없는 것 또한 인간이다. 이들은 자신이 앞으로 다시는, 다른 사람 앞에 설 수 없을 것이라 여기며 때때로 이러한 단정적 사고는 죽음이라는 마지막 선택지에 이를 정도로 강력하다. 잘못을 저지른 사람을 죗값을 치르게 하는 것과 그 사람을 공개적으로 망신 주고 수치스럽게 하는 것은 서로 다른 것이다. 옛말에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는데, 이제는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사람부터 미워하는 세태가 되었다. 이러한 과도한 공격성으로부터 우리 스스로 거리를 둘 필요가 있는 것이다.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은 없다. 아무것도 모른 채 당하고 살아서도 안되지만, 상대방에 대해 속속들이 아는 것이 꼭 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지 못한다. 나도 모르는 무의식의 영역이 있고, 누구에게나 숨기고 싶은 비밀 하나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우리가 어떤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게 되는 경우는 상대방의 모든 것을 알 때가 아니다. 오히려 상대방에 대해 알면 알수록 처음에 가졌던 환상에 가까운 호감은 깨어져간다. 상대 역시 완벽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타인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모든 것을 아는 것이 사랑이라면, 사랑을 시작할 수도, 그 사랑을 유지할 수도 없을 것이다. 사람 사이에는 적절한 거리가 존재해야만 한다. 관계는 교집합을 이룰 뿐, 합집합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서로의 일부를 공유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이 관계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영향력은 커지고 교집합의 영역은 넓어지지만 그럼에도 각자의 영역은 존재해야만 한다. 그런데 최근 일어나는 과도한 신상 털기와 같은 것들을 보면 그런 영역마저도 함부로 침범하는 느낌이다.


인간에게는 누구나 공격성이 잠재되어있다. 흠이 있는 누군가를 발견하고, 그에 대한 공격이 정의로운 분노로 포장될 수 있을 때 인간의 공격성은 가장 극대화된다. 그런 양상을 가장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것이 고위공직자나 유명인에 대한 기사 보도나 성관련 문제들에 대한 댓글이다. 흠이 있다고 하여 정치나 행정력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또한, 흠이 없다고 하여 나라에 도움이 될 훌륭한 공직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물론 그것이 중대한 것이라면, 그런 흠을 가진 사람이 도저히 수행할 수 없는 직책이라면 그에 대한 공격은 일견 합당해 보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흠집 내기 위해 뭐 하나만 걸려보라는 식으로 나쁜 것에만 집중하는 사고방식은 결코 우리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런 형태로 작동되는 ‘가차 저널리즘’의 기사에 선동되어 그들의 흠과 또는 의혹이 그들의 모든 것인 양 함께 비난하는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갖고 사실을 바탕으로 스스로 판단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인지역량은 극히 제한적이다. 물론, 우리는 모든 면을 균형 있게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지만 우리가 의도적이든 의도적이지 않든 사고에는 편향이 발생한다. 또한, 하나를 집중해서 관찰하기 시작하면 그 외의 것들은 쉽게 묻히고 우리에게는 존재하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된다. 공격적인 네티즌은 공격적인 기사에 눈이 가고, 자신의 상상과 추론을 합리화해줄 그 어떤 것을 찾는다. 그런 사람들은 손쉽게 언론이 짜둔 프레임이라는 덫에 걸려든다. 스스로 반대 정보를 찾아보는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한 균형은 어그러지고 무의식적으로 언론이 공격하고자 하는 대상을 함께 공격하고 만다. 이런 대중은 언론이 손쉽게 활용할 수 있는 수단이 되며, 우리 스스로 언론의 잘못된 선동에 힘을 실어주는 꼴이 되고 만다.




과거사를 정리하는 작업이 대두되면서, 그 의도를 과도 해석하고 만연하게 적용하려는 경향이 발견된다. 하지만 과거사도 과거사 나름이다. 친일행위를 했던 사람들이나, 수십 년간 위안부 생활을 했던 성폭력 피해자들, 멀쩡한 시민을 빨갱이로 둔갑시키고, 죄 없는 사람을 억지 죄명을 만들어 감방에 집어넣고 수십 년을 징역을 살게 했던 일들이라면 당연히 과거의 죄를 묻고 바로잡을 것은 바로잡아 그들의 억울한 누명과 명예를 지켜주는 것이 맞을 것이다. 그것이 만인이 인정할만한 정의의 행보이며, 과거사 청산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과거사의 범위에 인간으로서 살다 보면 저지르게 되는 그런 모든 흠과 또는 의혹들이 포함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도대체 법무부 장관 내정자의 자녀가 어떤 대학에서 어떤 논문에 저자로 이름을 올렸고, 어떤 식으로 인턴과정을 거쳤으며, 학교를 다니면서 받은 표창장이 위조되었는지 어떤지 등의 문제가 왜 구설에 올라야만 하는지 솔직히 나는 잘 모르겠다. 그들이 그토록 주장하는 ‘정의’를 수호해야 하는 법무부의 수장이 될 사람이기에 그런가? 그에 앞서 왜 의혹이 사실이라고 증명되기도 전에 모든 것이 사실인 것처럼 일파만파 퍼지고, 훗날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고 밝혀진 후에는 입을 닫는 걸까? 더 큰 문제는 여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흔들리고 때로는 그것을 기정 사실화하고 믿어버린다는 점이다.


조국 전 장관이 법무부 장관으로서 추진하려 했던 역점 업무는 ‘검찰개혁’이었다. 일부 의혹이 제기됨에도 문재인 대통령이 조국 전 장관을 임명하는 것을 강행했던 것은 어떤 방해, 또는 음해가 있더라도 그것은 반드시 시작해야 할 일이라는 의식 때문이었을 것이라 추측한다. 그런 그가 명확한 검찰개혁의 의지를 갖고 오는 것을 알자, 조국 전 장관에 대한 비상식적일 정도로 엄청난 검찰의 '수사'와 '기소'가 개시되었다. 마치 '수사권'과 '기소권'을 모두 가진 검찰의 무소불위에 가까운 힘이라도 증명하려고 하는 것처럼 기득권의 저항은 시작되었다. 그것도 당사자가 아닌 그 가족에 대한 공격으로. 나는 이러한 흐름을 보며 검찰이 자신을 겨냥한 개혁에 대해 온몸으로 몸부림치는 것이 느껴진다. 그리고 검찰이 제기한 의혹을 모두 사실인 것처럼 일파만파 퍼트리는 언론의 모습을 보며 ‘검언유착’의 진면목을 확인하게 된다.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더 가슴 아픈 것은 우리가 이와 같은 조작과 같은 최면술에 자꾸만 빠져든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조금 더 무거워져야만 한다. 더 많은 것을 알고자 노력해야 한다. 과거처럼 알고 싶어도 어느 곳에도 원하는 정보가 없는 세상은 아니다. 이제는 찾아보려고 하면 찾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누군가가 던지는 정보를 소비하기에 앞서 스스로가 곳곳에 산재한 퍼즐을 맞추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들이 말하는 것이 의혹인지, 사실인지, 법률적 판단의 결과인지 뚜껑은 열어본 후에 누군가를 비난하더라도 비난해야 한다. 그것이 김치찌개인지, 된장찌개인지는, 최소한 뚜껑은 열어보아야 맛을 볼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우리는 가능한 많은 정보를 취사선택하여 스스로를 채워나가야 한다. '자유 표면효과'를 극복함으로써, 그 무언가가 우리를 흔들고자 할 때, 우선 모든 가치판단을 유보시키고 사실이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환상이고 의혹이고 최면인지에 대해 살펴본 후 스스로의 방향을 정해야 한다. 아직 정보가 부족하고 사실관계를 판단할 수 없다면, 판단을 유보하고 기다릴 줄 아는 진중함과 차분함을 갖추어야 한다. 그처럼 준비된 시민을 함부로 휘두를 수 있는 권력과 언론은, 예전에는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없다. 언론이 언론 스스로 자신에 대한 비판의식을 장착하지 않는 한 그들은 끊임없이 욕을 먹어야 할 것이다. 그들이 왜 욕을 먹는지 이유를 알지 못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비극이다. 시민들 스스로가 언론에 대한 비판적 사고를 갖고 필터링하고 때로는 할 수 있는 방법으로 흐름을 만들어, 그들의 잘못을 비판하는 수밖에 없다. 마치, 예전의 '촛불 혁명'처럼.




누군가 내 글을 보며 좌익이라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진보도 보수도 아니다. 굳이 따지자면 진보보다 보수가 좀 더 싫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진영논리는 진절머리가 난다. 나는 그저 말이 안 되는 것을 말이 안 된다고, 잘못된 것을 잘못되었다고 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일 뿐이다. 현재의 언론이 누가 봐도 이상하고 잘못된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적어도 '내'가 보기에 언론은 많이 비틀어져 있다. 잘못을 했다면 그다음은 뉘우치고 바로잡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독일처럼 전후에 인정받는 나라도 있고, 일본처럼 아직까지 욕을 먹는 나라도 있는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잘못을 알고 뉘우치는 사람들에게는 '쓰레기'와 같은 멸칭이 붙지는 않을 것이다. 왜 자신들에게 그토록 치욕적인 단어들이 접붙여지고 있는지 스스로를 돌아보고 자정작용을 시작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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