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투'가 정말 '미투'로 남으려면.

피해자의 목소리가 무소불위의 칼날이 되어서는 안 된다.

by 작가 전우형

죽음을 스스로 선택한 사람의 내면에는 수천 가지의 이유가 있을 것이나, 죽은 사람은 말이 없으므로 우리는 그의 이전 삶을 되돌아보며 그가 죽음을 선택한 이유를 짐작해 보는 것으로 그의 마지막을 이해해보는 방법밖에 없다.


상처는 자신이 가장 믿어왔던 사람들로부터 배신받을 때 가장 거대한 할큄을 남긴다. 수년간 일거수일투족을 함께해온 사람으로부터 신고를 당했을 때 처음에는 배신감을 느낄 것이나, 조금 더 속이 깊은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되돌아보게 된다.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기에 지금과 같은 일을 겪게 되는 걸까? 그런데 아무리 자신으로부터 원인을 찾아보려고 해도 찾아지지 않을 때가 있다. 그 억울함이, 그 분노가 누군가에게는 죽음의 이유가 된다.


황소의 내달림처럼 앞에 놓인 장애물들을 쳐내며 달려 나가던 사람이 의외의 돌부리에 걸려 무너지는 상황을 나는 종종 보았다. 마음이 약한 사람일수록 강해져야만 한다고 스스로를 몰아치며 이를 악물고 살아간다. 그들이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신은 아무것도 이루어낼 수 없을 거라는 불안에서 기인한다. 원래 자신이 알던 자신의 나약한 모습으로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을 거라는 뿌리 깊은 자기 불신이 완벽주의를 가진 사람들의 내면에는 존재한다. 강박적으로 강해져야 하는 사람들의 이면에는 스스로를 너무나도 약한 존재로 보는 인식이 있다.


어떤 이는 죽음을 선택하고서도 끊임없는 논란에 휩싸여야만 한다. 그가 너무나 올곧은 사람이었기 때문일까? 기득권과 투쟁하는 사람들은 그 자체만으로도 수많은 적이 만들어진다. 누군가의 권리를 보장하는 것은 때로는 누군가의 당연함을 무너뜨리기에. 결국 그도 성적 충동을 제어하지 못하는 남자에 불과하다며, 그럼 그렇지 그런 위선적인 사람을 지금까지 믿어왔었다니. 거짓된 신화를 믿어왔다는 것에 분노하듯 수많은 사람들이 여론재판을 시작했고, 누군가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누군가는 재판도 열리기 전에 파렴치한 성추행범이자 시대의 위선자로 낙인찍혀버렸다. 마음 약하고 자신에 대한 도덕적 잣대가 높은 사람은 앞으로 겪어야 할 무비판적인 비난을 감당할 힘이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 더 버텨주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모두에게 미안하다던 그의 유서에 쓰인 '모두'에는 그토록 지치게 달려오기만 했던 자신 역시 포함되어 있지 않았을까?


여론몰이로 사냥당하는 사람들을 보면 과거 종교재판이나 마녀사냥이 떠오르지 않을 수 없다. 저 사람은 마녀다!라고 소리치면 모든 이들이 일단 마녀라는 전제를 깔고 그 사람을 사회로부터 유리시켜버리고 난 후, 실체적 진실과 무죄추정의 원칙 등은 고사하고라도 뒤늦게 밝혀지는 새로운 사안으로부터 등을 돌려버린다. 엄청난 위력을 지닌 남자 상급자가 보낸 음란사진이라는 것이 실제로는 여름날 러닝셔츠 차림으로 선풍기도 켜지 않고 부채질로 버티던 사진이었다는 내용도, 실제로 4년간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소인이 주위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 자신의 피해사실을 털어놓았음에도 묵인 방조했다는 그 많은 직원들 모두가 자신들은 그런 사실을 들은 적도 본 적도 없다는 진술을 하고 있으며 심지어 거짓말탐지기와 대질심문 요청도 하고 있다는 내용도, 야심한 시각에 위력자로부터 음란 메시지를 받았다는 텔레그렘 방의 증거로 제시된 '초대'메시지 사진이 8시 25분이라는 오전인지 오후인지 알 수 없는 시간이 찍혀있다는 것 역시, 제대로 증거가 제시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이 위력에 의한 성추행 사건과 달리 올해 4월 경에 부서 내 다른 직원과 실제적인 성관련 문제로 법률 다툼이 있었지만 현재는 그에 대한 내용은 전혀 다루지 않는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와 같이 누군가의 주장에 의구심이 들만한 내용들이 속속 드러남에도 이런 내용들에는 주목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그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어도 이와 같은 여론몰이와 마녀사냥은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작년 8월에 시작된 한 일가에 대한 무자비한 여론사냥이 근 1년이 지나서야 겨우 반박을 시작할 수 있게 된 것처럼, 그 역시 마찬가지의 상황을 겪어내며 너덜너덜해진 후에야 '아... 그게 아니었구나. 아니면 됐지 뭐.'라는 식의 무책임한 반응만 맞이하게 될 뿐이다. 사람은 죽지 않고도 얼마든지 죽임을 당할 수 있다. 산채로 죽임 당하느니 차라리 마지막 순간만큼은 내가 선택하고 싶다는 처절한 마음이 드는 것 역시 인간으로서 지닌 최후의 자기 방어일 것이다.


여성들이 자신의 어려움을 당당히 목소리 낼 수 있는 '미투' 운동의 본질이 한쪽의 목소리를 기정 사실화하여 상대로 하여금 적절한 방어조차 할 수 없게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진정 고소인을 보호하려면 고소인이 더 이상 여러 구설에 오르지 않도록 자신들이 가진 그 '확실한' 증거를 공개하고 많은 사람들이 가질 '합리적' 의구심을 해소시켜주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누군가의 주장에 대한 의구심을 갖는 것이 '2차 가해'라며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드는 생각을 말살하여 입을 닫게 하는 것이 '미투'의 본질은 아니지 않은가? 위력을 가진 남자 보스는 모든 여직원들을 성적 유희의 대상으로 여기는 것처럼 남성들에 대한 악의적 인식을 일반화시키는 것도 어느 정도로 해야 한다. 남자들 모두가 그토록 명예도 없고 힘없는 여자들을 괴롭히는 짐승들은 아니다. 그리고 그 남자들 중에서도 여성들의 인권보호에 가장 앞장서고 약자의 편에 섰던 사람이라면 무자비한 의심의 이전에 한 번쯤 기다려볼 여지가 있는 것은 아닐까?


직장 내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자를 진정으로 일상으로 빠르게 복귀시키기 위한 방법은 지금과 같이 여론전을 펴는 것 말고도 무수히 많다. 정말 이제 고인이 된 그로부터 수년간 받았을 피해가 있다면 그 상속인에게 죄를 물으면 된다. 고소인이 받았을 그 엄청난 피해에 대한 보상을 받거나, 상속인을 감옥에 넣는 것으로 위로를 받으면 된다. 그 모든 것을 입증할만한 증거가 있다면 말이다. 이제 더 쉬워지지 않았는가? 당사자가 고인이 되어버렸으니. 증거재판주의 원칙이 법정에 존재하는 한, 정확한 증거만 있으면 자신들이 원하는 결과를 얻어내는 것은 손바닥 뒤집기보다 더 쉬운 일이 되었다. 이미 사과를 원하던 사람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렇다면 고소인이 가장 빠르게 마음의 안정을 찾는 방법은 이미 이 사건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된 모든 사람들로부터 자신이 얼마나 힘들고 괴로운 상황을 견뎌왔는지 인정받는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는 말뿐인 주장이 아니라 증거능력이 있는 증거를 제시하는 것이 가장 확실한 방법이다. 증거는 그들이 그토록 외치는 고소인 보호를 위해 공개하지 않는 것인가 아니면 증거라는 것이 진정으로 있기는 한 것인가? 나는 자꾸만 합리적 의심이 든다. 내가 여성의 인권을 무시하고 페미니즘을 저격하는 남성우월주의자이기 때문인가? 그렇다면 나는 나를 지금까지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와 아내와 딸을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그들이 보호받는 세상을 원하는 내가 왜 이토록 현재의 사건에 대해서는 고소인에 대한 안타까움보다도, 그녀도 이용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이런 일들까지 이용하려고 하는 어떤 사람들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는 걸까? 이것은 단지 나 혼자만 느끼는 감정일까?


찔리는 게 없으면 왜 죽었겠어?라는 의심도 이제는 다시 생각해볼 때다. 정말로 그가 찔릴만한 무언가를 4년간 해왔다면, 고소인 측에서 제시할 증거는 차고 넘칠 것이다. 이제는 죽어 아무런 자기변호도 할 수 없는 사람에게 제시할 확실한 증거로 이야기하는 것이 차라리 사자의 명예를 그만 훼손하는 길이며, 본인도 더 빠르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다. 죽는 것은 쉽지 않다. 양심에 거리끼는 짓을 하고도 멀쩡히 살아 국가에서 주는 밥 먹고, 책 보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더 많다. 모두가 자신의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죽음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나는 그의 죽음이 최종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자기 방어였을 것이라 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서 이거 진짜야?라고 묻는 합리적 의구심도 '2차 가해'가 되고, 정말 들은 것이 없고 몰라서 모른다고 하는 것이 고소인을 사회적으로 고립시키는 2차 가해이자 '방조'로 몰아가는 것은 지양해야 한다. '미투'는 어려움에 처하고도 자신이 어려움에 처했다고 말조차 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어려움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이해는 간다. 오죽 답답했으면, 오죽 자체적으로 해결할 수 없었으면 대중 앞에 자신의 피해사실까지 알리는 힘든 결심을 했을까? 이런 생각으로 미투로 무언가가 나오면 으레 '당연히' 드러나지 않았던 무언가가 있었을 거라 의심부터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것이 한쪽의 주장만으로 범죄의 구성요건이 충족되는 무소불위의 칼날이 되어서는 안 된다. 누구도 의구심을 갖지 않도록 확실한 증거를 제시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미투라 하더라도 다툼의 여지가 있는 것이며, 결론이 나기 전까지는 누군가를 임의의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누군가를 이미 죄인으로 확정 짓고 사냥을 하듯 수사를 이어나가는 이들의 행태와 이것이 무엇이 다른가? 모두가 사건을 조금 더 중립적으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무엇이 팩트인가? 그것이 확실히 드러나기 전에, 그동안 어찌하지 못했던 높은 위치에 있던 사람이라 하여 무자비하게 어떤 의혹이나 주장만으로 그를 마녀 사냥하고 인격 살해하는 것은 멈추어야 한다. 그것은 또 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내는 것일 뿐, 그 어떤 피해자도 구제해주지 못하는 마이너스 게임이다.


여론을 통해 자신들의 주장만을 내세우고, 그것을 이슈화시키고, 정작 제대로 된 증거는 제시하지 않으며 사람들의 의구심만 증폭시키는 것이 그들이 그토록 외치는 여성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와 피해자가 평범한 일상으로 복귀하는 것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음을 우리는 생각해보아야 한다. '미투'를 하나의 프레임으로 짜서 그것을 다른 무언가를 위해 이용하게 되는 순간, 앞으로 있을 진짜 '미투' 역시 대중들로부터 연대받기 어려워질 것임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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