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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Apr 11. 2023

500번째 글을 기념하여

에세이

  500번째 글을 기념하여.     


  브런치에 첫 글을 올린 건 2020년 5월이었습니다. 햇수로 4년 차가 되었고, 5월이 되면 3년을 채우게 됩니다. 그리고 어제 발행한 글이 500번째 글이었습니다. 몇 편을 썼는지를 염두에 두고 글을 써온 건 아니었습니다. 얼마나 썼는지보다 어떤 글을 써낼 수 있는지를 시험하는 마음이 더 컸습니다.


  어제 브런치에서 500이라는 숫자를 확인하고 나서, 첫 글을 찾기 위해 스크롤을 내리는 동안, 일종의 경외 같은 것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필자 스스로에 대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시간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기념 삼아 한번 읽어보려고 ‘시도’ 했습니다. 500편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지만 불가능했습니다. 서너 편 정도 읽는 것이 고작이었습니다.


  그래서 계획을 세워 보았습니다. 10편씩 50일, 대략 두 달의 기간을 두고 차근차근 읽어보자. 분량이 다양하지만 짧게는 5분에서 길게는 15분가량 걸리는 글들입니다. 매일 한 시간에서 두 시간 정도를 할애하면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한 시간을 오롯이 제 글을 읽어보는 데 사용하는 일은 낭비처럼 여겨졌습니다. 저는 키친테이블라이터입니다. 현재의 작업 환경에서는 하루 두 시간도 온전히 집필에 매진하기 어려운 날도 많습니다. 시간 투자의 우선순위와 질을 고려해 보아도, 제 글을 다시 읽는 것보다 다른 작가의 글을 읽는 것이 저에게 훨씬 더 유리할 겁니다. 지금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보면 읽고 싶고, 또 읽어야만 하는 책들이 한 면 가득 꽂혀 있습니다. 부지런히 읽어도 늘 갈증을 느낍니다.


  눈에 띄는 제목을 훑어보는 일도 어렵긴 매한가지였습니다. 가장 크리티컬 한 이유는 그 글들이 ‘제 글’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오래된 글일수록 그저 읽고 넘기기 힘들 만큼 수정 욕구가 치솟았습니다. 속된 말로 ‘엉망’. 그 과정에서 체감한 건 그래도 예전보다는 많이 나아졌구나, 하는 작은 위안이었습니다. 언젠가 그간 발행한 글들을 일제히 리모델링해 보겠다고 구상했던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수정본들을 엮어 브런치북으로 발행하려는 의욕도 함께였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그런 의욕도 사그라들고 말았습니다. 더 현실적으로는, 그럴만한 시간도, 에너지도 부족했습니다.


  가끔 짤막한 시나 산문을 발행하기도 했지만, 제가 써온 글은 에세이와 소설이 대다수입니다. 초창기 일시적으로 사회적 이슈를 다루기도 했지만 쓰는 과정이 즐겁지 않아 중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사회면의 일들을 탐독하는 동안 제 안에 부지런히 침투하는 갈등과 분노, 편향, 진영논리, 왜곡, 흐트러지는 균형감각 등이 있었습니다. 어느 한쪽에 대한 공감이 깊어질수록 상대편에 대한 공격이 꼬리를 무는 것도 느꼈습니다. 그러한 제 속내가 글을 쓰는 내내 나름의 공정한 태도나 어조를 취하면서도 끊임없이 글을 비틀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주변 사람들과 논쟁도 같은 빈도나 정도로 격화되었습니다. 내막을 모르고 하는 말들이라는 생각에 지인의 말을 문제 삼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건 불편했습니다.


  심리와 감정에 관한 에세이들은 필자 스스로 살 길을 찾아보기 위한 투쟁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말하자면, 그 글은 독자를 위한 글이라기보다는 제 안에 뭉치고 굳어 녹여 배출하거나 긁어 없앨 수 없는 것들을 도려내기 위한 수술적 도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물론, 글을 쓸 당시에는 이런 것들에 대한 자각이 없었습니다. 주제를 구상하고 집필에 들어가더라도 그 속에 고스란히 묻어나는 감정들이 있었습니다. 그 감정들을 글에서 덜어내지 못한 흔적들을 지나온 글에서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더 이상 도려낼 것이 없게 되자 자연스레 그런 류의 글에 대한 동력도 사그라들었습니다. 그 후의 에세이들은 글쓰기를 주제로 하거나 긴 여정을 두고 작업하던 소설에 대한 소회, 그리고 가족과 여행에 대한 것이 전부였습니다.


  문학, 그러니까 소설에 대한 욕구가 움튼 것은 대략 이년 전으로으로 기억합니다. 2021년 3월부터 ‘단편의 단편소설’이라는 매거진에 글을 싣기 시작했습니다. 매거진 명칭이 모순적인 것은 시작할 당시의 제 상태 때문이었을 겁니다. 저는 소설을 써본 일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과 출신에 해군사관학교를 나왔고 15년간 해군장교로 복무했습니다. 문예창작학과를 다니거나 소설 작법을 배운 일도 없습니다. 그래서 소설의 카테고리에 포함될 수 있는 최소 분량의 창작물도 써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억지로라도 나는 소설을 쓸 것이고, 쓰고 있을 것이고, 앞으로도 계속 쓸 것이다,라는 다짐이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단편소설은 이만 자 분량입니다. A4 규격에, 기본 여백, 글자 크기 10, 줄 간격 160으로 쓰면 한 페이지에 대략 이천자에서 이천이백자가 들어갑니다. 단편소설 한 편을 완성하려면 200자 원고지 100매, 워드 프로그램으로는 10페이지 정도를 글자크기 10으로 빽빽하게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저는 그만한 소설을 쓸 수 없었습니다. 물리적으로도 기량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의 힘일까요. 최근 발행 중인 ‘그해 여름(가제)’이라는 소설은 연재소설이면서 장편소설 분량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워드프로그램에 작성 후 브런치에 옮겨 싣고 있는데, 글자수로만 따지면 16만 자에 A4 100페이지 분량 정도가 됩니다. 물론 정리에 들어가면(언제 그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절반 이상을 덜어내야 할지 모르지만 현재까지 꾸려 온 내용이 그렇습니다. 이전 소설 ‘그가 그녀를 사랑하는 방법’ 역시 회차로는 35회 차까지 구성되어 중편소설 분량이었고, 브런치 북으로도 발행했던 ‘대낮의 납치극’은 16회 차로 단편 분량으로 완결됐습니다. 그리고 공모전에 출품하기 위해 브런치에는 발행하지 못했지만 작년 7월 경에 완성한 장편 소설도 한편이 있습니다.


  제가 느꼈다는 시간의 경외감은 바로 이런 것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계속해서 쓰는 시간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 저라는 사람이 아니라, 그런 시간들이 완성해 준 결과물들. 제가 계속해서 소설을 쓰는 이유입니다.


  제가 이년 전쯤 지인분께 농담 삼아 이렇게 이야기한 적이 있습니다.


  “제 나이가 서른일곱이니 칠십 전에 죽는다고 해도 최소 삼십 년은 글을 쓸 수 있겠지요. 그 정도 쓰면 적어도 한편 정도는 읽을만한 글이 남지 않겠습니까?”


  지인분은 웃었지만 그 웃음이 그리 편안해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속으로는 답 없는 사람, 이라고 생각하셨을 수도 있겠지요. 어쩌면 더 그런 마음을 느끼는 것은 아내일지도 모릅니다. 허구한 날 카페에 앉아 소설만 쓰고 있으니, 왜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제 나름으로는 김연수 작가의 ‘소설가의 일’에서 읽은 몇 개의 문장을 마음에 담았을 뿐입니다.      


  ‘소설가에게 재능이란, 소설을 쓰고 싶지 않을 때 댈 수 있는 가장 흔한 핑계에 불과하다. 소설가란 결국 소설을 쓰는 사람이다. 정확하게는 소설을 쓰고 ‘있는’ 사람이다. 물론 소설을 24시간 쓰고 있을 수는 없지만 늘 그것에 대해 생각하고 고민하고 또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다. 소설을 쓰는 방법이란 결국, 소설을 ‘쓰는’ 방법 외에는 없다. 일단 써야 한다. 그것 외에 다른 길은 없다.’     


  더한 격려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직업으로서의 소설가’에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소설가라는 집단은(혹은 소설이라는 장르는) 희한하게도 경쟁자를 반기는 분위기가 있다. 새로운 경쟁자가 등장해서 베스트셀러를 출간하고 센세이션을 일으킨다고 해도 그를 시기하거나 배척하지 않는다(적어도 드러난 모양새로는 그렇다). 오히려 그런 일을 기꺼워하기까지 한다. 왜냐하면 소설계에 부는 그러한 붐이 자신의 독자를 빼앗아간다고 여기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토록 매력적인 소설이 등장한다면 그동안 소설에 손도 대지 않던 사람도 한번 정도는 서가에 꽂아두고 싶을 뿐, 내 소설의 판매량에는 영향이 없(거나 미비한 수준이)다. 관계가 잘 형성된 독자들이라면 내 소설 대신에 그 소설을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소설도 사고 그 소설도 살뿐이다. 그리고 지금껏 느끼기에 소설의 독자들이란 대개 (내 생각에는) 그런 것 같다.


  새로운 작가의 등장을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사실 소설은 글을 조금만 쓸 줄 아는 사람이라면 단편 한두 편 정도는 금세 써낼 수 있다. 어쩌면 타고난 능력이나 경험에 따라 장편도 어렵지 않게 써내는 일도 가능하다. 하지만 십 년이고 이십 년이고 그 일을 계속 해내는 사람은 드물다. 몇 편 정도 좋은 작품을 써내고 곧 잊히거나 다른 길로 빠진다. 소설계에는 그런 일이 비일비재하다.


  소설은 쓰지 않고 살 수 있다면, 쓰지 않는 편이 삶에 더 이롭다. 그러니 소설을 계속 쓰는 사람들이란, 어떤 이유로든 그런 일을 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기억을 복기한 내용이라 책의 내용과 정확히 일치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두 권의 책에서 제가 가슴 깊이 새긴 내용은 위와 같습니다. 그리고 소설을 계속 써내야만 마음의 갈증이 사그라드는 제 성격으로 보아(못 쓰는 날은 이상하게도 인내심이 쉽게 바닥을 드러냅니다), 제겐 다른 재능은 없지만 앞으로 삼십 년쯤 소설을 계속 써낼 사소한 재능 정도는 있는 것 같(다고 믿)습니다.   

   

  * 500번째 글을 기념하여, 내일부터 장편 소설 하나를 업로드할 예정입니다.(매주 월, 수, 금) 2022년 한 해에 걸쳐 집필하였고, 문학동네 소설 공모전에 출품해 (매우 아쉽게?) 탈락한 작품입니다. 수정을 거쳐 다른 공모전에 출품해 볼 생각이었으나, 마음이 동하지 않네요. 재밌게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연재를 진행 중인 '그해 여름'도 꾸준히 이어나갈 예정입니다.      


  * 추신. 감기 조심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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