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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Sep 18. 2023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것들

에세이

  날이 선선해서 카페 문을 밖으로 활짝 열어두었다. 모기와 파리, 수개미를 닮은 날벌레가 날아 들어왔다. 나는 파리채를 쥐었다. 그때 효영이 카페로 들어왔기에 나는 날벌레 소탕 작전을 잠시 미뤘다. 효영은 투 샷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투 샷의 샷 발음이 안 돼 ‘투 샅’이라고 발음하는 건 효영의 트레이드 마크다. 나는 가장 큰 잔을 골라 얼음을 절반쯤 담고 찬물을 넉넉히 부었다. 남은 공간을 방금 내린 에스프레소로 채웠다. 효영은 집사람과 다투거나 사업장에서 골치 아픈 일이 있거나 할 때 카페를 들른다고 했다. 그리고 ‘투 샅 냉커피’를 마시고 저쪽 언덕배기에 올라 바람을 쐬면 지끈거리던 머리가 개운해진다고 했다. 그런 효영의 말을 듣고 있으면 나의 마음도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나는 내려놓았던 파리채를 다시 집어 들었다. 파리와 모기들은 자취를 감췄다. 하는 수 없이 자리에 앉아 9월 9일부터 읽던 소설책을 펼쳤다. 두 방해자 무리는 차륜전으로 신경을 긁기 시작했다. 몇 번의 술래잡기를 반복하다가 나는 손 닿는 곳에 파리채를 내려두었다. 눈에 띌 때마다 한 마리씩. 속으로 되뇌는 사이 눈꺼풀 옆이 가려워졌다. 당한 것이다. 


  예상하기로 파리는 모기보다 지능이 높은 것 같다. 파리는 파리채만 들면 사라진다. 기다리는 동안은 나타나지 않다가 인내심이 다해 채를 내려두면 어디선가 나타나 윙윙 소리를 낸다. 파리채를 다시 집어 드는 짧은 시간 동안 파리는 또 사라진다. 모기는 내 몸 어딘가에 대롱을 박고 있다가 미처 피할 시기를 놓친다. 


  나는 환풍 팬을 껐다. 카페로 들이치는 바람에 쓸려 더 많은 날벌레가 유입되는 것 같았다. 환풍 팬을 꺼도 선선한 기운은 제법 불어왔다. 며칠간 이어진 가을장마가 몰고 온 습기는 오래가지 못했다. 


  주말 동안 밀린 빨래를 했다. 가을볕에 마른 수건에서는 과자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걷은 빨래를 바로 개면 쉽다. 구겨지기 전이라 재봉선을 찾아 잡는 수고도 덜 수 있고 접었을 때의 모양도 예쁘다. 평택호에서 축제가 열렸는지 십 분가량 불꽃놀이가 이어졌다. 밤 8시 넘은 시간에 우당탕탕 소리가 들려 옆집이나 윗집에서 어쩐 일로 부부싸움을 하나 싶었는데 실은 그게 불꽃놀이 소리였다. 이틀 연이어했던 모양으로 토요일은 거실에서 2주 만에 재개된 프리미어리그 경기를 시청하다가 우연히 들었고, 일요일은 아내와 저녁 산책을 하던 중에 중학교 2학년 딸아이가 휴대전화로 사진을 보내주어 알았다. 베란다에서도 보일 만큼 제법 크고 선명한 불꽃이었다.


  점심때가 되면 주차장은 국밥집 손님들로 가득 찬다. 인파가 몰리거나 대기열 손님에게 번호표를 나누어줄 정도는 아니지만 오며 가며 통유리로 비치는 모양을 보면 테이블은 만석이다. 아주머니 두 분이 운영하는데 한 사람은 파트타임으로 두 시쯤 하얀 카니발을 타고 사라진다. 가끔 카페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기도 하는데 화교 말투를 쓴다. 남편 줄 거라며 입구에 서성이는 남자를 턱으로 슬쩍 가리키는데 몇 번 마주친 얼굴이었다. 아는 사람이 아닌 건 확실한데 처음 보는 인상도 아니었다. 그와 눈이 마주칠까 봐 나는 얼른 계산대에 얼굴을 박는다. 알듯 말듯한 사람과 대면하는 건 불편한 일이다. 이유로 몇 가지가 떠오르지만 막상 그 이유가 전부인가 하면 또 그렇지는 않다. 이럴 때는 ‘그냥’이라는 말이 썩 어울린다.


  나른한 시각인지 손님 중 한 명이 길게 비명을 내지르며 기지개를 켠다. 시계를 보니 12시 41분이다. 에어컨을 틀자 실내가 금세 서늘해졌다. 손님이 머물 때만 틀어두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은영 소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를 마저 읽고, 김금희 산문집 ‘식물적 낙관’을 빼들었다. 표지 위쪽이 구겨져 있어 손으로 꾹꾹 눌렀다. 솟은 부분은 편평해졌지만 구겨진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일정 이상으로 강한 힘에 짓눌리면 지울 수 없는 흔적이 남는 건 사람이나 책이나 같은 모양이다.


  밖의 차소리가 시원하게 들린다. 착륙을 앞두고 저공 비행하는 터보프롭 엔진의 소음도. 카페 상공을 지날 때 비행기들은 랜딩 기어를 내린다.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캠프 험프리 활주로에서는 하루 서너 차례, 많게는 십수 회가량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퇴근길에 두정리 쪽으로 달리다 보면 야간 비행하는 공격 헬리콥터들을 자주 볼 수 있다. 창문을 내리면 두두두두 하는 로터 소리가 기분 좋게 귀를 두드린다. 그 길은 대체로 고요해서 생각을 지우기 좋다. 달리다 보면 왼쪽으로 파란 지붕 축사가 두 채 지나가고, 잠시 후면 좌회전할 사거리에 도착한다. 


  무리하고 애쓰다 스스로 상처받는 건 유구한 전통을 지닌 나의 흑역사다. 유구하다는 건 뿌리가 어디인지 모를 정도로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보통은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과 같이 좋은 의미로 쓰이지만 내게는 ‘너무 오래되어 이제는 바꿀 수 없는’, ‘돌처럼 단단하게 굳어 캐낼 수 없는’으로 읽힌다. 오래 앓아서 뿌리까지 상한 이처럼. 어디까지 덜어내야 하나 치과 의사를 고민하게 만드는 충치처럼. 그래서 때때로 그 자체가 마치 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빚쟁이에게 쫓기듯 사랑하기 전에 적당히 아끼고 덜 상처받는 법을 배우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이 선택 가능한 옵션이었다면. 사거리에서처럼 직진이나 좌회전, 우회전 중 하나를 고를 수 있는 종류였다면. 어차피 그래도 나는 매번 좌회전만 했을 테지만.


  라떼와 치즈가 카페로 돌아와 잠이 들었다. 치즈는 밤식빵 같고 라떼는 우유식빵 같다. 밖은 또 비가 내리고 있었다. 군데군데 맑은 하늘이 보였다. 나는 서둘러 열어두었던 자동차 창문을 닫았다. 오래 내릴 비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가을 소나기 느낌이랄까. 잠시 맞았는데 나쁘지 않았다. 가느다란 샤워 줄기 같았다. 회색 티셔츠와 진한 녹색 반바지에 점이 생겼다.


  스치듯 자라났다 사라지는 그림자와 빛처럼 쏟아지는 알갱이들을 보았다. 이런 현상이 왜 여우비인지 나는 썩 와닿지 않았다. 잠시 보였다 사라져서인지, 평소라면 구분되었을 두 기상 현상이 공존해서인지. 무 자르듯 구분할 수 있는 일들이 내겐 드물었다. 내 눈에는 세상 일들 모두 여우비 같았다. 비가 오는 건지 해가 내리쬐는 건지, 더운 건지 따뜻한 건지, 맛있는 건지 배가 고픈 건지, 상대가 함부로 대해서인지 내가 마음이 여려선지, 콕 짚어 말할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그럴 때마다 속이 복잡했고 하나부터 열까지 마음에 그림자가 졌다.


  나는 카페 청소를 시작했다. 바닥을 쓰는데 굽힌 허리보다 빗자루를 쥔 손이 먼저 저려왔다. 보이지 않는 작은 먼지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느새 깨어 옆에서 기웃거리는 라떼와 치즈를 피하며 비질을 마저 했다. 고운 모래 같은 먼지 알갱이와 자잘한 먼지들이 실타래처럼 뭉친 덩어리들을 쓰레받기에 담았다. 종량제 봉투에 그것들을 붓고 며칠 된 파기 도시락과 김밥들을 버렸다. 돌잡이 아이 머리통만 한 배는 쳐다보다가 그냥 두었다.


  아기고양이를 키우다 보면 바닥을 자주 보는 습관이 생긴다. 제 부모 마냥 쫄랑쫄랑 쫓아다니는 고양이들을 밟지 않으려면 그 방법뿐이다. 고양이들은 소리 없이 곁을 맴돈다. 머리를 비비거나 소리 내어 부를 때도 있지만 대부분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만큼 조용하다. 밟히면 앙칼진 비명을 지른다. 어디서 그런 소리가 나는지 깜짝 놀랄 정도로.


  청소를 하니 허기가 느껴졌다. 육개장 사발면에 물을 부었다. 피어오르는 김을 보며 기다리는데 치즈가 옆에 와서 다소곳이 앉는다. 너는 못 먹는 거야. 나는 알아듣지도 못할 말을 건넨다. 치즈는 나를 빤히 바라본다. 치즈는 암컷인 데다 덩치도 작고 온순해서 라떼에게 자주 밀린다. 사료 그릇 앞에서도 이제는 체념한 듯 코를 박고 쩝쩝거리는 라떼를 뒤에서 멀거니 바라본다. 그 모습이 아파서 다른 그릇에 따로 사료를 담아주어도 우물쭈물 눈치를 살핀다. 사료 그릇을 집어 발 앞에 놓아주면 그제야 허겁지겁 먹는다. 치즈가 옆에 앉은 모양을 보니 그 생각이 났다. 볼이 들어가고 눈두덩이 움푹 파인 치즈를 보며 나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도 오래 살기는 힘들겠다. 그래도 사는 동안은 아프지 말자. 행복하자. 그 말을 하는데 공연히 울컥, 속에서 무언가가 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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