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작가 전우형 Sep 12. 2023

내게도 생소한 시간들

에세이

  카페에 들어서면 우선 통풍팬을 켠다. 바람이 확 불며 문이 기지개를 켜듯 안쪽으로 몸을 당긴다. 나는 문을 활짝 연다. 그럼 밖에서 놀던 치즈와 라떼가 달려온다. 길냥이는 아니고 지난 5월 31일 구조해 온 아이들이다. 구조한 지 3개월. 생후 4개월쯤 되는 아기 고양이들. 고양이의 수명은 인간의 8분의 1쯤 된다고 한다. 너무 빠르고 민첩해서, 때로는 홍길동처럼 도포 자락 휘날리며 날아다녀서 잊고 살지만, 인간에 비유하자면 세 살배기 영유아에 해당하는 완전 아기들이다. 


   바깥나들이가 고단했는지 치즈는 박스 위에 몸을 돌돌 말고 잠이 들었고, 라떼는 푹신한 장의자 위에 몸을 뉘었다. 목을 축이거나 사료를 먹는 건 뒷전이다. 쭉 펼친 모습을 보니 많이 길어진 게 새삼 느껴진다. 특히 꼬리는 3배쯤 길어져서 굵은 밧줄 하나를 허리에 매고 다니는 듯하다.


  치즈와 라떼를 지켜보다가 나는 휴지 조각을 줍고 바닥을 쓸고 트레이를 정리했다. 화분을 들여다보다가 널브러진 탬퍼를 제자리에 놓는다. 어제 내려두고 간 더치커피에 냉수를 새로 채운다. 서너 시간만 더 내리면 추출이 완료될 것 같다. 음악을 틀고 에어컨 온도를 맞춘다. 마른 잔을 선반에 정리하고 나니 설거지거리가 한두 개 눈에 들어오지만 내버려 둔다. 올여름을 지나며 손끝이 나무껍질처럼 갈라지기 시작했다. 아프지는 않지만 신경 쓰인다. 나도 나무처럼 카페에 심긴 느낌이 든다. 


  최근 몇 개월은 시간에 순응하는 법을 배웠다. 필요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삶이 그런 식으로 밖에 살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수동적인 방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늘 그런 식으로 삶을 바라보았던 것 같다. 


  나는 변화를 달가워하지 않는다. 그러나 변화가 완전히 멈추기를 고대해 온 것도 아니다. 시속 60km 정도가 내게 어울리는 속도라고 믿는다. 뻥 뚫린 국제대교와 지방도를 달리며 잔나비의 가을밤에 든 생각을 크게 틀어두는 게 현재의 가장 큰 즐거움이다. 집에서 카페까지는 25분 거리. 그 시간이 이제는 꽤 소중하다.  


  카페를 보기 시작한 건 2020년 6월 경이다. 브런치에 본격적으로 글을 올리기 시작한 시기와 대략 맞아떨어진다. 그해 2월 나는 전역을 신청했다. 내게는 10개월의 시간이 주어졌다.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목표도 의욕도 없었다. 나는 부담을 내려놓는 일에 그 시간을 할애했다. 그건 내게도 생소한 시간이었다. 


  나는 내게 남은 물리적 시간과 관계없이 이제 남은 시간 같은 건 없다고 느꼈다. 일종의 선전포고였다. 나를 낭비하고 소진시켜 온 지난날들에 대한 선전포고. 그래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의 다짐은 아직 유효하고, 어쩌면 그렇기에 현재의 단조로움을 조금은 편한 눈으로 응시할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던 것들이 내가 바라던 미래 모습과 괴리가 있었음을 인정하는 시간은 소중했다. 그토록 내려놓자고 다짐하고도 나는 여전히 인정할 게 남아 있었던 셈이다.        


  ‘기대를 내려놓는 일’에 대해 오래 생각해 왔다. 여러 개의 당위를 끌어안고 사는 건 고단하지만 가치 있는 일이었다. 적어도 한때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다. 물론 지금도 그런 믿음은 완전히 희석되지 않았다. 나는 의무와 책임을 대한민국에서 최고로 강요하는 집단에서 십수 년을 보냈다. 그곳에서는 나름 규율에 너그럽고 자유를 추구하는 편에 속했지만 빨간색 물감에 담그면 적어도 붉은색 계통의 물은 들고 마는 모양이다. 그 시절의 하늘은 늘 형광등 불빛이었다. 


  그 시절 나를 향한 당위는 나의 부드럽던 것들을 모조리 긁어냈다. 하지만 시간조차도 마모시킬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적어도 이 정도는 지켜야 하지 않나, 그런 질문들을 자주 했다. 그러면서 속으로 원망했다. 이유나 사정과 별개로 내게는 해야 할 일들이 많았다. 혼나지 않기 위해, 비난을 피하기 위해, 첨예하고 피곤한 갈등을 빚어내지 않기 위해, 당위는 아주 좋은 수단이었다. 거기 기대고 있으면 몸은 고되어도 마음만큼은 편했다. 그러다 마음이 병들었다. 이유는 여전히 찾지 못했다. 요즘은 그런 생각을 한다. 어쩌면 그런 일에는 답이 필요 없을 거라고. 같은 상처가 되풀이되는 것에 분명한 원인이 있다면 오히려 눈을 돌리고 싶지 않을까, 나는 사실을 알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것을 외면할 구실이 필요했던 게 아닐까.


  예의에 얽매이는 건 내가 약한 사람이기 때문일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처럼 살기에 나는 감출 게 많다. 그것들이 드러났을 때 쏟아질 원색적인 비난들도 감당할 여력이 없다. 그래서 매 순간이 무겁고 때로는 버겁다. 이 등짐 같은 성격은 마모되지 않는 골조다. 시간이 지나면, 상황이 바뀌면 내려놓아질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게 나였다.


  지금도 나는 가끔 밖을 내다본다. 여기서 ‘가끔’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밖을’에 방점을 찍어야 할지 솔직히 혼란스럽다. 나는 여전히 말에는 무게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약속은 지켜야 한다고 믿고 못 지킬 약속은 하면 안 된다고 믿는다. 남 탓 이전에 자신을 먼저 살펴야 하고 판단은 시간을 들여 충분히 숙고한 끝에 내려야 한다고 믿는다. 최선을 다해 겸손하고 나와 타인에게 같은 잣대를 적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는다.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두고 머물던 자리는 정리해야 한다고 믿는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고 상대가 옳다면 인정하고 수긍할 수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문장들을 열거할 때 나는 뿌듯해했던 것 같다. 적어도 나는 이런 관점에서 괜찮은 사람이라고, 이런 기준으로 통계를 구한다면 상위 30%에는 들지 않을까, 속으로는 자만했던 것 같다. 그런데 모르겠다. 같은 잣대로 나와 누군가를 비교하며,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닐까 따지는 일이 성가셔졌다.


  뜻밖의 자유를 꿈꾸게 된 건 그런 맥락에서다. 담장 밖으로 얼굴을 빼꼼 내밀 듯 아무렇게나 살아보기로. 본격적으로 담을 넘어 내달리는 데까지는 시간이 필요하겠지만 일단은 느슨하게 줄을 풀어보자는 마음과 각오로 밖을 응시하고 있다. 


  가을이라 그런지 부쩍 고민이 늘어난 느낌이다. 이러다 체중도 늘어날까 두렵다. 티 없이 맑은 하늘을 보고 있으면 누군가는 식욕이 돋는다고 하고 누군가는 책이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나는 오히려 어질러진 속이 그 맑은 하늘에 더 명백히 비치는 느낌이다. 조금 더 보고 있으니 몸이 두둥실 떠오르고 푸근한 기분도 든다. 당위를 끌어안고 살 때는 느껴보지 못한 기분이다. 가을이라서, 식물이 눈앞에 있어서, 내가 그 식물 같아서, 하늘이 맑아서, 구름이 예뻐서, 시간이 넉넉해서, 카페를 보고 있어서. 이 기울어가는 하루가 오늘 내게 위안이 될지. 내 속 좁은 골조 안에도 다름을 품을 공간이 생길지. 잠든 아기고양이 두 마리를 보며 상상해 본다.  

작가의 이전글 시궁창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