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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Sep 22. 2023

받아들이는 일

에세이

  가을인데, 좀처럼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건 책이 읽히지 않는다는 뜻도, 책을 읽을 시간이 없다는 뜻도, 책이 재미없다는 뜻도 아니다. 손이 건조하고 지문이 닳아서 책이 손에서 자주 미끄러진다는 말이 차라리 마음에 든다. 어떤 이유인지 모르나 책이 겉면을 자주 보인다. 내가 보고픈 건 그 속에 든 당신의 글자인데 나를 펼치는 건 오롯이 당신의 역량이라는 듯이 속엣말을 전하지 않는다.       


  오늘은 거칠고 빠르게 흐른다. 바람이 한 줌씩 불어와 졸리고 무거운 머리를 툭툭 건드린다. 목과 어깨, 척추에 가해지는 무게가 일정량 더해진 느낌이다. 머리칼의 밀도나 뇌의 용량은 확연히 줄고 있는데 이상하다. 졸음은 수면 부족과 일상 노동의 축적이 빚어낸 결과려니 하면 그만이지만 머리가 무거운 이유는 멀고도 흐리다.      


  둘은 서로 맞닿아 있다. 여기서 ‘둘’이란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 것’과 ‘머리가 무겁다’를 말한다. 한가하게 책을 펼치고 있자니 무언가를 써야(혹은 쓰고 있어야) 할 것 같은 마음에 초조해지고, 무언가를 쓰자니 머릿속에는 쓸 것이 남아있지 않다. 나는 머리에 쓸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내고 싶을 때 직전에 쓴 글을 읽는다. 그 글이 읽을만하다면(읽었을 때의 기분이 상쾌하거나 말끔하거나 훈훈하다면) 지금 내 머리는 빈 것이다. 그런 글을 쓰려면 머리에 담긴 것들 중에서 좋은 알맹이들만 골라야 하기 때문이다. 읽을만한 글을 쓰고 난 다음의 상태는 먹고 남은 핫바나 생도나스 봉지와 같다.      


  글이 읽을만하다는 건 뭘까? 나는 읽을만한 글을 만나면 만년필이 떠오른다. 만년필로 글을 쓸 때 획의 굵기는 천차만별이다(물론 나만 그럴 수도 있다). 카트리지를 교체한 직후라면 잉크가 번질 만큼 획이 굵다. 그때 쓴 노트를 보면 붓펜 연습장처럼 검은 잉크가 과하다. 참고 쓰다 보면 어느 정도 균형을 찾는데 그래도 거슬릴 만큼 굵은 지점이 있다. 며칠 지나면 획의 굵기가 딱 마음에 드는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면 보통 다음 장에서 잉크가 끊어진다. 


  내게 읽을만한 글이란 그런 글이다. 마음에 드는 순간을 만나면 그다음 장쯤에서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것. 독자의 입장일 때는 확실히 그런데 쓰는 사람의 입장이 되면 그게 어렵다. 보통 그런 순간에 나는 전혀 다른 지점에 시선을 두고 있다. 나중에 보면 사족인데 당시에는 그걸 모른다.      


  어제를 차분히 돌아보면 참 아무 일도 없었다. 그건 어제의 어제도, 어제의 어제의 어제도 마찬가지였다. 비가 왔고, 비가 왔고, 비가 왔...나? 양말이 젖는 게 싫어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다가 다시 신었는데 샌들이 축축해서 결국 양말도 젖고 말았다는 평범함이 하루의 주를 이뤘다. 언젠가 심리테스트를 했는데 나더러 안정 추구형이라고 했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었다. 나는 매일이 일탈의 경계에 있고 오전과 오후가 롤러코스터처럼 널을 뛰는 사람인데 모험을 싫어하고 계획에 따라 움직이며 변화를 두려워한다니. 다섯 번을 깨고도 같은 꿈을 이어서 꾼다던가, 13년째 같은 차를 몰고 다닌다던가, 샌들 하나로 일 년을 난다던가, 20년째 한 여자만 만난다고 해서 나를 안정 추구형으로 분류하는 것은 억울했다.      


  ‘선고’를 받아들이기 위해 나는 지난날을 차분히 복기했다. 어제는. 어제의 어제는. 어제의 어제의 어제는. 잠을 잔다. 일어난다. 샤워한다. 옷을 입는다. 이 닦고 면도한다. 아지와 모카 사료와 물을 채운다. 음식 쓰레기와 일반 쓰레기가 얼마나 찼는지 본다. 싱크대 설거지거리의 양도 눈으로 가늠한다. 한참 동안 보다가, 집을 나온다. 엘리베이터를 탄다. 맨 뒤편 공터로 간다. 시동을 건다. 카페로 간다. 카페를 본다. 책을 읽는다. 글을 쓴다. 카페를 본다. 로스팅을 한다. 드립백을 만든다. 설거지를 한다. 라떼와 치즈랑 논다. 카페를 본다. 카페를 본다. 카페를... 그만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마음이 편안해지기는커녕 복잡해졌다. 무언가를 받아들인다는 건 예컨대 이런 말을 듣는 것과 같다. ‘여러분! 오늘 새로운 전학생이 왔어요.’ ‘안녕하세요. 어제 윗 층에 이사 온 김 아무개입니다.’ ‘오늘따라 기계가 말썽이네요. 새 신자가 와서 그런가? 허허허.’ 

  나는 이제 안정 추구형인 나와도 대화해야 한다. ‘너는 낙이 뭐니? 평화롭게 사는 거요. 나랑 하고 싶은 게 있어? 싸우지 맙시다, 우리. 내게 부탁하고 싶은 건? 건드리지 마요. 물어 버릴 테니까. 마지막으로 전할 말이 있다면? 근데 왜 초면에 반말이니?’ 

  어렵다기보다 숙련을 요하는 일이다. 이런 건.      


  카페 앞에 덤프트럭을 세우고 오줌 누던 남자가 생각난다. 나는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고, 그자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는 꽤 오래 서서 일을 보았다. 마지막에는 어깨도 부르르 떨었고. 덤프트럭이 떠나고 난 뒤 거대한 그림자에 가려져 있던 빛바랜 아스팔트의 실체가 드러났다. 젖은 자리는 금세 말랐다. 내가 물을 준 화분처럼. 그곳은 내가 쓰레기를 버리러 갈 때 늘 디디는 자리였다. 나는 그날 그곳을 기준으로 반경 3미터의 원을 그렸다. 지나칠 때마다 힐끔 그곳을 쳐다보게 됐다. 그 당시 들었던 생각은 얼마나 급했을까, 가 아니었다. 그렇게 아무도 없어 보였나? 였다. 트럭으로 가린 쪽보다 더 많은 사람이 뒤에서 당신을 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면 당신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바퀴를 타고 졸졸 흘러 배수구도 없는 아스팔트를 샘물처럼 적시던 당신의 오줌발을 보며 우리는 눈을 돌렸지. 그날 이후 나는 카페 문을 자주 열어두었다. 그래서인지 파리와 모기는 다시 왔지만 트럭 기사 당신은 다시 오지 않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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