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리미어리그 11라운드, 토트넘 vs 첼시
어제 새벽(잠시 후면 그저께 새벽) 토트넘과 첼시의 프리미어리그 11라운드 경기가 열렸다. 그 경기의 여운은 이틀이 지난 지금까지도 가라앉지 않는다. 결과는 토트넘의 4대 1 패배. 결과만 놓고 보자면 토트넘이 잃은 것이 많은 것처럼 느껴진다. 일단 10경기 무패(8승 2무 -> 8승 2무 1패) 행진이 끝났고, 리그 선두 자리도 맨체스터 시티에게 내주었다. 현시점 프리미어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센터백 듀오로 불리던 로메로와 미키 판더밴 조합을 사용할 수 없게 됐다. 편파 판정 논란이 있긴 하지만 로메로는 Serious Foul Play로 다이렉트 퇴장을 당해 3경기 출전 정지 징계가 내려졌고 메디슨, 비카리오와 함께 올 시즌 최고의 영입 3인방으로 불리던 미키 판더밴은 전반 40분경 햄스트링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들려지는 말로는 부상이 심각해 16경기 결장이 예고되고 있다. 좌측 측면 수비수로 좋은 활약을 보이던 우도기 역시 경고 누적 퇴장을 당해 다음 울버햄튼전에 출전할 수 없으며 중원의 핵심으로 손꼽히던 메디슨은 발목 부상으로 조기 교체되어 다음 경기 출전을 예측할 수 없게 됐다.
23-24 시즌 개막 이래 교체 출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던 다이어가 급히 투입되었고 미드필더인 호이비에르를 센터백으로 세워야 했던 어처구니없는 경기였다. 아마도 안제 포스테코글루 감독 부임 이후 가장 난감했던 경기가 아닐까 싶다. 이만한 악재가 한 경기에 몰아친 것을 두고 혹자는 토트넘의 리그 우승 경쟁에 암운이 드리웠다고 평가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오늘 내내 내 머릿속을 지배했던 건 '토트넘 진짜 우승할지도 모르겠는데?'였다.
글쎄... 9명이 되고도 라인을 극단적으로 올린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전략에 의문을 표하는 이도 많은 것으로 안다. Hight Risk High Return이긴 하지만 팀플레이인 축구의 특성상 선수 1인의 부재는 경기 판도를 좌우할 정도로 크고(일단 맨 마킹이 안된다) 2명이 부족할 경우 승리 가능성은 1% 아래로 떨어진다. 라인을 올릴 경우 수비수가 상대팀 공격수를 뒤쫓으며 수비해야 하는 상황이 자주 발생하는데, 따라서 수비 부담이 커지고 수비수 역시 빠른 속도와 스프린트 능력이 요구된다.(여담이지만 아마도 이 지점에서 다이어는 시즌 초부터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구상에서 제외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다이어는 발이 느리고 빌드업 능력이 현저히 떨어지기 때문) 미키 판더밴이 햄스트링 부상을 입은 지점 역시 라인 브레이킹을 시도하는 상대팀 공격수를 뒤쫓던 장면에서 발생했다.
또 다른 문제도 같은 맥락에서 파생되는데, 수비 자체가 어렵다 보니 거친 태클을 시도해서라도 막아내야 하는 실점 위기 또한 자주 발생한다는 점이다. 그러니 로메로나 우도기의 퇴장 또한(물론 이번 심판 판정에는 정말 문제가 많다. 이번 경기 주심을 본 올리버 심판은 영국 내에서도 프리미어리그 심판 자격을 해지하거나 최소 2부 리그로 강등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고 있다) 라인을 올리고 경기장을 좁게 쓰는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경기 전략에서 비롯된 High Risk 중 하나로 볼 수도 있다. 더군다나 그런 전략을 1명이 퇴장당하고 심지어는 2명이 퇴장당한 상태에서도 밀어붙이다니. 과감하다면 과감하고 무모하다면 무모하다는 평을 들어도 모자랄 일은 아니다.
하지만 추가 시간 포함 무려 112분의 경기를 직접 본 느낌은 사뭇 달랐다. 경기 결과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그건 비카리오 골키퍼의 경기 후 인터뷰에서도 언급되는데, 비카리오는 '만약 우리가 수비에 치중했다면 남은 50분 동안 상대팀에게 더 많은 공격 기회를 제공했을 것. 우리는 리스크를 감수하고서라도 그런 일들을 해내야 했다.'라고 말했다. 안제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전략이 말하는 바는 명백하다. 공격이 최선의 수비라는 것. 더불어 우리는 비기기 위해 경기하지 않는다는 것. 실제로 토트넘은 후반 약 70분에 이르기까지 그 일을 잘 해냈다.
9명의 선수로도 끊임없이 첼시를 괴롭혔고 추가 실점해 2대 1이 된 상황에서도 상대 진영에서 얻은 프리킥 기회를 만들어냈다. 이 찬스에서 다이어는 골망을 갈랐고(오프사이드로 취소되긴 했지만) 벤탄쿠르는 간발의 차로 골을 놓치기도 했다. 상대 진영에서 프리킥 찬스를 얻는 것은 아래로 내려앉은 상태에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일들이다. 심지어 후반 추가시간 손흥민 혼자 수비 여섯 명을 달고 달려가 유효슈팅까지 만들었던 장면은 심장을 저릿하게 할 정도였다. 그 후 경기 종료를 몇 분 앞두고 연이어 실점하면서 4대 1이라는 스코어로 경기가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토트넘은 9명의 선수로도 정말 이길뻔한 경기를 해냈다. 이 경기에서 토트넘 스타디움을 찾은 6만 5천 관중은 경기가 끝날 때까지 기립 박수를 보냈다. 홈에서 대패한 팀에게 경기가 끝난 후에도 홈팬들이 떠나지 않고 관중석을 지키며 응원가를 불렀다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과거 리버풀의 유명한 수비수이자 현재 프리미어리그 평론가로 활동하는 제이미 캐러거는 '자신이 40년 동안 본 프리미어리그 경기 중 가장 인상적인 경기였으며 이것이 프리미어리그가 최고의 리그라고 불리는 이유다.'라고 감탄할 정도였다.
솔직히 이번 시즌 토트넘의 변화는 놀랍다. 간판 공격수였던 해리케인이 결국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하고, 프리미어리그 평론가들은 토트넘이 중위권에나 머무르면 다행이라고 평가절하했다. 하지만 지금에서야 그것이 평가절하로 불리는 것이지 지난 시즌 토트넘이 보여준 경기력을 생각하면 당연한 평가였다. 지난 시즌 토트넘은 확실히 상위권 팀의 경기력을 보여주지 못했다.(유로파 컨퍼런스 티켓도 따내지 못한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질 정도로) 승리한 경기도, 비긴 경기도 경기를 지켜보고 있으면 고구마 100개를 삶아 먹은 것처럼 답답했다. 그래서 토트넘 팬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 한편에는 늘 아쉬움이 있었다. 손흥민이 어서 토트넘을 떠나 제대로 된 클럽에서 제대로 된 대우를 받으며 마음껏 활개 치기를 바라는 마음도 적지 않았다. 자연스레 뉴스나 네이버 스포츠 면을 통해 경기 결과나 확인할 뿐 라이브로 경기를 지켜보는 일은 드물었다.
하지만 이번 시즌 토트넘의 경기력은 경이로울 정도로 달라졌다. 시즌 초반 몇몇 불안 요소는 있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공격 축구 또한 도마에 자주 오르내렸고 평론가들 역시 승승장구하는 토트넘을 보며 반신반의했다. 지금이야 시즌 초반이고 분위기가 좋으니 결과도 따라오지만 오래가지 못할 거라고. 나도 그들의 발언에 어느 정도는 동의했다. 토트넘은 고질적인 문제가 몇 가지 있었다. 일단 위닝 멘탈리티, '사기'의 문제. 토트넘은 사기가 낮은 팀으로 유명했다. 라커룸 불화설도 많았고 선수들도 그 데면데면한 관계를 숨기지 못할 정도였다. 심지어 이전 감독이었던 콘테는 경기 결과가 좋지 않을 때마다 선수들을 공개적으로 꾸짖었다. 단순히 잘못을 지적하는 것을 넘어 선수들 탓을 해 보는 이의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자신의 전략은 잘못된 것이 없는데 선수들이 그것을 따라주지 못해 한심하다는 것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경기 중에도 고스란히 나타났다. 감독이나 주장단으로 뽑힌 선수들이나 한결같이 리더십이 없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이 그 정도면 실제 분위기는 뻔한 것이었다.
경기력은 선수들 개개인의 능력도 중요하지만 선수단 차원의 단합이나 사기에 더 큰 영향을 받는다. 이번 시즌 토트넘 돌풍의 핵심으로 주목받는 것은 포스테코글루 감독의 공격 일변도(일명 닥공) 전략과 새로이 주장으로 임명된 손흥민의 리더십이다. 사실 선수단 자체는(몇몇 이적생들이 큰 활약을 해주고 있기는 하지만) 다른 빅클럽들에 비하면 수준이 오히려 떨어지거나 모자란 수준이다. 일단 선수단 뎁스가 떨어진다. 당장 로메로와 미키 판더벤을 대체한 센터백 자원도 부족할 정도다.
그럼에도 토트넘이 작년과 완전히 다른 팀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이 보여주는 위닝 멘탈리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번 시즌 토트넘 선수들은 이기고 싶어서 미친 사람들처럼 보인다. 이번 11라운드 경기에서도 마치 배수의 진을 친 것처럼, 임전무퇴의 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주었다. 그리고 선수들의 관계가 개선된 것이 매 인터뷰마다 쏟아져 나온다. 선수들은 손흥민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있다고 말하며 토트넘에서 뛰는 것이 행복하다고 말한다. 현재 유망주들이 가장 가고 싶어 하는 팀 역시 손흥민이 주장으로 있는 토트넘이라고 일컬어질 정도다.
물론 사기는 경기 결과가 지속적으로 좋지 못하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결과를 내는 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이번 패배는 향후 리그 레이스에서 뼈아픈 날로 기록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어쩐지 이번 첼시전을 패배했기 때문에 토트넘이 진짜 우승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9명으로도 이만큼 해낼 수 있는 팀이라면, 그런 기대감이 드는 것이다. 보여지는 결과와는 달리 토트넘은 정말로 이길 뻔했다. 졌잘싸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지만 이번 토트넘과 첼시의 경기를 세 글자로 요약한다면 그 말 외에는 떠오르는 것이 없다.
이번 패배로 토트넘의 사기는 더욱 뜨거워졌다. 아마도 토트넘 선수들이 홈팬들에게 이만한 격려와 응원의 열기를 느꼈던 경험은 지금껏 없었을 것이다. 패배했음에도 누구도 실망하지 않았다. 사면초가의 상황에서도 9명의 선수들은 끝까지 이기기 위해 뛰었다. '우리는 비기기 위해 경기하지 않습니다. 나는 5명이 남아도 라인을 올릴 것입니다.' 포스테코글루 감독과 손흥민 선수를 중심으로 한 토트넘의 그런 각오가 이번 시즌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앞으로의 귀추가 주목되는 경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