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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Nov 30. 2023

주차장 VVIP 된 사연

에세이

불과 며칠 전 일이 아주 오래전처럼 아득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얼마 전 개봉한 영화 '서울의 봄'의 마지막 장면을 보고 나올 때의 감정이 그랬다. 전두광 역할을 한 황정민의 비열함이란. 2005년 개봉한 영화 '달콤한 인생'의 백 사장 역할을 다시 보는 것 같았다. 긴박한 전개에 140분의 러닝 타임이 짧게 느껴졌다는 것도. 그러나 이 글은 영화 리뷰가 아니므로 상영관을 빠져나올 때의 찝찝한 감정은 전하지 않는 걸로. 오랜만의 에세이다. 어쩌면 자학에 가까울.


뭔가에 씌거나 홀리지 않고서야 내가 끝까지 다른 차를 타고 왔다고 믿을 수 있었을까. 완벽하게 착각에 빠질 때 그 착각은 한 치의 의심할 틈도 없는 분명한 현실로 여겨진다. 그 순간 나는 멍청한 무인 정산기를 탓했지 내가 다른 차 번호를 입력하고 있었을 거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영화관 건물을 무거운 마음으로 벗어나려는 나를 놓아주지 않는 차단기 앞에서 나는 분통을 터트리고 말았다. 뭐? 8천 원?


나는 즉시 호출 버튼을 눌렀다(나는 웬만하면 모르는 사람에게 뭘 따져 묻지 않는 성격이다). 응답하는 직원에게 무인 정산기가 말썽이라 등록이 안된 것 같다며 얼른 차단기를 풀어달라고 했다. 그러자 성실한 목소리의 직원이 차 번호가 어떻게 되냐고 물었고 나는 당당히 네 자리 숫자를 말했다. 8668요! 그런데 그때서야 보였다. 24노 4613이라는 숫자(+글자)가. 아차. 그 순간의 황망함이란. 직원이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말투로(분명 처음의 성실한 목소리와는 확연히 달랐다) 8668 맞으세요? 하고 물었고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자고 일어났는데 갑자기 여자가 되어버린 기분이랄까. 잠시 침묵 후 나는 서둘러 카드 결제를 마치고 그곳을 빠져나왔다. 나는 등신값 8천 원을 치러 마땅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한숨만 푹푹 나오는데 그 순간 문득 떠오른 것은 지난 기억이었다. 그날도 영화를 보고 나오던 길이었는데(아마도 마동석 원탑 히어로 액션 무비, '범죄도시 2' 였을 것이다) 나는 아직 유료화도 되지 않은 무인 정산기에다 버젓이 6천 원을 결재하고 나왔다(그러고 보니 결재는 왜 된 거지? 이런 도둑놈들 같으니라고). 나오고 나서야 동행한 집사님 한분이 주차비를 왜 냈냐고 물었고 나는 내라고 하니까 냈죠, 하고 답했다. 알고 보니 그냥 나가면 열리는 정산기였고, 친절하게 정산기 옆에는 '아직 미운영 중이니 그냥 출차하시면 됩니다'라는 식의 안내 문구가 붙어 있었다(고 한다. 내가 끝까지 현실 부정을 시전 하자 그 집사님은 친절하게도 해당 사진을 첨부하며 여지를 없애 주셨다). 


나는 영화관(이 딸린 건물) 주차장 VVIP로 불려도 무방하리라. 내지 않아도 되는 주차장 유지보수 비용을 손수 거들고 있으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아내에게 전화해 사건의 전말을 고했다. 그리고 나도 모르게 속엣말을 꺼내고 말았다. 이런 나랑 아직까지 살아줘서 고맙다고. 한동안 듣고만 있던 나의 19년 지기 아내는 참 너답다, 고 한 줄 평을 전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 아내는 허브 솔트를 솔솔 뿌려 구운 목살 두 장을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로메인 상추와 쌈장과 밥 반공기와 함께 차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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