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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Dec 22. 2023

헤아릴 수 없는

에세이

  하늘은 전에 없이 푸르러서 지구가 얇은 얼음막을 한 겹 두른 것처럼 보입니다. 소중한 존재에게 이름을 지어주듯, 지구도 우주에 색을 입히고 싶었나 봅니다. 그런 바람은 사랑하는 이의 목에 목도리를 둘러 주는 마음과 닮았습니다. 특별한 관계는 안녕을 공유하기 때문입니다. 하얀 입김이 눈가루처럼 선명합니다. 손으로 만져질 것처럼 질감으로 와닿습니다. '이게 나야' 하고 겨울이 속삭입니다. 움츠러들다 차가워지는 마음이 우주 먼지처럼 영롱하다가 얼어붙은 손잡이를 당길 때처럼 쩍 하고 갈라집니다. 


  우리는 별을 헤아릴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 은하에는 4,000억 개의 별이 있고, 우주에는 은하가 2조 개가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주에 존재하는 별의 개수를 추산하면 700해 개가 된다고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밤하늘을 올려다봐도 한 이삽십개 남짓밖에 보이지 않습니다. 

  700해. 어떤 숫자인지 상상도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더 간단하게 표기하기 위해, 그리고 이해의 문턱을 낮추고 소통을 용이하기 위해 '단위'를 규정합니다. 1이 만 개 모이면 1만, 1만이 만 개 모이면 1억, 1억이 만 개 모이면 1조, 1조가 만 개 모이면 1경, 1경이 만 개 모이면 1해. 1해가 만 개 모이면... 이런 식으로 말이죠. 앞선 문장에서 단위를 제거하면 이렇게 됩니다. 

  '우주에 존재하는 별의 개수를 추산하면 70,000,000,000,000,000,000,000 개가 된다고 합니다.' 

  헤아릴 수 있다고 착각할 뿐 실제로는 헤아릴 수 없는 수입니다. 우주에 별이 700해 개든, 800해 개든 우리는 그것을 체감할 수 없고 영향을 주지도 받지도 않습니다. 잠시 와... 하다가 박수 몇 번 치다가 남은 설거지를 하거나 내일 볼 역사 시험을 준비하거나 크리스마스트리 가격을 살펴보겠지요.


  별은 항성, 스스로 빛을 내는 천체를 뜻합니다. 지구에서 가장 가까운 별은 태양입니다.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평균거리는 약 149,597,870km입니다. 천문학에서는 이 거리를 AU(Astronomical unit)라는 표준 단위로 표시합니다. 빛은 1초에 300,000km를 간다고 합니다. 지구를 일곱 바퀴 반 돌 수 있는 거리라고도 하고요. 빛의 속도로 1AU를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8분 20초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보는 태양의 모습은 대략 8분 전의 그것이라는 말이 되겠지요. 제가 일하는 카페에서 집까지의 거리는 15km입니다. 저는 퇴근할 때 보통 빛의 속도로 달립니다. 그런데 시간은 25분 정도가 걸립니다. 15km를 가는데 25분이 걸린다... 뭔가 이상합니다.


  학창 시절 선생님께서 1부터 1억까지 세어보라는 과제를 내어주신 적이 있습니다. 일이삼사오육칠팔구십십일십이십삼십사... 이런 식으로 말이죠. 얼마 안 걸릴 줄 알았습니다. 오기로 만 얼마까지 세어보다가 그만뒀습니다. 흔히 억억 하는 단위들이 얼마나 큰 숫자인지 간접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주의 나이는 대략 138억 년이라고 합니다. 지구의 나이는 45억 년이라고 하고요. 

  자... 퇴근 시간이 55분 남아 있다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빅뱅 이론에 의하면 138억 년 전 우주는 하나의 점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지구는 45억 년 전 태양 주위를 맴도는 우주 먼지의 일부였을 테고요. 솔직히 그때쯤 실제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알게 뭘까요. 그런가 보다 하면 그만이고 누가 증명할 수도 없는 문제이지요. 그리고 그때쯤 어떤 일이 일어났건 현재가 갑자기 바뀌지는 않습니다. 그런 고로 저는 138억 년 전 우주와 45억 년 전 지구는 상상할 수 있는데 55분 후 퇴근하기 위해 2011년식 포르테의 시동을 걸었을 때의 기분은 상상이 안됩니다. 마치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저는 1985년에 태어났고 영화 '서울의 봄'의 배경이 된 12.12 군사반란은 1979년에 일어났습니다. 서울의 봄을 제치고 박스 오피스 1위를 차지한 '노량, 죽음의 바다'는 1598년 임진왜란 7년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노량해전을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 3가지 사건은 겨우 38년, 44년, 425년 전 일인데도 까마득히 먼 과거처럼 느껴집니다. 

  크리스마스가 사흘 후로 다가왔습니다. 크리스마스는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명절입니다. 올해는 서기 2023년입니다. '서기'는 기원 원년 이후를 뜻하고, 예수가 태어난 해를 원년으로 하고 있습니다. 즉, 2023년 전 아기 예수가 탄생했다는 말이지요. 그런데 특별히 멀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너무 익숙해서 그런 걸까요.


  138억 년, 45억 년... 헤아릴 수 있으나 헤아릴 수 없는 시간입니다. 1년은 31,536,000초입니다. 여기에 13,800,000,000을 곱하니 4.35196800E+17이라고 나오는군요. 상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가면 오히려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나 봅니다. 우주의 관점에서 보면 저는 137억 9999만 1985년에 태어나 137억 9999만 2100년을 넘기지 못하고 사라지는 그 무언가 중 하나겠죠. 우주 입장에서 인간도 참 대수롭지 않게 느껴질 것 같습니다. 신은 인간의 유한성을 극복하기 위해 고안되었다고 하죠. 헤아릴 수 없는 무안가를 이해해보려고 할 때 신의 존재는 필수인 것 같습니다. 신의 첫 번째 조건은 전지전능, 성스러움, 자애로움 이런 것보다는 매우 긴 수명, 그러니까 4.35196800E+17초보다는 오래 존재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신이 단수고, 우주의 창조부터 관여했다고 한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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