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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May 04. 2024

호주호시

에세이

호주호시. 좋은 술은 좋은 날 좋은 사람과. 군림천하라는 소설에서 마음에 담아둔 표현이다. 이 표현을 비틀면 오늘은 당신과 술 한잔 나누지 않겠다는 뜻이 된다. 예수가 행한 기적 중에서 물을 베스트 와인으로 바꾼 일이 있었다. 결혼식에 초청받은 하객들은 최고의 와인을 이제 꺼내오는구나 하고 감탄했고. 무릇 좋은 술을 대접하는 건 방문객에 대한 극진한 예우 중의 하나였다. 찬장 깊숙한 곳에 숨겨두었던 담금주를 아낌없이 내어주고픈 귀한 친구를 맞이한 것처럼. 나는 술을 잘 모르지만 술 한잔 같이 하고픈 마음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안다. 인적 드문 함미 갑판에 모여 담배 한 개비 나눠 피는 사람들에게서만 공유되던 특유의 유대도 좋아했다.


어느덧 사회에서 해악시되는 담배는 그저 연기를 뿜어내는 것만으로도 백안시됐고, 흡연 인구는 이미 어마어마한 세금이 붙은 담배를 제값내고 피우면서도 마치 엄마 립스틱을 몰래 바르는 중학생 딸처럼 가슴을 콩닥거려야 했다. 전전긍긍하며 인적 드문 곳으로 피하고 숨었다. 그렇지 않으면 마치 불륜을 저지른 여인에게만 쏟아지던 돌팔매질처럼 정당하지도 공정하지도 않은 수모와 같은 대우를 견뎌내어야 하던가. 그러므로 애연가 사이에는 그런 유대가 존재했다. 추위 속에서 더 단단해지는 겨울 호수처럼. 속은 투명해 들여다볼 수 있지만 결코 가닿을 수 없는. 어둔 골목을 손 내밀어 더듬을 때 곤두서던 털끝과 고무줄처럼 당겨지던 신경망. 그럴 때 옆사람의 긴장이 얼음을 두드리는 발자국처럼 전해질 때. 마치 하나의 뿌리로부터 돋아난 줄기, 잎, 꽃, 열매, 그리고 씨앗처럼. 어디든 인간이 품은 고유한 온기가 있고 그 온기에는 색, 냄새, 결이 있었다. 결국 인간과 인간이 서로 어울린다는 건 색, 냄새, 결이 서로를 배척하지 않는다는 것.


다시 돌아와 당신과 좋은 술을 나누지 않겠다는 말은 당신과 식사하지 않겠다는 선언이고, 당신과 함께하는 순간이 내게는 썩 반가운 시간이 아니라는 말을 넌지시 적어 내미는 쪽지 같은 게 아닐까. 당신을 귀하게 여기고, 당신과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고, 당신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아가페적 사랑이라면 나는 평생을 통해 내 곁에 머문 귀한 인연들께 정성 담아 빚은 좋은 글로 대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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