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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가 전우형 Jun 04. 2024

통증

소설

  문득 지난 기억이 떠올랐다. 몇 사람이 모여 지난날에 대한 소감을 나눴다. 배려와 격식을 갖춘 대화는 편안하고 따뜻하고 아늑했다. 그러다 갑작스럽게 두통과 어지럼증이 일었다. 그것을 잠재울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나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그들에게 예의를 다할 수 없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오해와 멸시를 받게 된다고 하더라도, 내가 수호해야 할 최저한의 품격을 상실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이미 어떤 방식으로 내가 경로를 되짚어 주차해 두었던 장소에 다다랐는지 의식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익숙하지만 결코 익숙해지지 않는 악취가 기억을 뭉텅이 뭉텅이 떼어낸 것 같은 의식의 틈에서 풍겨왔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문 손잡이를 당겼다. 관절에서 얼음가루가 바스러지는 것 같았다. 시트의 푹신한 감촉이 몸을 감싸자 어이없는 안도가 전신을 덮쳤다. 하지만 이제부터였다. 이 고통은 어중간한 지점에서 멈추지 않는다. 쇠꼬챙이로 찌르는듯한 이명이 쇳물처럼 몸 전체를 덥히고 있었다. 나는 머리를 양손으로 그러쥔 뒤 몸을 둥글게 말았다. 턱. 턱. 관절의 가장자리가 어긋나며 몸이 팝콘처럼 튀었다. 안과 밖이 멀어지는 가운데 그 소리들이 점차 뚜렷해지는 걸 느꼈다. 잔 충격이 나 쉴 새 없이 치고 지나갔다. 몸이 종이접기 하듯 가로로 세로로 꺾였다. 시야가 하얗게 변하고 있었다. 말단에서 시작된 찬 기운이 척추를 지나 심장과 미간, 정수리에 뭉쳤다. 나는 의식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 가속 페달을 밟았다. 덜커덩. 물컹한 무언가를 짓이기며 밟고 지나가는 느낌이 차체를 통해 전해졌다. 벽을 밀치고 사나운 쇳덩이들과 마찰하며 차는 앞으로 나갔다. 실행할 수 있는 어떤 저항도 떠오르지 않았다. 흐린 수채화 같은 시야 너머로 날아드는 날카로운 불빛들에 잘게 쪼개지는 의식을 맡긴 채 나는 페달을 밟은 발에 무게를 실었다.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행위에 대한 어떠한 자각도 없이. 통증이 이미 나의 일부라는 자각도 없이. 나는 내가 당도한 유일한 진실을 향해 몸을 던졌다. 


  어떤 착각은 모르핀처럼 강력해서 그것이 통증의 세기를 낮출 뿐인지 통증의 근원 자체를 사그라들게 하는지 알 수 없게 한다. 통증은 그 자체로 상처를 대변하기도 하니까. 뒤이어 쫓아오는 소리에 대항할 힘을 잃은 채 나는 그저 도망쳐야 한다고 나를 다독였다. 아니, 어쩌면 그 다독임조차도 마취나 착각의 일부였을지도 모르지만. 기억할 수 없는 기억들 어딘가에서 유재하의 '내 마음에 비친 내 모습'이 흘러나왔다. 나도 모르게 그것을 따라 불렀다. 마치 찬송처럼 신성한 기운이 발전하는 어떤 동력을 누그러뜨렸다. 그러는 동안에도 이제는 약간 명료해진 시야 속으로 빨간 불빛과 좌우로 흩어지는 다급한 섬광들이 나를 수차례 지나쳐가는 걸 느꼈다.   


  얼마나 달려온 걸까. 통증은 답해 주지 않았다. 내가 왜 그런 고통에 시달려야 하는지. 어째서 시선이 여러 갈래로 나뉘며 어떠한 갈피도 거머쥘 수 없게 하는지. 나는 손등의 상처를 들여다보았다. 지난날 끊임없이 물어뜯었던 상처. 의식할 수 없는 사이 멈춰 세운 자동차 안에서 나는 다시 그 상처를 이로 짓이겼다. 몇 개의 어둠이 나를 사로잡았다. 상처는 불에 그을린 자국 같기도, 날카로운 무언가에 올이 나간 현실 같기도 했다. 얇은 실처럼 벌어진 틈을 비집고 내가 망각한 죗값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것들이 손등에서 손가락과 손목을 지나 살갗으로 떨어지는 느낌은 따뜻하고 아늑하면서도 편안했다. 통증이 안도로 전환되는 절차와 정당성을 고민할 틈도 없이 나는 머금었던 숨을 터트렸다. 비로소 정신과 몸의 일부가 자유를 되찾는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주위를 둘러보았다. 알 수 없는 곳을 지나 알 수 없는 곳까지 왔다. 통화를 시도한 흔적이 휴대전화에 남아 있었다. 내가 했던가. 했다면 누구에게 전화를 걸었던가. 알 수 없는 이름들 뿐이었다. 


  이유를 내려놓기로 한 순간 평화가 찾아왔다. 나는 통증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자 고통의 일부가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다. 손이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나는 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캄캄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을 들여다보면 별들의 나이를 알 수 있다고 오래전 천문학을 전공했던 친구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별의 밝기와 색을 관찰하면 나이와 거리를 알 수 있다고. 나는 그 말을 하는 친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말했다. 아무리 봐도 네 나이와 거리는 알아낼 수 없는 걸. 그의 싸늘해지던 눈동자를 떠올리며 별은 그저 별일 뿐이라고 되뇠다. 별이 내게서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와 관계없이, 나는 그 쏟아지는 별빛을 고스란히 맞고 있었으니까. 멀리서 사이렌음이 들렸다. 나는 손등에 흐르는 피를 핥았다. 핼쑥해진 정신이 아주 조금이지만 현실로 복귀하는 걸 느꼈다. 사이드미러로 비치는 얼굴을 보며 나는 땀으로 젖은 머리칼을 넘겼다. 미풍이 불었다. 이제는 나와 멀어질 바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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