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짓점

by 작가 전우형

새벽 3시. 모처럼 개운한 아침이다. 해가 뜨려면 멀었지만 신체와 정신의 리듬은 명백히 이제 일어날 시간이야,라고 말하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다본 절벽처럼, 높고 거대해 보이던 순간도 평면의 일부나 굵은 선 정도로 여겨질 때 평안은 찾아든다. 하루를 시작할 때 나는 반쯤 넋이 나간 눈으로 시작점을 더듬거린다. 한쪽 끝을 찾아서 잡아당기면 언젠가는 반대쪽 끝이 다가오겠지. 꼭짓점을 다른 꼭짓점과 맞도록 접으면 면적은 절반이 되고 두께는 두 배가 되겠지. 그렇게 질문을 던진다. 하루는 어떤 모습일까. 얼마나 거칠까. 어떤 빛을 띨까. 얼마나 무거울까. 하나하나 답을 구하며 두려움을 반으로 접는다. 머리를 감고 세수를 하고 수염을 깎고 이를 닦고 옷을 입고 커피를 마시고 생강차를 타고 시계를 차고 차키, 카페 키, 카드지갑, 이어폰, 휴대 전화를 챙기고 일회용 위생장갑을 끼고 음식물쓰레기를 들고 집을 나서야지. 아, 일반쓰레기도 얼마나 찼는지 볼까. 세탁기 배관의 물을 빼두라고 했었지? 안 쓰는 이불로 덮어두라고도 했는데. 학교 축제를 구경 다니려면 얇은 외투를 두 개 입고 가서 차에 하나를 벗어두는 게 낫겠구나.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이브였네. 엊그제는 동지였구나. 1년 중에 밤이 가장 길다는.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건 춘분과 추분. 낮이 가장 긴 건 하지. 오늘 저녁 행사가 몇 시더라. 밴드에 공지가 올라와 있었던 것 같은데. 맞다. 선물 포장해야 한다고 했는데. 서울에 브라질 5kg도 보내야 한다고 했고. 지금 5kg가 있나. 학교 마치고 로스팅부터 시작할까. 바로 포장해서 우체국 마감 시간 전에 택배부터 부칠까. 더치부터 걸어두고 올라가면 물보충도 하고 대반리로 넘어갈 수 있겠지. 병을 다 썼는데. 주문을 할까. 오늘은 못 올 테고 내일은 크리스마스고 금요일에는 올까. 계곡 저편에서 은은하게 때로 거칠게 들려오는 물소리처럼 늘 곁을 맴돌며 수위를 오르내리는 불안을 들으며 하루에 있을 일들을 그리다 보면 연필로 슥슥 그어나가던 선들이 형체와 음영을 갖추듯 해야 할 일,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정리되고 때로는 희망을 품고 때로는 암담함에 빠진다. 불안이 들리는 거리 정도면 괜찮지. 불안에 완전히 잠기지만 않으면 돼. 나도 모르게 발을 담그면 얼른 알아차리고 빠져나올 수 있을 정도로만 자각하자. 그런 다짐을 한다. 종이에 쓰듯 마음에 쓴다. 정성 들여 쓰고 휘갈겨도 쓴다. 누구나 알아볼 수 있게 정자로, 나조차 알아볼 수 없게 엉망으로.


언젠가, 나는 평범하게 하루를 살아가는 능력이 없는 것 같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모든 것이 완벽한 상황에서도 불안을 느끼고 든든하게 일상을 받치는 4개의 다리 중 하나가 허물어져 그 위에 놓인 것들이 쏟아지거나 깨어져버리는 일상들을. 일어나지 않은 일들에 대한 염려와 갈라진 빙하 위에 선 것처럼 서로를 끌어당기지 않으면 조금씩 조금씩 멀어지다 결국 소리 내어 불러도 들을 수 없는 데까지 밀려나 있을 것 같은. 우리가 서로를 두고 반대로 걸어가지 않는 한 늘 그 자리에 손내밀면 닿을 곳에 있을 거라는 믿음을 심지 못한 채. 그렇게 나는 잡히지도 않을, 잡을 수 없는 무언가를 손에 쥐고 당기느라 팔다리는 후들거리고 마음아귀에는 피멍이 들었다고. 바보 같은 사람. 네가 왜 바보 같은지 알아? 너는 너만 그렇게 애쓰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 다들 그렇게 피멍이 들 정도로 애틋하게 무언가를 움켜쥐고 살아. 소중하니까. 잃고 싶지 않으니까. 그런데 어떤 것들은 아무리 잃고 싶지 않아도 사라지는 것들이 있더라. 붙잡고 싶어도 놓아주어야 할 때도 있고. 그런데 놓아준 후에야 알게 된데. 잃어버린 다음에야 깨닫는데. 그래도 괜찮다는 걸. 네가 그토록 두려워하던 무시무시한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는 걸.


겨울의 좋은 점은 지평선이 쉬이 밝아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8월에는 가끔 새벽에 눈을 떠도 이내 밝아오는 동녘하늘을 보며 서둘러 하루를 시작할 채비를 마쳐야 할 것 같은 압박감에 시달리곤 했다. 하지만 12월인 지금은 한참을 궁상을 떨었는데도 사위는 칠흑같이 캄캄하다. 마치 빛이 늘 존재해 밤이라곤 없는 백야의 한 장면처럼 늘 얼음장 같은 빛이 비치는 그곳은 낮이 밤처럼 캄캄하고 밤이 오히려 눈부시겠지. 새벽비가 잠잠히 창에 날아와 맺히고 바깥은 운무에 휘감겨 스산하다. 여전한 어둠에 아늑함을 느끼며 남은 밤을 더듬어 꼭짓점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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