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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을 맞이하는 마음을 생각하다가

에세이

by 작가 전우형

12월을 맞이하는 마음을 생각하다가, 마음을 생각한다는 말이 특별하게 느껴졌다. '마음'이라는 단어를 검색해 보았다. 1.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 2. 무엇을 하고자 하는 뜻(=뜻, 의지). 3. 마음을 쓰는 태도(=심상, 심정)라는 정의를 찾을 수 있었다. 1번을 대입하면 12월을 맞이하는 마음은 12월을 맞이하는 감정이나 생각, 기억 따위가 깃들이거나 생겨나는 곳이 된다. 2번을 대입하면 12월을 맞이하고자 하는 뜻(의지)이 된다. 3번을 대입하면 12월을 맞이하는 마음 또는 태도(심정)가 된다. 나는 3번을 택하기로 했다. 12월을 맞이하는 심정을 생각하는 행위가 내게는 특별하게 느껴졌다.


12월은 한해의 마지막 달이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는 나를 감상적으로 만든다. 풀어보면 12월은 한해에서 시간상이나 순서상의 맨 끝에 위치한 달이고, 시간상이나 순서상의 맨 끝이라는 뜻은 나를 지나치게 슬퍼하거나 쉽게 기뻐하게 만든다, 가 된다.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생각하면서 기쁨을 쉽게 느끼게 되는 상태에 이르지는 않았으므로(대개 나는 그런 상태에 놓이지는 않는다. 기쁨이라는 감정은 내게 인생 숙제와도 같다), 나는 시간상이나 순서상의 맨 끝에 위치했다는 단어를 보거나 듣거나 인식하게 되면 지나치게 슬퍼하는, 혹은 지나친 슬픔에 잠기기 쉬운, 그런 상태가 된다는 의미일까. 그런가. 정말 그런가.


나는 12월이 되었음을 알고 당연히 12월이 한해의 마지막 달임을 생각했으며 조금 후에는 2025년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감상적이 되고 말았다. 글쓰기에는 슬럼프가 찾아왔고... 하지만 슬럼프라는 말이 적절한 지부터 생각해 봐야겠지.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저조한 상태가 길게 지속되는 일을 슬럼프라고 한다면 실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에 밑줄 쫙. 나는 글쓰기라는 운동 경기에서 어느 정도의 실력을 갖고 있을까. 실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실력 자체가 없는 건 아닐까. 저조한 상태가 길게 지속되는 게 아니라 슬럼프는 핑계고 그저 실력이 거기까지였던 것 아닐까.


마지막이라는 단어가 나를 지나치게 슬프게 하는 이유는 하다 만 것 투성이라는 자각. 끈기 있게 무언가를 해내고 있는 상태에서 마지막이라는 단어를 접한다면, 예컨대 드디어 소설의 마지막 페이지를 타닥타닥 두드려 채워가고 있다면 마지막이라는 단어에 기쁨의 환호성을 지르겠지. 한 해의 시작 또는 중간중간에 어떤 계기에 맞닥뜨릴 때마다 마음 한편에 들어섰던 크고 작은 목표들이 있었다. 이를테면 2022년에 쓴 장편 소설의 순서를 조정해서 결말의 일부를 앞쪽에 위치시키고 캐릭터를 다듬어서 수정하면 어떨까. 수첩 한 권에 펜글씨로 한 자 한 자 써나가는 일에 재미를 들이면서는 이렇게 소설 초고를 쓴 후 컴퓨터로 옮기면서 1차 퇴고하고, 그걸 한번 더 작은 수첩에 옮겨 적으며 완성해 보겠다는 야심(차지 않은) 계획도 세웠었다. 몇 년째 방치한 블로그를 재정비해서 상업적이고 실용적인 글을 올려 조회수도 올리고 수익 창출도 시도해 보려고, 만 하다가 못했고, 전기차를 타면서는 전기차의 특징이나 승차감, 연비, 실용성, 장단점 등을 이어 써볼까도 했었고, 7번 국도 따라 동해안 일주하기, 차박하며 선루프 너머로 밤하늘 바라보다 잠들기, 혼자서 일주일 여행하기 등등 일상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나만의 경험을 한 후 그때의 경험, 느낌, 감정, 장면, 기억, 고통, 아픔, 사랑을 글로 녹여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내린 눈이 녹듯 그 시점을 지나면 여러 가지 현실에 밀려 사라졌지만 적어도 눈이 내린 세상을 소복이 밟아볼 때면 나는 어디로도 갈 수 있고 무엇도 할 수 있다는 기대에 부풀곤 했었다.


12월이 모두에게 찾아온다면 벨소리도 발소리도 냉기도 목소리도 모두가 다를 것이다. 어떤 12월은 한 해 동안 많은 일들을 해내느라 고생했어, 이제 한숨 돌리고 차분히 지나온 발걸음들을 돌아보며 매듭짓는 시간을 갖자고 토닥일 것이다. 어떤 12월은 그토록 많은 시간과 기회를 주었는데도 한걸음도 나아가기는커녕 뒷걸음질만 쳤구나, 너는 쉴 자격이 없어, 한해간 무언가가 바뀌어 있고 성장했을 거라 기대한 내가 어리석었구나, 하고 화를 내며 문을 쾅 닫아버릴지도 모른다. 어떤 12월은 사랑은 어떤 모습일지를 고민하다가 외로움과 그리움이란 씨앗을 잘못 심었구나. 네가 원하던 모습이 아니었더라도 그 시간들이 너를 더 단단하게 만들어 주었을 거야. 때론 혼자인 것도 괜찮지. 그의 시간이 너를 위해 쓰이지 않았더라도 그의 성장에 온전히 쓰였다면, 그가 하루를 잘 살아내었다면. 건강하게 해야 할 일들을 마쳤다면. 사랑의 여러 모습 중 그가 잘 되었을 때, 그에게 작은 기쁨이 돋아났을 때, 그의 소망이 운동화에 묻은 흙처럼 그의 하루를 고스란히 딛고 섰음을 느낀다면, 꼭 그곳에 네가 함께이지 않아도 응원하고 진심으로 기뻐할 수 있다면. 너의 외로움과 그리움으로 쓴 사랑의 모습도 충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의 평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한해의 마지막을 장식할 수 있지 않을까.


어떤 마음으로 12월을 맞이해야 하나를 생각하다가 이미 안방까지 들어온 12월에게 커피 한잔 내려주지 못한 나는, 그러나 재촉하지 않고 아직 너의 시간은 존재해,라고 말해주는 12월에게 나는, 불현듯 날아든 편지 한 통에 마음 설레듯 이제야 작게 말을 건네본다. 내게 와주어서 고맙다고. 먼 길 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처음에는 네가 벌써 온 것에 놀라고 답답한 마음이 앞서 어떻게 대할지 고민했고, 누추한 마음구석을 고스란히 들킬까 두려웠고, 네게 자신 있게 내밀 성적표가 없어서 부끄러웠다고. 여전히 헤매는 나를 보며 너는 어떤 말을 할까. 마지막은 늘 그렇진 않지만 새로운 시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는 걸. 인간이기에 실망도 하지만 그걸 딛고 서는 장면들을 보며 기운을 내기도 하고, 도무지 기운이 안 날 때는 겨울이니까, 12월이니까 이불속에 몸을 웅크리고 고분고분 잠잠히 다시 피어날 시간들을 준비해도 괜찮다고. 누군가를 품을 너른 가슴을 가져도 좋지만 너 하나만을 온전히 감쌀 두텁고 묵직한 외투도 필요하다고. 내가 네게 온 건 그런 것들을 준비할 시간이 되었다고 알려주기 위해서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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