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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소한 사랑 이야기

흔한 군인부부의 신혼생활

by 작가 전우형

아내와 나는 2004년, 20살 풋풋한 시절 사관생도 신분으로 만났다. 펜팔로 시작한 연애는 쉽지 않았다. 해군사관학교에서 간호사관학교까지 시작부터 우리는 장거리 연애였다. 달에 1~2번 있는 외박 때마다 대전으로 올라갔다. 2007년 임관 후 아내의 근무지는 더욱 멀어졌다. 나는 진해로 발령받았고 아내는 경기도 청평병원으로 근무지가 정해졌다. 불만이 없진 않았다. 젠장 청평이라니... 무려 천리길이었다. 처음에는 다소 실망했지만 어차피 가까이 있어본 적이 없었던 터라 곧 받아들일 수 있었다. 4시간 거리나 7시간 거리나 멀기는 매한가지였으니까. 그 사소한 차이가 결코 사소하지 않다는 걸 알게되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진해에서 청평가는길.jpg


임관 후 약 3개월정도 초군반 교육기간이 있었다. 금요일 오후 6시쯤 수업이 끝나고나면 부지런히 청평으로 올라갔다. 당시에는 자가차량도 없었고 진해에서 서울로 가는 직행버스노선도 없었다. 우선 마산으로 넘어가야 했다. 시내버스를 이용했지만, 일정이 맞는 몇 명이 모인 후에는 택시를 탔다. 버스는 1,300원이었고 택시는 15,000원이었지만 4명정도가 모이면 그래도 수용할만한 수준이었다. 퇴근시간에 겹쳐, 미리 예매해둔 버스 시간에 맞추기에 시간이 간당간당할 때가 많았고 내리자마자 예매해둔 표를 찾으러 달려가곤 했다. 그렇게 오후 7시 40분쯤 마산에서 서울행 버스를 탔다. 동서울에 도착했을때는 대략 밤 12시경이었다. 터미널에서 전철을 타고 청량리역으로 가야 했지만 이미 전철도 기차도 모두 끊어진 시각. 근처 PC방이나 찜질방에서 선잠을 자고 첫 기차로 청평으로 넘어가곤 했다. 그렇게 청평에 도착하면 아침 8시 반쯤 되곤 했다. 몇 번을 그렇게 하고 난 후에는 요령이 생겼다. 금요일 저녁 숙소에서 잠시 쉬고 난 후 심야버스를 이용했다. 금요일 밤 12시 버스가 있었는데 도착하면 새벽 4시 반쯤이었다. 근처 PC방에서 1시간 정도만 시간을 보낸 후 청평으로 넘어갔다. 그나마 14시간 걸리던 이동시간이 9시간정도로 줄어든데 만족했다.


1분 1초가 아쉬운만큼 주말을 정말 알차게 보내려 노력했다. 하지만 시간은 정말 야속하게 흘러갔다. 일요일 오후가 되면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에 가슴이 저릿해지곤 했다. 초군반 교육은 영내생활이었고 일요일 밤 9시까지는 복귀해야 했다. 점심식사 후에는 다시 부지런히 내려가야만 했다. 임관 후 아내와 나는 그런 장거리 연애를 했다. 애틋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교육기간이 끝나고 함정근무를 시작했을 때는 불가능해졌다.


함정부임 초기 6개월은 아예 퇴근이 없었다. PQS라는 자격평가를 통과하기 전까지는 일과시간에는 근무, 그 이후에는 평가준비를 해야 했다. 2~3일에 한번 꼴로 정박당직에 들어갔고 항해를 나가기도 했다. 새벽 5시 반쯤 일어나서 일일현황보고 준비를 하고 새벽 1~2시에 잠드는 생활이 이어졌다. 힘든 자격평가 기간이 지나고 겨우 퇴근할 수 있게 되었지만 소위는 자가차량도 허가되지 않았고 숙소는 부두에서 도보로 40분 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몇번 꾸역꾸역 새벽 1시쯤 퇴근해서 숙소로 가서는 새벽 5시쯤 다시 출근하는 생활을 경험해본 뒤에는 대부분의 날을 그냥 배에서 자는 것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피곤에 절었지만 그렇다고 아내를 만나러 갈 체력이 없지는 않았다. 그러나 함정근무자에게는 태세가 있었고 위수지역을 벗어나려면 휴가를 써야 했다. 당시에는 막내장교가 휴가를 가겠다고 할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내가 아내를 찾아 올라가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아내가 가끔 내려와서 얼굴을 보곤 했지만 그 횟수도 점점 줄어들어갔다. 결혼을 결심했던 것은 이대로 가다간 얼굴도 못보고 헤어지겠다는 우려섞인 걱정 때문이었다. 아내도 마침 결혼을 원했고, 그렇게 임관 이듬해인 2008년 1월, 아내와 결혼했다.


연애와 결혼은 부대 차원에서도 보는 시선이 달랐다. 기혼자는 가정파탄을 예방하기 위해서라도 주말이면 휴가를 쓸 수 있게 배려해주곤 했다. 이즈음 나는 잠수함 근무를 지원했고 4개월정도의 고속정 생활을 마친 후 2008년 후반기부터 잠수함 승조원 교육에 들어갔다. 대략 반년에 걸친 잠수함 승조원 교육기간동안 나는 또 다시 주말마다 진해에서 청평으로 가는 생활을 계속했다. 초군반 때와 달라진 점이 있었다면 영외자 신분이 되었기에 청평에서 조금 더 늦게 출발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아내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청평역에서 밤 9시쯤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넘어온 뒤 강남터미널로 가서 심야버스를 타고 내려왔다. 도착하면 월요일 새벽 5시쯤 되곤 했다. 잠시 근처 PC방에서 기다렸다가 첫 버스를 타고 진해로 넘어가 출근하곤 했다. 그때는 이런 생활이 피곤한줄 몰랐다. 그저 다음 주말이 언제올까 기다렸던 그런 나날들이었다.




아내와 나는 남쪽 끝에서 북쪽 끝으로 갈라져 있었지만 물리적 거리는 서로의 관계를 갈라놓지 못했고 오히려 더 애틋하게 했다. 근무지도 멀었고, 끊임없이 배를 탔던 나는 아내와 함께한 시간보다 떨어져 지낸 시간이 더 많았다. 아이가 생겼고 아내는 육아휴직을 했다. 2009년, 진해로 집을 옮겼고 교육이 끝난 나는 실질적인 잠수함 근무를 시작했다. 겨우 한집에서 살게 되었지만 첫 근무지에서 1년동안 출동일수만 대략 200일. 30일정도의 수리기간을 제외하고 나는 끊임없이 출동을 나갔다. 4주정도 되는 출동이 끊임없이 이어졌고 몇일 안되는 정박 기간동안에는 재박훈련과 검열, 훈련을 받아야 했다. 겨우 집에 들어오는 날에는 잠만 자고 다시 출근했고 정박당직을 서야 했다.


정신없이 잠수함 근무를 하는동안 아내는 첫 아이를 혼자 감당해야만 했다. 조산기가 있어 임신 6개월정도부터는 입원생활까지 해야 했다. 혼자서 많이 외롭고 두려웠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런 아내를 적절히 보살필 여력이 없었다. 첫 아이를 출산하던 때도 옆을 지켜주지 못했다. 남편으로서는 0점이었을 것이다. 첫 잠수함 근무지에서 200일 가까운 출동을 뛰며 삶이 너덜너덜해졌던 나는 처음으로 인사상담신청을 했었다. 건강도 나쁘고 정말 이러다 이혼할 것 같다며 출퇴근이라도 가능한 근무지를 원한다고 썼다. 그렇게 상대적으로 긴 출동이 없는 소형 잠수정에 근무했다. 아내는 육아휴직을 마치고 부산병원으로 복직을 했다. 마산에서 부산. 그나마 그동안 우리 사이의 거리에서 가장 가까운 근무지였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한다. 나와 아내에게 달리 '신혼'이라는 것이 있었을까? 둘다 직업군인이었던 우리 부부는 근무지가 매번 달랐다. 매년 이사를 했고, 평범한 회사원 부부처럼 집에서 출퇴근하며 살아본 적이 없었다. 결혼 초기 5년은 이런 방식으로 신혼이 강제유지되었다. 그 이전에 있었던 4년의 연애기간도 마찬가지였다. 아내와 나의 초기 10년은 장거리 연애, 주말부부로 점철되었다. 보고싶음에 목말랐으며 헤어짐이 애틋했다. 조금이라도 더 보기 위해 잠을 줄여야 했지만 그것이 어렵다고 느껴본 적은 없었다. 당연한 것이라 여기며 살았다. 일상의 희생과 노력 없이는 얼굴 한번 보기도 어려운 시절이었다.


그랬던 우리가 우여곡절 끝에 결혼 13년차 중견부부에 접어들었고 어느덧 세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내년이면 나란히 초등학교에 간다. 큰 아이는 곧 중학생이 된다. 나는 해군생활을 마무리하며 인생 2막을 준비하고 있다. 바다와 싸우느라 잃어버렸었던, 가족과 함께 하는 평범한 삶의 소중함을 찾아가는 중이다. 모든 것은 선택이고, 선택에는 기회비용이 따른다. 생계유지를 위해 선택했던 직업군인 생활은 나에게 우울증을 선사했다. 그리고 우울증은 나에게 해군을 떠나라 했고 가족에게 돌아가라 했다. 앞으로의 인생에서 또 다른 아픔과 어려움이 함께 하겠지만 적어도 힘들어는 하되 후회는 하지 않기로 했다. '사소한 사랑'에 목말랐던 시절을 경험해보았기에. 아픔은 나를 성장시켜주었고, 현재의 소중함을 알게 해주었다. 이제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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