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 : 안희연 시, '열과'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 온기가 남아있듯이
도장을 찍었던 자리에 이름이 남아있듯이
머무름이란 곧 자신의 일부를 남겨두는 것
산을 오르다 한입씩 베어무는 오이의 해갈처럼
길을 따르다 한 번씩 꺼내먹는 쌀알의 열량처럼
나는 내 곁에 머물던 이의 흔적을 추억을 기억을
때때로 주머니 속 청포도 사탕처럼 꺼내먹는다
외로움을 녹이는 방법은 그것뿐
허전함을 녹이는 방법도 그것뿐
스쳐 지나간 인연 하나하나를 그 흔적들을
고고학자가 된 기분으로
끝이 부드럽고 대가 짧은 솔로
그 위에 쌓인 먼지를
그 위에 쌓인 시간을
그 위에 쌓인 미움을
조심스럽게 털어내며
우리가 함께한 시간과
우리가 함께한 이야기와
우리가 함께한 세상을
정돈되고 다정한 언어로 복원하고
토기장이가 된 기분으로
힘주지 않은 부드럽고 격 없는 손으로
선을 만들고 형을 다듬어
뜨거운 열기에 지그시 구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래서 무엇으로도 채우지 않은 자리에
살포시 올려둔다
우리가 지내는 방식은 그것뿐
잘 지내든 못 지내든 그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