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봄도 다가오고 하니
오랜만에 대구를 다녀왔다. 3주 전쯤 손을 넣은 채로 차 문을 닫았고 간신히 수지 골절은 면했지만 점차 검게 변해가는 손톱과 시시각각 부어오르는 손끝을 바라보며 불안한 마음으로 며칠을 보냈다. 스스로도 한심하다 여길 만큼 어처구니없는 사고였는지라 귀가하고 나서도 말없이 끙끙 앓고만 있었는데 눈치가 빤한 아내가 손가락은 왜 그러냐며 물어와서 다만 무거운 걸 옮기다 찧었노라고 둘러대고 말았지만 귀신을 속이지 누굴 속이나, 정형외과 병동만 수년째 봐온 아내는 양상만 대강 눈으로 훑어보고는 이거 어디 낀 건데? 그러며 내일 병원부터 가자, 사진은 찍어봐야지, 했다. 나는 아득한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검지손가락 끝마디를 움직여 보이며, 아냐, 움직이는 거 보이지? 부러진 것도 아니고 가 봤자 타박상이라 진통제나 주겠지, 그렇게 나름 씩씩한 척을 했다. 병원 가는 걸 무슨 요단강 건너는 양 진절머리를 치는 나의 속내를 간파하고 있던 아내는 그러니까, 가서 사진만 찍어보자고, 안 부러진 것만 확인하고 오자고, 그렇게 나의 방어를 누그러트렸다. 알고 보니 아내는 그 정도면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더라도 손가락 뼈 끝 부분이 으스러지거나 금 정도는 갔을 거라고 내심 확신을 가진 채였고, 그 내용을 고스란히 전달했다가는 엉덩이를 집안 바닥에 붙인 채 꼼짝도 않을 게 뻔했기에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확인만 해보자고 말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마취를 해야거나 바로 수술에 들어갈 수도 있으니 아침까지 먹이지 않는 치밀함을 보였거니와 그것과는 아무 상관없는 척 입원이라도 시키게 되면 한동안 일할 수 있게 노트북에 서류까지 챙겼더래는 것이다. 다친 지 하루가 지나고 안중시장 근처 동네에서 그래도 저명하다는 정형외과에 도착할 즈음에 나는 밤새 끙끙 앓은 것도 모자라 다른 손가락에 비해 두 배쯤 부어버린 검지를 신줏단지 모시듯 들고 있었고, 병원에 가면서는 나도 이거 정말 뭔 사달이 난 게 아닌가 하는 걱정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지만 의외로 엑스레이 사진을 들여다보던 의사는 보시다시피 뼈는 괜찮다며 그래도 한 2주는 많이 아플 거라고 진통제를 3일 치 처방해 주었다. 안 부러졌다니 신기한데? 하고 아내가 이상한 표정으로 말을 걸어온 건 정형외과 의사의 말을 듣고 원무과 앞으로 나와 기다리던 찰나였다. 나도 약간은 현실감을 상실한 채로, 그러게, 이것도 천운인가? 아내의 말에 답하는 것도 혼잣말을 하는 것도 아닌 말을 툭 뱉으며 고개만 주억거렸다. 그게 2월 첫 주 금요일이었다. 하지만 주말 사이 손가락의 붓기는 줄어들기는커녕 보기에도 미간이 찌푸려질 만큼 푸르뎅뎅해졌고 한편으로 손톱 뿌리 부분이 들리며 농이 차는 것처럼 살갗이 허옇게 들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내는 지켜보다가 이거 너무 차오르는데? 한 번만 따 보자. 그러고 소독된 주사기 바늘을 찢었고 나는 안색이 파랗게 질리며 도리질을 치다가 이거 짜고 나면 훨씬 덜 아플걸? 하는 아내의 말에 내심 죽기야 하겠냐며 손가락을 맡겼다가 이어지는 극심한 통증에 부부간의 의마저 끊어질 뻔했다가, 파르르 떨며 고통을 참아내는 내게 미안, 안 나오네 이거, 더 깊이 찔러야 하나, 그러는 아내를 보며 나는 손가락을 들여다보는 아내의 얼굴을 저쪽으로 돌리며 간신히 손가락을 빼냈다. 공연히 건드려진 탓에 통증만 더 심해졌다며 흰소리를 하는 내게 아내는 미안하다고 했지만 그날만큼은 아내가 정말로 미울 만큼 매서운 통증에 신음해야 했다. 주말이 지나고 진통제도 소용없는 지경이 되어 병원을 다시 찾아가 사정을 설명했더니 의사는 항생제를 추가 처방해 주었다. 항생제를 하루 정도 먹고 나자 손가락의 붓기는 확연히 차도를 보였고, 처방된 사흘 치를 복용하고 나자 곧 다가온 설 연휴에 의사는 일주일치를 추가 처방해 주었다. 나는 그런 채로 운전대를 잡고 갑자기 복통을 호소하시는 처가댁에 가족들을 먼저 데려다준 후(혹여나 맹장일까 하여 찾아갔지만 손주들을 보시더니 병세가 완연히 나아지시는 장모님을 보며 우리 둘 다 신기해하다가) 홀로 주일 예배에 참석했고 예배 후에는 권사님 한 분을 댁에 모셔다 뒤 청주로 가서 가족들을 다시 태운 후 본격적인 귀성길에 올랐다. 저녁 무렵이라 그런지, 아니면 이미 움직일 사람들은 어지간히 길을 서두른 다음이라 그런지 청주서 대구 가는 길은 한산했고 부지런히 달려 정확히 2시간 만에 칠곡의 어머님댁에 도착했다. 작년 어머님 생신 때 이후로 처음 찾아뵌 거라 아파트 단지에 없던 전기차 충전기가 생겨 있었고, 충전하려면 거기 대면된다는 엄마의 친절한 안내 덕에 103동에서는 제법 멀지만 자리도 공간도 여유로운 전기차 충전구역에 편히 주차하고 고향 같은 엄마 집으로 갔다. 사실 대구는 나의 고향이라기엔 손색이 있다. 태어나고 자란 곳은 부산이고 직장을 가진 후 주로 근무했던 지역도 주로 부산·경남 일대여서 대구는 말 그대로 명절에만 가던 곳이었다. 친가 외가가 모두 대구에 있었으니까. 2018년 휴직했을 때 아내의 근무지가 대구병원이어서 경산 쪽에 잠시 산 것 말고는 대구를 거주지로 했던 시절은 없었다. 내가 출가하고 어머니가 부산의 집을 처분하고 대구로 이사해서 두어 번 자리를 옮기며 현재의 동네에 살게 되셨기에 대구는 또다시 명절이나 특별한 때 찾아뵙는 곳이 되었다. 하지만 고향이 별 건가. 반갑고 그리운 사람이 있으면 거기가 또 고향이 되는 거지. 다만 그곳에서 만나는 사람과는 별개로 동네가 정이 붙지 않는다거나 생경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주일 밤늦게 엄마 집에 도착하고 나는 월요일 내내 누워 지냈다. 아이들은 이제 어느 정도 컸는지 셋이서 대구 시내 구경도 하고 모노레일도 타겠다며 외출에 나섰고 엄마도 잠시 요 앞 팔거천을 걷는다며 나갔다 오는 동안에도 나는 누워서 죽은 사람처럼 잠만 잤다. 잠깐씩 눈을 떴을 때는 통증이 일 때마다 정신을 딴 데 돌리려고 보고 있던 검법남녀를 봤다. 화요일은 서둘러 나서려는데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지천면 신동에 주로 와 계신 아버지와 연락이 닿아 그쪽으로 향했다. 엄마 집에서 30분 거리도 되지 않아서 출발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비게이션 목적지로 설정한 지천어린이집에 닿았다. 아버지는 좁은 골목 앞까지 나와 우리를 반겼고 창문을 내려 인사드린 후 조금 더 지나 공터에 차를 대고 걸어서 아빠 집으로 갔다. 잠시 뵙고 나가서 점심 식사를 함께 하려고 했는데 이것저것 준비를 다 해 두신 터라 풍족히 먹고 마침 방문한 작은아버지까지 세배를 드리고 나니 어느덧 오후 두 시가 넘어 있었다. 인사드리고 다시 차를 타고 나서서 청주로 향했다. 명절 음식이랑 밑반찬 할 것들과 식재료들을 두루 챙겨주고 싶으셨는데, 우리가 다음 일정이 시댁이어서 당장 냉장·냉동이 필요한 것들을 돌아가는 길에 받기로 한 이유였다. 차례를 마치고 부지런히 귀경길 행로에 오른 사람들과 겹쳐서 청주까지만 3시간이 걸렸고 조금 쉬어갈 겸 처가댁에서 저녁을 간단히 챙기고 7시 반쯤 다시 나섰다. 하지만 귀경길 정체는 아직 한창이어서 도로 앞 쭉 뻗은 곳까지 새빨간 눈들이 먼 길을 달려온 운전자들의 충혈된 흰자위처럼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고 그나마 심하게 막히지는 않아서 두 시간 반 여만에 청주에서 평택 집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나는 또 씻지도 못하고 잠이 들었다. 통증은 여전했지만 겉보기만큼은 확연히 나아진 검지손가락을 보며 마음은 가벼워진 채였다. 수요일은 연휴 마지막 날이었지만 카페를 챙기러 나갔고 저녁 약속해 두었던 신의 악단 영화를 관람하러 갔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는데 너무 많은 것들이 생략된 느낌이라 아쉬웠고, 무엇보다도 찬양하는 장면들이 좀 더 본격적으로 나왔으면 했는데 맛보기만 보여주다 만 느낌이어서 더더욱 기운이 빠졌다. 그래도 100만 관객을 넘어섰다니 축하할 노릇이지. 목요일부터는 약이 끊어졌고 생각보다는 통증이 심하지 않아 다시 병원을 찾지는 않았다. 다만 사흘 동안 그간 약기운에 아프지 못했던 것들이 한 번에 몰려오기라도 한 건지, 극심한 몸살 기운에 시달렸다. 그래도 움직일 만은 해서 이것저것 하며 지냈는데 지난 일요일에는 탈진이 온 건지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어려웠다. 그래도 예배는 빠지고 싶지 않아서 가서 찬양도 목놓아 부르고 기도도 드리고 왔는데, 식사 교제도 나누지 못하고 돌아왔다. 괜히 다른 성도님들에게 걱정만 끼친 듯해 마음이 무거웠지만 그보다 더 무거운 눈꺼풀 탓에 눕자마자 잠들었고 내리 15시간을 침대며 이불을 축축하게 적실정도로 실신해 있다가 일어났다. 눈 떠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오한이 들어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으니 한결 나았다. 이제는 손가락이 떨어지는 물에 닿아도 그리 고통스럽지 않고 내 것이 아닌 느낌으로 붙어만 있는 새까만 손톱도 잘못 건드리면 둔중한 통증이 일기는 하지만 찌릿한 신경통 말고는 놀랄 만큼 상처가 아물었다는 실감이 든다. 여전히 두 번째 손가락을 편히 쓰지는 못해서 커피를 내릴 때나 더치를 담거나 할 때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피하거나 들고 있는 나를 발견하기는 하지만. 세 번째 손가락을 검지 대신으로 자주 썼더니 어느새 물집이 잡혀 있었다. 이렇게 고통을 분담하며 또 서로 의지하며 사는가 싶고, 한참 병간호하던 사람이 아픈 사람이 나아갈 때쯤 되면 몸살이 나는 이유도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지금 이 글도 실로 오랜만에 타자기를 붙들고 쓰고 있지만 두 번째 손가락 대신 세 번째 손가락으로 타자를 주로 누르다 보니 오타도 잦고 한 번씩 헷갈린다. 하지만 어딘가. 그동안은 직접 쓰지 않아도 아팠던 탓에 이마저도 할 수 없었던 것을. 자고로 사람은 안 아프고 볼 일이다. 이로써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통증을 안고 보냈던 명절과 회복의 과정, 그리고 그간 글이 뜸했던 이유에 대한 변명 같은 글을 마친다. 날이 꽤 따뜻해졌다. 가끔 바람이 차기는 해도 이제는 한겨울 같은 느낌은 없다. 이 글을 읽는 모두 건강히 봄마중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안부를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