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너의 봄
겨울 해가 졌다. 창밖으로 내리는 눈이 올해의 마지막 눈처럼 보였다. 하지만 이것은 틀린 말이다. 올해라는 말도, 마지막이라는 말도, 그리고 어쩌면 눈이라는 말도. 하나같이 틀린 말들로 문장을 만들어 쓰는 건 그 자체가 틀린 말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지만 내가 그런 식으로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의미도 된다. 나는 여전히 올해를 살고 있고, 나는 여전히 새해로 넘어서지 못했으며, 그런 나를 아랑곳하지 않는다는 듯이 제갈길 가버리는 계절이나 시간 옆에 비켜선 채 망연히 멀어져 가는 그 끝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 그래서 여전히 올해의 마지막이라는 수사를 쓰고 있는지도. 그리고 눈이 비로 바뀌는 모습을 차분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는지도. 생각의 속도가 물결을 타지 못할 때 꿈이 만들어지는 모양으로, 답답증이 일 때 지퍼를 열어젖히듯 고인 무언가가 툭, 날것 그대로 튀어나온다. 그 매캐하고 비린 향이란 미루어두었던 잠을 깨우기에 충분하며, 소스라칠 만큼 섬뜩하다. 며칠 밤을 몸살에 시달렸다. 땀을 한 바가지 흘리고 나면 축축해진 베갯잇과 이불이며 담요가 더없이 차갑게 느껴지고 곧 이가 딱딱 부딪힐 만큼 거센 한기가 찾아온다. 떨리는 온몸을 옹송그린 어깨로 덮어보려고 해도 아무리 강하게 붙들어도 새어나가는 마음처럼 어딘가는 드러나게 마련이고 애초에 그런 식으로 해결할 수 없는 한기라는 것을 알면서도 매달리는 마음은 겨울나무처럼 한적해서 다른 방편의 길을 찾지 못한다. 그저 떨어지는 눈을 펼친 양 팔로 받듯, 거기가 제자리라고 믿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몸을 흔들어댈 뿐. 쌓이는 눈을 흩어내려, 추위를 흩어내려. 혹은 시간과 질량과 미련을 흩어내려. 그런 밤을 보내고 맞는 아침은 바짝 마른 혀로 도마뱀 껍질 같은 입술을 핥는 것처럼 건조하고 무겁다. 하지만 개운하다. 이번의 눈은 쌓이지 않았다. 눈꽃은 4월의 꽃비처럼 하늘하늘했다. 잔잔한 바람을 타고 무게 없이 흩날렸다. 두어 시간 그렇게 내리던 눈은 바닥에 닿기도 전에 비로 변했다. 하얗게 안개처럼 하늘을 채우던 올해의 마지막 눈은 그렇게 졌다. 그리고 늦은 오후, 카페에는 빛이 들었다. 나는 겨울을 보낼 준비를 마쳤고 그날 밤 길고 품 없는 잠을 잤다. 내 마지막은 이랬으면 한다. 올해의 마지막 눈처럼 누군가의 마음에 쌓이지 않고 흔적 없이 스미며 짧은 햇살을 비추다가 미련 없이 지길. 나의 마음속에도. 혹은 너의 마음속에도. 아침을 응원하기에 너무 무거운 주제이려나. 멀찍이 터오는 동처럼 밤그림자를 찬연히 밀어내주렴. 새해야. 새 해야.
* 표지 : 박완서 에세이, '잃어버린 여행가방' 중에서